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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기자의 패션人사이트] 박항치 패션디자이너 | 문화예술은 제 디자인의 원천입니다
입력 : 2016.06.03 17: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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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지오 아르마니, 랄프 로렌, 칼 라거펠트 등은 패션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다. 국내에도 레전드급 디자이너들이 있다. 박항치 디자이너가 그 장본인이다. 1973년 명동에 ‘동쪽에서 온 옥 보석’이라는 뜻의 ‘옥동(玉東)’ 의상실을 낸 이후 무려 43년간 한길을 걷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패션 컬렉션의 효시면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S.F.A.A 컬렉션의 창단멤버로 지난해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년 두 차례씩 패션쇼를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광주유니버시아드게임 의상을 제작했고, 화제의 연극 ‘마스터클래스’ 등 다수의 연극 의상을 제작하면서 여전히 현업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반세기 가까이 국내 패션계를 이끌어온 박항치 디자이너를 만나 과거를 되짚어보고 현재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서울 강남 청담사거리에서 천주교 성당쪽으로 가다 보면 유럽의 고풍스러운 건물을 닮은 ‘박항치’ 부티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1층 매장에는 디자이너가 만든 하이-패션을 선호하는 세련된 중년 여성을 위한 ‘박항치’ 브랜드가 있고, 2층에는 ‘박항치’ 여성복의 남자 버전인 ‘사나이’ 매장이 들어서 있다. 2층 안쪽에 마련된 사무실 공간은 디자이너의 예술적 감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책상에 놓인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책이 눈에 들어왔다. 박항치 디자이너는 “해외에서 큰 상을 탔다는 뉴스를 듣고 바로 온라인 주문했습니다. 궁금한 건 잠시도 못 참지요. 책과 음악, 영화, 연극 등 문화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놓치지 않고 보고 찾아다닙니다. 얼마 전에는 영화 ‘헤어화’를 보고 왔고 ‘아가씨’를 보기 전 시놉시스를 읽었습니다”고 말한다.
박항치 디자이너에게 문화예술은 영감을 얻는 가장 중요한 보고이자 원천이다. 특히, 영화와 연극은 고향과도 같다. 그는 “사실 제가 옷을 만들기 전 영화와 연극 연출을 했습니다. 영화 ‘동백아가씨’ 조연출로 시작해, ‘자유극단’에서 50편 가까운 연극을 만들었지요. 지금 무대 의상을 하는 것도 그 영향이 크다고 봐야죠”라고 말했다.
독신으로 살아온 박항치 디자이너에게 가족은 영화, 연극인들이다. 손숙, 윤석화, 김수미, 정혜선, 최불암, 김용건, 신성일, 엄앵란, 강부자, 이미숙 등 내로라는 대스타들과 아직도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50~60년대 영화, 연극 연출을 하며 스타들과 어울리던 그는 어떻게 디자이너가 됐을까.
“당시에는 번화가라고 하면 명동밖에 없었습니다. 멋 부리고 예술한다는 사람들은 거기로 전부 모였죠. 제가 옷을 무척 잘 입고 다녀 연예인들보다 더 눈에 띄었지요.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신성일 형이 제가 입고 다니던 옷을 자주 빌려가곤 했습니다” 연예인보다 더 옷 잘 입는 그에게 “의상을 해보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제로, 워낙 옷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 연예인들 옷을 코디네이트 해주거나 조언해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박항치 디자이너는 부잣집 아들로 자랐다. 외가가 경상도에서 내로라하는 부잣집이라 어릴 적을 회상하면 집이 너무 크고 방들이 많아 길을 잃고 헤매던 기억이 날 정도다.
그는 “저희는 패션이 없던 세대에 살았습니다. 군복을 물들여 입고 군화를 신고들 다녔죠. 학생들은 겨울에도 무명으로 된 교복을 입었는데, 저는 모직물로 만든 코트까지 입고 다녔습니다. 튀고 고급스러운 옷차림 때문에 전교에서 저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고 회상한다.
