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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 술이 웬 말? 위스키에 꽂힌 MZ
입력 : 2022.03.03 16: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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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잠실에 거주하는 김정기 씨(38)는 저녁 혼술로 위스키를 자주 마신다. 위스키는 숙취도 별로 없고 깔끔할 뿐만 아니라 혼자 즐기기에도 좋다. 김 씨는 “젊은 층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사례가 늘어난 것 같다. 칵테일이나 하이볼 등 다양하게 즐길 수 있어 좋다”고 전했다.
과거 유흥업소에서나 마시던 아저씨 술로 인식되던 위스키 시장이 최근 뜨거워졌다.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고급 술’인 위스키에 꽂힌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물류난이 더해지면서 ‘위스키 품귀’ 현상까지 빚어지고 있다.
위스키 수입액은 2007년 2억6457만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감소세를 보였다. 특히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는 6년 연속 줄었다. 2014년부터 주5일제가 단계적으로 시행된 데 이어 2018년 주52시간제도 실시되며 저녁 회식이 줄고 ‘독한 술’을 자제하는 음주 분위기가 형성된 영향이 컸다. 또 2016년 소위 ‘김영란법(부정청탁금지법)’ 시행으로 주요 판매처인 유흥업소용 수요가 줄어든 것도 영향을 준 것으로 주류업계는 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든앤 맥페일사의 ‘G&M 제너레이션스 80년’
한 위스키 수입업체 관계자는 “(공급 물량이 수요를 못 따라가) 신규 입사한 영업직 직원들이 자신도 마셔본 적 없는 제품을 판매하는 웃지 못 할 일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마트에 따르면 코로나가 3년째 기승을 부리는 동안, 매장에서는 위스키가 불티나게 팔렸다. 전년 대비 위스키 매출액이 2020년 45%, 2021년 65.8% 증가했고, 올해 들어서도 50% 이상 뛰었다. 지난 2월 9일에는 이마트 앱을 통해 스마트오더(앱으로 주문해 매장에서 픽업)로 판매한 발베니 14년산 500병이 2시간 만에 완판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 정통 수제 싱글몰트 위스키인 발베니는 10만원 중반대로, 대형마트 고가 주류 중 하나다.
이마트 관계자는 “발베니, 맥켈란 같은 싱글몰트 위스키는 진열하기가 무섭게 팔려나가고, 일부에서는 ‘오픈런’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며 “위스키는 최근 들어 가격이 10% 내외로 인상됐는데도 수요가 꺾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관련 업체들의 실적도 상승세다. 위스키 브랜드 ‘발렌타인’과 ‘시바스 리갈’ 등을 보유한 페르노리카코리아는 2020회계연도(2020년 7월~2021년 6월) 매출이 1205억원으로 지난해보다 31.6% 늘었고, 영업이익은 269억원으로 66.9% 증가했다. 디아지오코리아의 2020회계연도(2020년 7월~2021년 6월) 매출은 1933억원으로 지난해보다 3.6% 줄었지만 영업이익은 370억원으로 85.0% 늘었다.
서울 송파구 잠실 '보틀벙커'를 방문한 소비자들이 샴페인 코너를 둘러보고 있다.
이마트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위스키 판매량의 46.1%를 20~30대가 샀다. 이전까지 가장 소비가 많았던 40~50대(43%)를 앞섰다. 지난 2년 새 20~30대 구매 비중이 39→46.1%로, 7.1%포인트 늘어난 사이 40~50대는 48→43%로, 5%포인트 줄었다. 로열 살루트 등을 판매하는 페르노리카코리아도 2019년 전체 소비자의 51%가 40대였지만, 지난해는 20~30대가 53%를 차지했다. 위스키를 마시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플렉스(과시형 소비)하려는 MZ세대의 성향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보다 위스키를 구매하기도 쉬워졌다. 대형마트나 편의점 등에서도 위스키를 판매하고 있어 손쉽게 살 수 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소주 한 병을 마시느니 위스키 한두 잔을 내 입맛에 맞게 ‘셀프 칵테일’로 만들어서 즐기겠다는 MZ세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주류 수입업체 트랜스베버리지에 따르면 지난해 1~10월 버번위스키 ‘와일드 터키’의 매출은 전년보다 359% 폭등한 것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이 위스키의 가정용 매출 증가율은 무려 1285%에 달했고, 스카치위스키 ‘글렌그란트’도 283% 증가폭을 보였다.
윌리엄그랜트앤선즈코리아의 싱글몰트 위스키 발베니는 서울 청담에 위치한 정식 카페에 ‘더 발베니 바’를 열었다.
이에 주요 유통업계는 위스키 오프라인 매장을 확대하고 있다. 롯데마트는 제타플렉스 와인 전문숍인 ‘보틀 벙커’에 위스키 전문 코너를 마련했고 롯데백화점은 아영FBC의 싱글몰트 숍을 입점시켰다. 롯데백화점은 높아지는 위스키 시장의 수요에 맞춰 지난해 12월 잠실점에 위스키 전문매장 ‘위스키 바’를 론칭했다. 지하1층 와인 매장 옆 영업면적 76㎡ 규모의 독립된 공간을 통해 최근 주류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다양한 위스키 상품을 판매한다.
