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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기자의 패션人사이트] 국내 첫 남성복 디자이너 컬렉션…최초를 달고 살아온 패션 프런티어 장광효
입력 : 2016.01.26 18: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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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봄여름 의상
“한마디로 대박이었죠. 압구정 매장 한 곳에서 연예인 등 하루에 100벌 정도를 맞추러 왔어요. 현금으로 물건을 살 때라 밤마다 돈을 다 못 세고 잘 정도 였습니다.” 장광효 카루소 대표의 말이다. 그가 본인 브랜드를 낸 지 불과 일 년 만에 스타 디자이너로 뜬 데는 연예인 옷을 유행시킨 게 한몫했다. 소방차가 입고 나와 공전의 히트를 친 일명 ‘승마바지’ 패션은 그의 작품이다. 1990년대 문화대통령으로 불리던 서태지와 아이들이 입었던 유니섹스룩도 마찬가지다. 압구정 카루소 매장에는 사람들이 옷을 맞추기 위해 줄서는 진풍경이 벌어졌고 매장 하나만으로는 도저히 넘치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백화점에 진출했다. 카루소 론칭 3년 만에 백화점 매장수가 30개로 늘었다.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까. 장 대표는 “기존에 봤던 옷들과는 달랐다고들 해요. 파격적이고 아방가르드한 느낌이 난다고 할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제 옷이 시대요구에 부합한 타이밍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고 겸손해했다.
장 대표는 원래 옷을 좋아했다. 어렸을때부터 시장을 돌며 직접 고른 옷을 사서 입고 다녔다. 대학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당시만 해도 남자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국민대 의상학과가 남녀공학이 되자마자 복수전공으로 원하던 패션 공부를 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냐 대학원 진학이냐를 두고 고민하던 중에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이 방송사 아나운서 시험을 본다기에 따라가 무대디자이너에 지원해 둘 다 합격이 됐다. 그때 아나운서가 된 친구가 지금은 방송사 대표가 된 언론인 손석희 씨다. 주변에서는 좋은 방송사에 취직됐다고 축하해줬지만 정작 장 대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은 무대디자인이 아닌 옷을 만드는 패션디자인이었기 때문. 결국 입사를 포기하고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해 직물디자인을 전공했다. 장 대표는 “저의 눈높이가 항상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게 문제였다면 문제였어요. 패션공부를 할수록 유행을 주도하는 파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맴돌았습니다. 파리로 날아가 퐁텐블로 예술학교에서 디자인을 더 파고들었습니다”고 말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난 그는 삼성의 남성복 캠브리지에서 디자이너로 패션계에 입문하게 됐다.
기성복 디자이너를 그만두고 ‘카루소’를 론칭한 때가 1987년이다. 카루소라는 이름은 성악을 전공한 지금의 아내가 이탈리아 유명 성악가인 엔리코 카루소 이름에서 따서 지어준 것. 카루소가 론칭과 함께 대박이 나서 브랜드가 정상 궤도에 오르자 그의 마음속에는 또다시 도전 DNA가 살아나고 있었다.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세계적인 파리컬렉션 진출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 1994년 국내 남성복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파리컬렉션 무대에 섰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동양에서 온 장 폴 골티에(전설의 프랑스 유명디자이너)”라며 르피가로 등 현지 언론들의 극찬을 받았다. 이후 파리컬렉션 무대에 6차례 오르면서 그는 전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정상의 반열에 올랐다.
