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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엔고 즐기는 미국과 EU … 일본은행은 속병
입력 : 2011.03.28 1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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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화 강세가 심상치 않다. 엔화 환율은 8월24일 현재 15년 만에 1달러당 84엔을 하회한 83.58엔을 기록한 후 84~86엔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엔고 현상으로 인해 니케이(Nikkei) 지수는 1년4개월 만에 9000선이 무너졌으며, 수출 중심의 일본 산업계는 일본 정부에 환율 개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일본은행과 정부는 8월30일 엔고 대책으로 10조엔을 더 시중에 풀겠다는 추가적인 금융완화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시장에서 일본 정부가 엔고에 대응할 마땅한 정책이 없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여지며 1달러당 엔화는 다시 83엔대로 하락했다. 엔고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이 오히려 엔화의 강세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게 돼버린 것이다.
엔화는 왜 강세를 보일까. 안전자산 선호 심리 때문이라는데, GDP의 두 배 가까운 국채를 발행하고 있는 일본 경제는 안전한 것일까. 과연 일본 정부는 엔화 강세를 저지하기 위해 강경책을 사용할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먼저 현재 엔화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 필요가 있다.
현재 1달러당 엔화의 가치는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던 1995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국제 외환시장에서의 실질적인 엔화 가치를 계산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림 1' 1달러당 엔화 가치 추이
달러화를 포함한 국제 외환시장에서의 실질적인 엔화 가치를 알 수 있는 지표로써 일본은행의 ‘실효환율’이 있다. 이를 보면 현재의 명목상 엔화 가치는 1995년의 수준을 이미 넘어선 상태다. 하지만 일본의 수출 경쟁력, 물가 상승률 등을 감안한 실질적인 엔화의 가치는 1995년에 비해 오히려 30%포인트 정도 낮은 상태다. 즉 엔화의 실질적인 가치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높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언론에서 우려하는 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 2' 실효외환환율 (1973 = 100)
이는 기업이 엔고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견딜 수 있는지 알아보는 ‘내구력 테스트’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본은행은 1달러당 환율을 90.5엔으로 가정하고 2010년 일본 제조업의 영업이익을 전년 대비 +80.9%로 전망했다. 1달러당 80엔대 중반인 현재의 환율로 계산하면 수익 악화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환율이 상승해야 일본의 제조업체가 적자를 기록하는 것일까. 다이와 종합연구소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일본의 제조업체는 1달러당 80엔일 때 전기 대비 영업이익이 감소세로 돌아서고, 67엔일 때 적자를 기록한다. 즉 시장에서 깨져서는 안 될 마지노선으로 상정하고 있는 1달러당 80엔을 깨더라도 일본의 제조업체는 흑자를 기록한다는 뜻이다. 이는 일본 제조업체가 수출 시 결제하는 통화비율이 달러화가 5할, 엔화가 4할이기 때문에 엔고가 모든 수출기업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점과 실질적인 엔화의 가치가 역사상 최고가에 비견할 만큼 높은 수준이 아니라는 점에 기인한다.