체험을 중시하는 MZ세대의 성향을 공략한 체험 공간도 늘고 있다. 윌리엄그랜트앤선즈는 갤러리아 압구정점에 글렌피딕 체험관을 조성했다. 전문 바텐더가 제공하는 고급 싱글몰트 위스키를 맛볼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는 정식 카페인 ‘더 발베니 바’가 있다. 발베니 12년부터 40년까지 13가지 제품을 글라스나 테이스팅 메뉴로 맛볼 수 있다. 바텐더가 시즌마다 새롭게 선보이는 발베니 칵테일도 있다. 혼술족을 겨냥해 용량을 줄이기도 한다. 드링크인터내셔널은 패스포트 200㎖ 미니 제품을 만들었다. 디아지오코리아는 알코올 도수를 32.5도로 낮춘 위스키인 더블유19, 더블유 허니를 내놨다.
▶물류난에 가격 상승… ‘위스키테크’ 등장 국내에선 수요가 많지 않았던 ‘발베니’ ‘맥캘란’ 등 싱글몰트 위스키 일부는 품절되기도 한다. 블렌디드 위스키가 대중적 이미지라면 싱글몰트 위스키는 애호가가 즐기는 이미지가 부각되며 더욱 인기다. MZ세대에 싱글몰트 위스키 열풍이 불면서 맥캘란과 발베니 등 상대적으로 고가인 싱글몰트의 경우 품귀현상을 보이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나 유튜브 등 SNS에서는 대형마트나 주류 판매업체의 재고 현황을 공유하면서 원하는 싱글몰트를 사기 위한 정보 공유도 벌어지고 있다. 롯데마트에 따르면 지난해 싱글몰트 판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약 500% 증가했다. 이에 롯데마트의 전체 위스키 판매량 중 싱글몰트 판매 비중은 2020년 14%에서 2021년 22%로 증가했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조니워커, 발렌타인 등 블렌디드 위스키 역시 상승했지만 싱글몰트 매출 상승량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설명했다.
미국 서부 항만의 오미크론 변이 확산과 영국의 주유 대란 등 코로나19로 인한 물류 대란도 위스키 품귀를 부추기고 있다. 위스키 수요가 폭증했지만 위스키 공급은 기존의 80%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수급난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량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가격이 오르자 이른바 ‘술테크(술+재테크)’까지 등장했다. 특히 한정판 고가 주류는 일단 사두면 웃돈을 붙여서 팔 수 있다는 인식이 퍼졌다. 위스키업계에 따르면 국내에 들어온 40년산 이상 위스키는 매년 평균 15~20% 정도 가격이 오르고 있다. 위스키업계 관계자는 “위스키 마니아나 위스키 재테크를 하는 이들은 위스키 컬렉팅을 위해 직접 해외 경매에 참여하거나 스코틀랜드 등지의 증류소를 방문해 직매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일본 산토리는 지난해 1월 ‘야마자키 55년’ 100개를 한정 판매했다. 야마자키 55년은 1964년 이전에 증류해 55년간 숙성시킨 몰트를 사용했다. 가격은 2만500달러(약 3160만원). 이 위스키는 같은 해 8월 홍콩의 한 경매장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당시 79만5000달러(약 9억원)에 낙찰됐다. 특히 한 증류소에서 나온 싱글몰트 위스키는 그해 술을 넣고 길게는 64년까지 긴 시간 숙성시켜 만든 원액을 담아 만들기 때문에 막 찍어낼 수 없다. 그해 생산하지 않았을 경우 18년 후에는 18년산, 64년 후에는 64년산 싱글몰트 위스키를 생산할 수 없다. 공급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위스키 애호가들이 몰린 온라인 커뮤니티나 카페 등에서는 암암리에 직거래도 이뤄지는 분위기다. 주류 판매 면허가 없는 일반 소비자 간 거래는 현행법상 처벌 대상이지만, 구하기 힘든 제품의 경우 웃돈 거래도 이뤄지고 있다.
▶빈 병 값이 무려 190만원!… 공병 중고거래까지 이뤄져 한편 위스키 병으로 실내 인테리어를 하는 1인 가구가 증가하고 있어 당근마켓, 중고나라 등 중고거래 플랫폼에서는 빈 병을 거래하는 소비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아주 비싼 위스키를 구매하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대신 ‘위스키 공병 재테크’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확산 속 집 안 꾸미기가 인기를 끌면서, 이색적인 실내 장식을 찾는 사람들이 독특하게 디자인된 데다 소재도 다양한 빈 양주병을 찾는 경우가 부쩍 늘고 있는 게 배경이다. 현재 중고 시장에서 빈 양주병은 실제 양주 판매 가격에 비례해 매겨지는 경우가 많다. 또 정품 케이스가 있는지 여부, 청결 상태 등에 따라 적게는 3000원부터 비싸게는 6만9000원까지 다양하게 팔리고 있다. 가장 인기가 많은 맥캘란 한정판의 경우 공병 가격만 3만~5만원에 거래된다. 고가품도 있다. 2007년 출시한 ‘루이13세 블랙펄(당시 판매가 1500만원)’의 공병 가격은 무려 190만원이다. 해당 제품은 세계적으로 786병만 출시됐다. 그 밖에 ‘리차드 헤네시’ 공병은 지난해 3월 50만원대에서 올해 70만원대까지 올랐으며 ‘맥캘란 21년산’은 2019년 3만원에서 올해 10만원대까지 가격이 상승했다.
[김병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8호 (2022년 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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