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목 위의 전쟁 명품시계 vs 스마트워치
입력 : 2021.10.26 10:47:43
-
올해 국내 명품시계 시장은 그야말로 ‘호황’이다. 팬데믹으로 인한 경기 위축은 소비 양극화 앞에 기가 죽었다. 백화점 명품(하이엔드)시계 매장 앞에 줄을 선 오픈런은 더 이상 생경한 풍경이 아니다. 오죽하면 “롤렉스 매장에선 공기만 판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만큼 인기가 높다는 방증이다. 반면 수십만원대에 구입할 수 있는 스마트워치 시장도 성장세가 도드라진다. 지난 8월에 출시된 삼성전자의 ‘갤럭시워치4’는 한 달 만에 40만 대나 팔렸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수백에서 수천, 수억원에 이르는 명품시계 구매자들이 꼭 하나씩 갖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스마트워치”라며 “스위스로 대표되는 명품 손목시계 산업의 가장 큰 위협 요인은 여전히 스마트워치의 성장”이라고 전했다.
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 트리뷰트 투르비옹 듀오페이스, 로저드뷔 엑스칼리버 스파이더 피렐리, IWC 빅 파일럿 워치 퍼페추얼 캘린더, 롤렉스 오이스터 퍼페츄얼 레이디 데이트 저스트
스마트워치에 대한 반응은 미지근했지만 그렇다고 명품시계업계 전체가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이른바 ‘쿼츠파동(Quartz Crisis)’의 악몽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태엽을 감아 동력을 전달하는 기계식 시계 대신 작은 배터리를 사용한 쿼츠시계는 기계식보다 정확하고 얇고 가벼웠다.
1969년 일본의 세이코가 양산형 모델인 쿼츠 아스트론을 출시하자 전통적인 기계식 시계 제조사들은 이게 과연 팔리겠냐며 비웃었다. 당시 코웃음 치던 기업들은 1970년대 말 대거 파산하고 말았다.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며 쿼츠의 악몽이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몇몇 브랜드는 발 빠르게 차고 나갔다. 2015년 프레데릭 콘스탄트가 커넥티드워치를 출시했고. 태그호이어는 그해 바젤월드에서 구글과 협업해 스마트워치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2017년엔 LVMH그룹의 불가리가 디지털지갑을 탑재한 아고노 마그네슘 콘셉트를 발표한다.
불가리 볼트 앱을 사용해 은행계좌나 신용카드 등을 저장할 수 있고 집과 자동차의 경보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기능이 담겨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몽블랑의 커넥티드워치도 관심사 중 하나였다.
전 세계 시계 산업을 좌우하는 스위스 시계 시장의 현황을 들여다보면 코로나19로 인해 지난해 스위스 시계 산업 수출액은 전년 대비 –21.8%를 기록했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 때 기록한 –22.3%와 비슷한 수준이다. 주요 수출 대상국 중 중국을 제외한 미국, 홍콩, 일본, 영국 모두 –17.5%에서 –36.9%까지 큰 폭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올 상반기(106억프랑)부터 서서히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과 미국의 경기가 회복되며 기저효과를 누렸지만 세계 각국의 사회적 거리두기나 소비심리 위축이 아직은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위드 코로나 시대 이후 해외여행이 현재보다 자유로워진다면 시계를 비롯한 명품업계에 또 다른 성장 기회를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LF가 운영하는 명품시계 편집숍 ‘라움워치’에서 한 소비자가 매장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보석류(19.5%), 카지노용 오락기구(19.4%), 고급 시계(6.1%) 등 고가 제품의 개소세도 늘었다. 고급 가방과 시계의 경우 개별 물품당 200만원이 넘는 제품에 대해 제품 원가의 20%가 개소세로 부과된다. 여기에 추가로 부가세 10%와 개소세에 붙는 교육세 등을 고려하면 고급 가방 추산 판매액은 약 1741억원, 고급 시계 판매액은 5386억원으로 예상된다.