장 대표는 “이대로 10년만 하면 세계 패션계를 휘어잡겠구나 생각했죠”라고 회상한다. 하지만 그의 비상은 계속 될 수 없었다. 파리컬렉션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회사에 가보니 직원들이 모두 관광버스를 대절해 설악산으로 놀러가고 없었다. 깜짝 놀라 정황을 파악해보니 사정은 이랬다. 그가 파리 진출로 공백이 생긴 동안 회사 일을 맡겨놓은 임원이 돈을 빼돌리기 위해 직원들 모두 여행을 보내는 등 회계장부를 어지럽혀 놓은 것. 그동안 여기저기 빌린 채무도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든 그는 직원들게게 일괄 사표를 받고 그날로 38개에 달하던 백화점 매장을 4곳만 남기고 일제히 정리했다. 쓴 적도 없는 빚도 그동안 번 돈으로 산 건물을 팔아서 모두 정리했다. 그랬더니 ‘카루소가 부도났다’, ‘장광효가 망했다’고 소문이 마구 나돌았다. 부도가 난 것도 사업을 접은 것도 아니었지만 소수의 직원들과 함께 1년간 조용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CJ홈쇼핑으로부터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홈쇼핑에서 패션상품을, 더군다나 하이패션 디자이너 옷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때였다. 최초의 남성복 디자이너로 홈쇼핑에 들어간 그는 3년 만에 단독으로 매출 1500억원을 올렸다. 사기로 인한 피해를 회복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돈을 원 없이 벌어보고 사기를 당하고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배운 게 있습니다. 사람은 절대 교만해서는 안 되고, 돈을 벌기보다는 그릇이 큰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점이죠”라고 말했다.
▶패션박물관 건립과 중국 진출 추진
장광효 대표는 1992년부터 매년 서울컬렉션에 두 차례씩 참가하고 있다. 파리컬렉션에 진출한 몇 년을 제외하곤 컬렉션을 통해 소비자와 만나는 일을 게을리 해본 적이 없다. 지난번 여름에 내리는 비인 ‘모우(暮雨)’를 주제로 한 의상을 선보였고, 다가오는 3월 컬렉션에선 ‘옥스(OX)’를 주제로 스페인 느낌이 물씬 나는 의상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는 “예전에는 컬렉션을 앞두고 여행, 영화, 책 등에서 디자인 영감을 찾았으나, 요즘에는 오히려 영감이 스스로 찾아와 밖으로 꺼내달라고 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요즘 그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패션박물관 건립과 중국시장 진출, 두 가지다. 장 대표는 “한국 디자이너 의상을 한데 모은 패션박물관을 건립해 추후 나라에 기증하기 위해 장소를 물색 중”이라며 또한 “한국 시장은 이미 디자이너 포화상태라 인구가 많은 중국에 진출해 한국 디자이너가 만드는 유니클로와 같은 브랜드를 선보일 것”이라고 계획을 전했다.
대한민국 정상의 남성복 디자이너 장광효 대표에게 옷 잘 입는 남성이 되는 법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옷은 마술이 아닙니다. 좋은 옷, 비싼 옷을 입었다고 갑자기 멋이 생겨나는 건 아니죠. 몸을 먼저 관리하는 게 첫 번째입니다”고 답했다. 옷을 잘 입기 위해서는 다이어트로 살을 빼고 적절한 운동으로 근육도 만들고, 발걸음과 체형을 바르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몸을 만든 다음에는 옷을 많이 입어보고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게 장 대표의 조언이다.
그는 “옷을 못 입는 사람은 옷이 주인이고 옷에 치이곤 합니다. 주인 노릇을 하려면 이것저것 입어보고 옷을 제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값싼 시장 옷을 입어도 빛이 나는데 바로 그 차이지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멋을 안 부린 듯 멋있는 경지에 오르게 되지요”라고 전했다. 장광효 대표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선망하는 롤모델이다. 그에게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장 대표는 “제가 활동할 때만 해도 누구나 정서적으로 부족하고 가난한 시절이었죠. 하지만 요즘은 시각적으로 빈부차가 너무 많이 납니다. 상대적 빈곤감이죠. 현재가 어렵다고 좌절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하면서 원하는 방향으로 한 발짝씩 다가가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장광효 △1956년생 △국민대 조형대학 산업미술과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직물전공) △파리 FOUNTAIN BLUE 예술학교 △ 삼성 캠브리지, 논노의 수석디자이너 역임 △1987년 ‘카루소’ 설립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 국내 첫 남성복컬렉션 개최 △1993년 파리 의상조합 정회원 가입 △1994년 파리 프레타포르테 남성복컬렉션(6회 참가) △1985~ 2002년까지 국민대·한성대·경희대 겸임교수 △SK텔레콤·신세계 이마트·외환은행·대통령 전용기 유니폼 디자인 △1992년~현재 서울컬렉션 참가 △현재 카루소 대표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64호(2016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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