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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글로벌 환율전쟁
입력 : 2011.01.14 16: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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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희생을 감수하기에는 저마다 사정이 너무 절박할 뿐더러 선진국뿐만 아니라 신흥국들까지 참전을 종용받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 등 이른바 ‘잘 나가는 신흥국’들이 피해를 뒤집어쓸 가능성이 높다.
리먼 브러더스 파산 후 어마어마한 돈 살포 환율전쟁은 남의 일이 아니다. 넓게 보면 한국 경제, 좁게는 한국 기업과 한국 사람 개개인까지 환율전쟁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전쟁의 발단은 ‘글로벌 경제위기’가 촉발된 2008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신청으로 세계 금융시장이 절단 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확산되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일제히 ‘돈 살포’ 작전에 들어갔다.
당시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자금 공급 방식을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는 것(Helicopter Drop of Money)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래서 버냉키 의장의 별명이 ‘헬리콥터 벤’이다. 한마디로 무식하게 돈을 뿌렸는데 이를 근사하게 표현한 것이 요즘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양적 완화(QE: Quantitative Easing) 조치다.
각국 중앙은행은 금리 인하 외에도 CP(기업어음)·회사채 매입, 은행 주식 매입, 기업채 무담보대출, 장기국채 매입 등 쓸 수 있는 수단을 총동원해 아낌없이, 무지막지하게 돈을 풀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 8월 말까지 이런 ‘비전통적’ 통화 정책을 통해 풀려나간 자금은 어마어마하다. 나라별로는 미국 2조581억 달러, 유럽 3476억 유로, 영국 2185억 파운드, 일본 78조7750억엔에 이른다. 인류 사상 최대 규모의 ‘돈질(?)’이 진행 중인 셈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FRB와 유럽중앙은행(ECB)의 이 같은 자금살포 정책을 ‘초완화 통화 정책(Ultra-loose Moneytary Policies)’으로 부르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정책이 세계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으며 그 대표 버전이 글로벌 환율전쟁이라는 점이다. 환율전쟁의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고실업, 저소비에 시달리고 있더라도 각국 중앙은행이 돈을 풀면 당분간은 그럭저럭 경제가 굴러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세계화된 마당에 일단 풀려나간 돈이 그 나라 안에서만 맴돌 리가 만무하다. 더 높은 수익률과 효용을 좇아 국경 없이 떠돌기 마련이다. 한국과 같은 나라는 크게 두 갈래로 선진국 자금이 몰려들게 된다. 거시경제 여건이 좋은 만큼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하려는 외국인 자금이 늘어날 것이고, 이에 덧붙여 수출이 늘어나 경상수지 흑자가 불어난다.
자본투자가 늘어나고, 수출이 잘되면 좋은 것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환율과 물가다. 선진국의 유동성 홍수는 세계 각국의 외환시장을 불안하게 만들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FRB와 ECB가 추가적인 양적 완화 정책을 통해 돈을 대량으로 풀었다고 치자. 그 자체로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는 조치다. 더구나 이 자금의 상당액은 신흥국으로 흘러들어 결국 해당국의 통화가치를 높여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을 깎아먹게 된다. 신흥국 정부로서는 외환시장 개입의 유혹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미국과 유럽은 수시로 신흥국들의 외환시장 개입에 견제구를 날리고 있다. 잘 사는 선진국들이 자기네부터 살겠다고 신흥국 경제를 사지로 내모는 모양새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미국 입장에서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글로벌 임밸런스(Global Imbalance)야말로 세계경제의 최대 위협이다.
글로벌 임밸런스란 중국으로 대표되는 신흥국들이 수출에 열을 올리면서 경상수지 흑자를 쌓아가는 반면에 미국으로 대표되는 선진국 경제는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 해법의 핵심은 중국이 미국에서 거둬들이고 있는 대규모 무역 흑자를 줄이자는 것이다. 미국의 관점에서 위안화 가치를 낮게 묶어놓고 이를 발판으로 수출에 몰두하는 중국은 얄미운 존재다.
티모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이 바라보는 환율전쟁의 희생자는 미국뿐 아니라 중국을 제외한 다른 신흥국이 될 수도 있다. 가이트너 장관은 지난 10월6일 브루킹스연구소 연설을 통해 “통화가치가 현저하게 저평가돼 있는 국가들이 통화를 절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위안화의 인위적인 가치 하락에 의해 촉진된 수출에 대해 보복관세를 물리는 ‘공정무역을 위한 환율개혁 법안’이 미국 하원에서 통과된 지 며칠 만에 나온 얘기다. 이미 여러 차례 중국의 위안화 절상을 요구해왔던 가이트너 장관은 다시 한번 중국의 ‘행동’을 촉구했다.