1973년 명동에 ‘옥동’이라는 이름의 의상실을 오픈했다. 당시 ‘프랑소와즈’ ‘앙드레김’ ‘트로아조’ 등 외국이름을 쓰는 게 유행이었지만, 우리말을 쓰고 싶어 ‘동쪽에서 온 동양의 보석 옥’이라는 뜻으로 ‘옥동’이라고 이름 지었다. 첫 출발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의상실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너무 손님이 많이 와서 제발 그만왔으면… 할 정도였습니다”
명동 바닥에 ‘옥동 박항치가 옷 잘 만들고 잘 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진태옥, 이신우, 김동순, 설윤형 등 그 당시 같이 의상을 만들던 디자이너들이 찾아들었다. 그들과 함께 만든 단체가 ‘S.F.A.A’(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다. S.F.A.A는 우리나라에 컬렉션 개념을 처음 도입하고 최초의 컬렉션을 개최했던 단체다. 일회성 패션쇼와 달리 컬렉션은 매년 두 차례 정기적으로 열면서 6개월 앞선 트렌드를 전해주는 게 특징이다.
박항치 디자이너는 “진태옥, 설윤형, 김동순 등 당시에 활동하던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본 오사카 패션쇼에 초청되어 갔는데, 컬렉션을 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패션업계가 발전하려면 컬렉션 형태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벤치마킹을 하게 된 겁니다”고 당시 배경을 설명했다.
S.F.A.A세대가 20여 년전 들여왔던 컬렉션 방식이 최근 들어 붕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온라인을 통해 컬렉션이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패스트 패션의 등장으로 봄여름과 가을겨울, 두계절로 나눠 돌아가던 패션사이클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톰포드는 패션컬렉션 불참을 선언했고 버버리는 컬렉션 실시간 중계를 하고 있다.
박항치 디자이너는 이에 대해 “저는 컬렉션의 위기를 미리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유행이 빠르게 바뀌고 있는 때에 6개월 후 의상을 만든다는 게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컬렉션을 도입할 때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또 다른 방식의 시스템을 찾아야할 때입니다”고 말한다.
하이-패션을 주도해온 그에게 앞으로 오트퀴트르(고급맞춤복) 미래에 대해 물었다. 그는 “패션이 앞으로 너무 힘들어요. 옷이 너무 흔해졌고 트렌드가 무너져버렸습니다. 미국 사람들처럼 평소에는 운동복처럼 편하고 간편한 옷을 입다가 특별한 일이 있는 날에는 파티의상 등을 빌려 입는 식으로 갈 것 같습니다. 이제 옷보다도 음식이나 인테리어 등 주거 공간 그리고 취미와 여행 등 전반적인 라이프 스타일에 관심을 갖는 시대가 왔습니다”고 전한다. 그는 앞으로 디자이너가 만드는 오트퀴트르는 독특한 취향과 개성이 드러나는 예술작품과도 같은 옷이 각광을 받거나 아니면 동시대의 젊은 감성을 고스란히 반영한 스트리트 패션으로 양분되어 각광을 받을 것이라고 전했다.
패션 대가에게 옷 잘 입는 노하우를 마지막에 물어봤다. 그는 “결혼식에 갈때 트레이닝 차림은 절대 금물이며 그건 예의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평소 입어보지 않았던 옷들도 과감하게 시도해서 젊고 세련된 감각을 지니도록 노력하고 마지막으로는 자기 옷은 절대로 스스로 골라야 합니다. 성인 남자들 중에 자기 옷을 아내가 골라준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창피한 일이죠. 자기 취향은 자기가 가장 잘 알고 그래야 멋을 낼 수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He is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 졸업
△1997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수료
△1973년 명동에 ‘옥동’ 오픈
△1988년 서울-동경 모드쇼
△1989년 오사카 컬렉션
△1990~2015년 S.F.A.A 컬렉션(총 49회 연속 참가)
△1992년 S.F.A.A(서울패션아티스트협회) 2대 회장
△2005년~현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 ‘박항치드라마’ 연극의상전시회
△2010년 한국패션브랜드 대상 공로상
△2013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의상 제작
△2014년 연극 ‘나는 너다’ 의상 제작
△2015년 광주 유니버시아드게임 의상 제작
헤라 서울패션위크 명예디자이너상 수상
연극 ‘마스터클래스’ 의상 제작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68호 (2016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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