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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50주년 맞은 김귀열 슈페리어 회장 | 토종 골프웨어에서 글로벌 패션그룹으로
입력 : 2017.01.10 1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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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동국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과
2001년~ 현재 슈페리어 회장
2007년~ (주)와이드산업개발 회장
2009년~ (주)에셋디자인투자자문 회장
2013년~ 슈페리어갤러리 회장
2014년~ 세계골프역사박물관 회장
2014년~ 슈페리어 재단 이사장
“단 한 번도 빚내거나 적자 낸 적 없이 직원들 월급 거르지 않고 잘 꾸려왔지요….”
김귀열 슈페리어 회장(75)이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며 한 말이다. 슈페리어는 1967년 김 회장이 25세에 설립한 회사다. 골프장이 몇 곳 없던 시절 이름처럼 ‘SUPERIOR(뛰어난)’한 골프웨어로 시장을 선점한 후 50년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토종 골프웨어로 시작해 현재는 남성복과 명품, 잡화, 생활용품을 아우르는 연매출 3000억원대의 탄탄한 중견 패션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농사꾼의 아들, 골프웨어로 성공신화
“농사짓는 집안의 7남매 중 셋째였지요. 온 가족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해도 늘 손해고 남는 게 없었습니다. 이렇게 고생할 바에야 서울로 올라가 장사하는 게 낫겠다 싶었죠.”
20대 초반 무조건 상경한 젊은 김귀열은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아서 열심히 했다. 그래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던 그는 우연히 찾아간 교회에서 인생의 멘토를 만난다. 고 한경직(1902~2000년, 전 장로회신학대학교 이사장) 목사다. 김 회장은 “제 인생 좌우명이 ‘사람으로 태어나 얼마나 많은 것을 생산했으며 남을 위해 얼마나 봉사했는가’입니다. 한 목사님에게 배운 거죠. 그때부터 누구보다 노력해서 많이 이루고 많이 베풀자고 결심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인생의 목표를 찾은 김귀열은 25세에 35만원으로 미싱 몇 대를 사서 동원섬유를 차렸다. 움직일 동(動)에 으뜸 원(元), ‘끊임없이 움직여야 선두로 올라설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동원섬유는 슈페리어의 전신이다. 니트 의류를 만들어 납품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그러다가 ‘보라매’라는 브랜드의 셔츠를 내놓았는데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히트를 쳤다. 공장 문을 열면 지방 소매상들이 새벽부터 물건을 달라고 달려들어 애를 먹곤 했다. 신소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당시 국내 최초로 경방에서 내놓은 ‘실켓면(실크 느낌의 면소재)’으로 여성의류를 만들어 연타석 안타를 쳤다. 실켓 옷은 다른 소재보다 부드럽고 착용감이 좋아 히트상품이 되었으며 이후 경쟁브랜드 모두 실켓 티셔츠를 생산할 정도였다. 골프웨어로 눈을 돌린 건 1970년대 들어서다. 그는 “새로운 소재나 디자인 그리고 새로운 생산설비를 들여오기 위해 해외 출장을 많이 다녔습니다. 1970년대 일본에 가 보니 골프가 유행하고 있었죠. 당시 우리나라에는 골프장이 몇 곳 안 될 정도로 불모지였지만 대중화되리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라고 한다. 그는 1979년 국내 최초의 골프웨어 브랜드인 ‘슈페리어’를 출시했다. 해외출장을 옆집 가듯이 하며 발품을 판 노력은 소비자들이 먼저 알아봤다. 소재와 디자인에서 어느 해외 제품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 속에 ‘슈페리어’ 제품이 큰 인기를 구가한 것이다. 당시로는 이례적이었던 영문 브랜드명과 국내 최초로 외국인 모델을 기용한 광고마케팅도 슈페리어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데 한몫했다. ‘슈페리어’의 성장과 함께 사명도 슈페리어로 바꿨다.