가이트너 장관이 보기에 중국처럼 경제 규모가 거대한 국가가 자국 통화의 가치를 낮게 유지하면 주변 국가들도 따라갈 수밖에 없고, 이는 결과적으로 신흥국의 인플레이션과 자산 거품 및 소비 침체를 초래할 것이라는 논리다.
그는 선진국들의 양적 완화 조치에 대한 변호에도 나섰다. 그는 “지금 단계에서 경기 부양책을 서둘러 철회한다면 경기 회복세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지금 당장은 경기 회복을 뒷받침하기 위한 양적 완화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미국, EU 등 중국 압박
IMF는 나흘 뒤인 같은 달 6일 발표한 하반기 세계경제 전망 보고서를 통해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자국 통화가치를 올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대외의존도를 낮추고 내수를 확대하는 균형 있는 성장을 위해서도 통화가치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IMF는 특히 중국은 역내 통화가치 강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에 대한 압박에는 유럽도 적극적이다. EU와 중국은 정상회담을 하고 환율 문제 등에 대해 집중 논의했지만 시각차를 좁히지 못하는 파행을 겪었다.
헤르만 반롬푀이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등 EU 지도부는 지난 10월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위안화 절상, 교역조건 개선, 인권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개진했다. 반롬푀이 상임의장과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은 정상회담 후 공동 성명에서 “EU와 중국은 사안에 접근하는 데 공통점과 함께 이견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급기야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지난 10월7일(현지시각) “환율 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분쟁으로 치닫고 보호주의를 초래하면 1930년대 대공황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웃을 가난하게 만드는 정책은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며 중국을 겨냥했다.
그렇다면 미국, EU 등은 중국 위안화를 얼마나 올리라는 얘기일까. 뚜렷한 가이드라인은 없지만 단기간에 20~40% 수준의 절상은 필요하다는 시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비해 중국은 지난 5월 베이징에서 열린 미·중 전략경제대화(SAED)에서 경제적 타격을 최소화하고 글로벌 임밸런스 해소를 위해 연간 3% 안팎의 위안화 절상을 카드로 내민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물론 미국, EU의 입장은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의 반응은 험악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지난 10월6일(현지시간) “급속한 위안화 절상은 중국에 비참한 사회적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며 “위안화 절상에 대한 압력을 중단하라”고 맞받아쳤다. 원 총리는 “중국의 많은 수출 기업들이 폐쇄될 것이고 이주 노동자들이 귀향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면서 “만약 중국이 사회·경제적 혼란에 빠진다면 이는 전 세계에 재앙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여기에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꼬이게 만드는 건 선진국 간의 공조 붕괴다.
지난 9월15일 일본은 엔화가치 하락을 유도하기 위해 대규모 외환시장 개입에 나섰다. 일본 언론들에 따르면 총 2조1249억엔 규모로 사상 최대다. 중국을 상대하기에도 버거웠던 미국으로서는 동지가 적으로 돌변한 셈이다.
설마 일본이 미국의 뒤통수를 쳤을까. 적어도 외환시장 개입 전에 미국과 사전 협의가 없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국 재무부 관리들이 상당히 당황했다는 정황 증거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EU도 경악했다. 중국과 일본의 협공을 받아야 하는 EU는 즉각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사실 EU 내의 갈등도 만만치 않다. 최근 유로화 가치 하락으로 수혜를 본 독일과 여타 회원국 간의 대립이 심상치 않다.여타 회원국들은 EU 회원국들의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해 독일이 더 많은 재원을 부담해주길 바라고 있지만 독일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미국도 독일에 대해서는 불만이다. 대규모 무역 흑자를 누리는 독일이 좀 더 돈을 풀어 유럽 내수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은 이런 미국의 요구에 대해서도 ‘무슨 얘기냐’며 시큰둥한 입장이다.이런 가운데 선진 경제권이 중국을 포위한 가운데 한국, 브라질, 대만, 태국, 헝가리 등 여타 신흥국들은 불똥이 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양상이다. 자칫 환율 조작국으로 찍힐 경우에는 피해를 뒤집어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슬그머니 외환시장 개입에 공을 들일수도 없는 상황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9월30일 자에서 한국,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 중앙은행들이 외환시장에 개입한 것으로 의심된다며 일본도 가세했다고 보도했다. 특히 중남미에서도 브라질, 콜롬비아, 페루가 외환시장에 개입해왔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꼼짝 마라’는 엄포다. 국제 환율 공조가 유일한 해법일 듯
현재로선 국제 환율 공조의 재가동이 유일한 해법처럼 보인다. 시장에서는 1985년 G5(프랑스·독일·일본·미국·영국) 재무장관들이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미국의 무역수지 개선을 위해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 절상에 합의한 것 같은 극적 반전을 기대하고 있다. 문제는 그것 역시 성사 전망이 밝지 않다는 점이다.
[이진우 매일경제 경제부 차장]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호(2010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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