8월25일 발표한 7월 무역통계에 따르면 경상수지는 엔화의 강세에도 전기 대비 119.9% 증가한(?? 수치 확인) 8019억엔으로 14개월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로 미국과 EU에게 위안화 절상을 요구받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도 일본은 153억엔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할 정도다. 이렇듯 수출을 통한 꾸준한 경상수지 흑자 유지가 GDP의 두 배 가까운 국채 발행에도 엔화를 안전자산으로 여기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또한 대량의 국채를 발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중 95.4%를 일본의 은행, 연기금, 기업 등이 보유하고 있으며 해외 투자가의 보유율은 4.6%에 불과하다는 점도 엔화의 안전성을 보장해 주는 중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이 17년 연속 대외순자산 1위의 세계 최대 채권국가라는 점 역시 엔화에 안정성을 더해주고 있다. 이러한 안전성 때문에 미국이나 EU의 불투명한 경기에 대한 리스크를 피하려는 유동자금이 엔화를 매입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엔화가 강세를 보이는 것이다. 거기에 중국이 최근 외환보유액 다변화 정책의 일환으로 달러화를 팔고 엔화를 매입하면서 엔화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엔고 현상이 발생한 원인과 그로 인한 일본 기업의 수익 악화 정도가 심각하진 않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최악의 경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지 엔고로 인해 일본의 산업계가 큰 타격을 받고 있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특히 한국 기업은 엔고의 수혜로 수출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며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높여가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는 엔화의 강세를 저지할 수 있는 강경책을 사용하게 될까. 강경책이 있는데도 지금은 그리 심각하지 않기에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답은 'NO'다. 왜냐하면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엔고 문제는 국제적인 공조 혹은 미국의 명확한 의지의 표현이 있은 후에야 해결되곤 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독자적인 개입은 엔고의 속도 조절이라는 일시적인 효과는 거두었지만 추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이러한 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가 1990년대 초•중반의 엔화 급등기다. 당시 미국과의 무역마찰로 촉발된 엔화의 급등을 저지하고자 일본 정부는 1994년에 2조639억엔, 1995년에 2조3589억엔을 투입했지만 1달러당 엔화는 160엔대에서 79엔대까지 급등했다. 엔고 문제는 결국 1995년 G7이 ‘엔화 급등에 반전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하고 나서야 해결됐다. 이후의 엔화 급등기에도 일본의 단독적인 개입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다면 현재 외환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엔화의 급등세를 저지하기 위한 미국 혹은 주요 선진국의 협조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9월2일 '로이터통신'은 이와 관련 EU 금융 당국자의 매우 흥미로운 인터뷰를 게재했다. 인터뷰에서 금융 당국자는 “EU는 일본이 엔화 강세를 저지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하더라도 협조할 생각이 없다. 통상적으로 협조 개입은 G7이나 G20에서 다룰 문제이기 때문이다”며 “맞바람을 향해 침을 뱉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덧붙였다.
현재 미국과 EU는 과거 최대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실시했음에도 ‘더블딥’의 가능성이 제기될 만큼 경기 상황이 좋지 않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각국은 자국의 통화 가치를 하락시켜 수출을 확대시키는 통화정책을 선택하고 있다. 또한 자국의 통화 가치 하락은 최근 우려되고 있는 디플레이션의 가능성을 완화시키는 효과도 있다. 따라서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도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일본의 엔화 가치 상승은 미국과 EU의 통화정책상 나쁘지 않은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과 EU는 일본이 버블 붕괴 후 장기불황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2000년대 초반부터 2007년까지 엔화 가치 하락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통화정책을 실시한 바 있다. 특히 EU의 경우 1유로당 90엔에서 170엔까지 하락했어도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하지 않았다. 같은 기간 중 일본의 물가가 하락한 것을 고려해보면 엔화는 실질적으로 숫자 이상의 하락효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시기의 엔화 약세는 미국과 EU의 경제가 호조세였고, 일본의 금리가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점이 중요한 원인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과 EU가 엔화 약세를 방조하지 않았다면 일본의 경기 회복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러한 과거의 경험이 현재 엔화 강세에 대한 미국이나 EU를 비롯한 주요 선진국의 협조 구할 수 없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의도적인 엔화 약세로 인한 수혜를 입었기에 엔화 강세로 인한 경제적 충격이 있다 해도 국제적인 협조를 요청할 수 없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방법으로 정치외교력을 통해 협조를 요청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일본은 집권 경험이 없는 민주당이 이끌고 있다. 더구나 민주당 내에 칸 수상과 오자와 간사장 간의 당대표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공백이 생긴 상태다. 통화정책을 이끌고 있는 재무성과 일본은행에서는 “수상이 바뀔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정책을 실시하기는 힘들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국제적 협조를 위한 협상 자체가 불가능 할 정도로 정부 기능이 마비됐다. 안심하고 엔화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시장의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결국 엔화 강세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EU 등 글로벌 경제가 개선되는 것이 선행조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 나오는 각종 경제지표상 글로벌 경제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즉 당분간 엔화의 강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만약 더블딥의 가능성이 보다 확대되기라도 한다면 1달러당 엔화는 사상 최고가인 79.75엔을 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일본은행의 입장이 서글프다.
[ 배준연 대한생명 경제연구소 연구위원·경영학 박사 Junyeonbae@korealife.com]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호(2010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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