보통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에 이르는 명품시계 판매량이 늘어난 배경은 앞서 밝혔듯 보복소비와 MZ세대의 유입으로 요약된다. 우선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보복소비 수요가 평소 쉽게 살 수 없는 고가 상품으로 몰렸다. 결혼을 앞둔 이들은 결혼식이나 신혼여행이 여의치 않자 결혼예물로 눈을 돌렸다. 롤렉스의 오픈런이 이어지는 이유 중 하나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직영점이 단 한 곳도 없는 롤렉스의 경우 각 매장별로 재고관리를 하기 때문에 매장에 가더라도 원하는 모델을 구매하기가 쉽지 않다”며 “무엇보다 예년에 비해 사려는 사람이 확연히 늘어 공급물량이 모자란 상황”이라고 전했다. MZ세대가 새로운 소비자로 등장한 것도 반가운 상황이다. 이른바 플렉스(Flex) 문화가 확산하고 리셀(Resell) 시장에서 일부 브랜드의 중고 가격이 상승하며 재테크의 일환으로 주목받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삼성 갤럭시 Z 플립3 톰브라운 스페셜 에디션
더현대닷컴·현대H몰 등 현대백화점 온라인몰의 명품 매출은 올 8월까지 전년 동기 대비 91.2%, 신세계가 운영하는 SSG닷컴의 명품 매출도 올 8월까지 전년 동기 대비 20%나 성장했다.
SSG닷컴은 이탈리아 시계 브랜드 파네라이에 이어 하이엔드 명품 피아제를 입점시켰다. 롯데백화점은 지난 5월 롯데온 내 롯데백화점몰에 브라이틀링의 국내 최초 공식 온라인 브랜드관을 선보였다. 명품업계도 온라인 시장 활용에 적극적이다. 지난해 5월 까르띠에와 프라다가 국내 공식 온라인몰을 오픈했고, 구찌와 샤넬도 각각 네이버와 카카오톡 등 온라인 플랫폼에 입점했다. 명품시계 브랜드의 한 딜러는 “매장을 찾은 고객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스마트워치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업데이트를 거쳐야 하거나 새로운 버전이 등장해 이전 버전이 퇴물이 되기도 해 지속성이 없다고 말한다”며 “값이 비싸더라도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고 자식 세대에도 물려줄 수 있다는 데 매력을 느끼는 분이 꽤 된다”고 전했다.
서울시내 한 백화점 명품관의 롤렉스 시계 매장
미국의 시장조사업체 마켓데이터에 따르면 글로벌 스마트워치 시장은 지난해 약 5조4038억원(약 48억달러) 규모에서 2025년엔 약 14조6354억원(약 131억달러)으로 매년 18.3%가량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시장의 독보적인 강자는 애플이다. 올 2분기 950만 대를 공급했다. 전년 동기 대비 46% 증가한 수치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도 200만 대를 출하하며 점유율 11%로 2위에 올랐다. 성장률은 삼성전자가 54%로 가장 높았다.
국내 시장에선 온라인 채널을 중심으로 스마트워치의 판매량이 증가하고 있다. 이베이코리아에 따르면 2019년 스마트워치 판매량은 전년 대비 30% 증가했고, 지난해에는 271% 성장했다. 올 9월 롯데하이마트 스마트워치 제품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265%나 늘었다.
지난 8월부터 판매를 시작한 삼성전자의 갤럭시워치4는 한 달 만에 판매량이 40만 대를 넘어섰다. 최근엔 명품업계와 협업한 스마트워치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애플워치7 에르메스에디션
애플워치 에르메스 에디션은 애플워치7(40만원대)보다 가격대가 3배가량 높이 책정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스마트워치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에 가격대가 비슷한 중저가 손목시계들의 매출은 예년보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수입사 임원은 “최근 스마트워치의 경향은 에르메스나 톰브라운의 아우라에 명품이란 이미지까지 덧씌우고 있다”며 “스위스메이드라는 신뢰나 가치가 부족한 중저가 브랜드의 경우 이들과 가격도 비슷해 상대적으로 매출이 줄거나 답보 상태”라고 전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4호 (2021년 11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