지난 50년간 슈페리어는 무차입 경영을 해왔다. 단 한 차례도 부채를 쓰지 않고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았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넌다’는 김귀열 회장의 철저한 리스크 관리가 있어 가능했다. 이에 슈페리어는 시류에 민감한 패션기업들이 쓰나미처럼 사라져간 IMF 구제금융 시절과 2008년 리먼브라더스발 금융위기에도 버텨낼 수 있었다. 김 회장은 “은행 자금을 빌렸더라면 회사는 더 크게 키울 수 있었겠지만 무리한 확장보다는 내실 있는 경영을 하고자 했습니다. 부와 명예를 축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비자에게 만족과 편의를 제공하고, 사회와 함께 공존·공영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전한다. 실제 슈페리어는 매년 임직원들이 함께하는 소아암어린이돕기 등 다양한 사회 환원 및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김 회장은 안정적인 2세 체제를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우애 좋기로 소문난 그는 형제들과 함께 회사를 일구어왔지만 나중에라도 혹시 있을지 모를 형제 또는 친인척간 경영권이나 재산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사업과 지분을 깨끗이 나누고 정리했다. 외아들 김대환 대표는 회사를 맡기기 전 바닥부터 회사 일을 배우게 했고, 해외 출장을 다니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줬다. 김 대표는 이에 대해 “회장님께서는 말씀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시죠. 출장을 가면 구두 밑창이 다 닳도록 열심히 일하고 다니시는데, 어느 순간 제가 그렇게 하고 있더라고요”라고 말했다. 현재 슈페리어는 50년 역사를 써온 김 회장의 뒤를 이어 앞으로의 100년 역사를 아들 김 대표가 그려가고 있다. 창업자 김 회장이 골프웨어로 다진 기반을 2세인 김 대표는 세계시장에서 활약하는 글로벌 패션기업으로 도약시킨다는 비전이다. 이에 김 대표는 슈페리어를 기존 골프웨어에서 남성복과 온라인, 패션잡화, 라이센스, 리빙 등 다양한 산업플랫폼을 형성한 회사로 체질을 바꿨다. 김 회장은 아들에 대해 넌지시 “잘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한마디했다.
김귀열 회장은 국내 골프 활성화에 공로가 크다. 세계적 골프선수로 성장한 최경주와의 인연은 스포츠업계 미담으로 유명하다. 그는 무명이던 최 선수의 역량을 미리 알아보고 후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인연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슈페리어 오픈 골프대회를 5년간 개최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작은 기업이 큰 비용을 들여 골프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속적으로 코리안 투어의 공식 협찬사로 후원을 이어가고, 팀 슈페리어를 창단하여 여러 선수들을 후원하고 있다. 현재도 최경주 선수를 비롯해 LPGA의 양희영, 문경준, 이동환, 서연정 선수 등을 후원하고 있다.
김 회장은 2014년 국내 최초로 세계골프역사박물관을 서울 삼성동 슈페리어 사옥 내 개관했다. 골프의 전설 잭 니클라우스가 기증한 친필이 새겨진 클럽, 박인비 선수가 내놓은 2008년 US여자오픈 우승 퍼트, 최경주 선수의 미국 프로골프(PGA) 우승 트로피까지 볼거리가 가득하다. 18세기 유럽에서 사용한 골프채들은 국내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역사 자료다. 15년여 전 골프박물관을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은 이후 꾸준히 사 모은 유물이 1200여 점에 달한다. 그는 “우리 선수들의 해외 골프투어 진출에 따른 경제효과가 중형차 7700대를 수출하는 것과 맞먹는다. 골프 하나만 잘 쳐도 국익에 크게 기여하는 세상. 박물관 개관과 더불어 그런 사실도 널리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요새 김 회장은 평생 경영이념 중 하나로 삼았던 ‘공존공영’(함께 살며 함께 번영함)을 실천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2014년 비영리 공익재단으로 설립한 슈페리어 재단을 통해 다양한 봉사와 기부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김 회장이 평생의 정신적인 멘토로 삼은 한경직 목사의 이타적이고 청빈한 삶을 기리기 위해 영락교회와 함께 ‘한경직목사상’을 제정했다.
[김지미 기자 사진 류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76호 (2017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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