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축구의 새 전설 박지성 선수 MBN FORUM 2015 | 위기 때 기회를 기다릴 줄 알았기에 성공했죠
입력 : 2015.03.06 16:11:52
-
국가대표로서의 활약도 눈부시다. 2000년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포르투갈 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는 등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국가대표 주장으로 원정 최초 16강 진출을 이루어냈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태어날 때부터 축구 천재였을까? 아니다. 사실 정반대에 가까웠다. 초등학교부터 축구를 시작해 6학년 때는 주장으로 전국대회에서 준우승을 하기도 했지만, 항상 작은 키가 발목을 잡았다. 고2가 돼서야 겨우 170cm가 되었지만 축구선수로는 작은 몸집이었다. 게다가 그는 그라운드를 수없이 누벼야 하는 축구선수에게 치명적인 약점인 평발이었다. 그래서 박지성은 대학을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에게 대학 입학이 어려웠던 건 큰 충격이었다.
“저 정도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잘하는 축구선수였고 그럼에도 대학이 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받았을 때, 왜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투지를 불태웠다.
“내가 그걸 뛰어넘으려면 더 나은 결과를 보여줘야 했기에 더 노력하게 만든 계기가 됐죠. 결과적으로는 그때 일이 저로 하여금 더 독기를 품고 축구를 열심히 하게 만들었습니다.”
박지성은 가까스로 명지대 축구부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그는 더욱 축구에 매진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연습에 몰두했고, 고강도 훈련도 군말 없이 소화했다. 역시 두드리는 자에게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던가. 박지성은 우연히 올림픽 대표팀과의 경기에 출전해 허정무 감독의 눈에 띄게 된다. 그러고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축구 대표로 뽑히는 행운을 거머쥐게 된다. 그렇다면 신체적 악조건 속에도 박지성을 끊임없이 뛰게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건 일단 하고 싶어 했던 일을 했던 것이고, 또 꿈이었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면 노력을 했던 것 같습니다.”
간단하지만 간단치 않은 말이다. 그는 누구보다 축구를 사랑했고, 그라운드를 누비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무대는 한국이 아닌 세계가 주목하는 프리미어 리그였다. 그런 드높은 목표와 이상이 있었고, 그는 뛰고 또 뛰었다. 그래서 축구평론가 서형욱이 말한 것처럼 아마 박지성의 운동화에 페인트를 칠했다면 전체 그라운드를 다 색칠했을 정도로 그라운드를 뛰었다. 그래서 박지성을 칭하는 수식어 ‘그라운드의 산소탱크’, ‘두 개의 심장’이 탄생할 수 있었다.
물론 박지성이 매번 성공가도를 달린 건 아니었다. 2003년 PSV 아인트호벤 진출 당시 그에게는 악몽 같은 시절도 있었다.
“당시 부상도 있었고 수술도 했습니다. 유럽에 적응하느라 기량을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팬들에게 야유까지 받자 축구를 하면서 처음으로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경기 중에 나한테 패스를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수로서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슬럼프 때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 차근차근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내가 꿈꾸던 곳에 왔는데 뭐하고 있는 거지. 자신감을 찾아야 해.”
그러면서 하나씩 자신이 잘하는 것부터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라운드에서 무얼 보여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그걸 경기장에서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박지성은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가 경기장에 있을 때 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결국 기회가 왔을 때 그걸 보여줄 수 있는 준비를 했는지 못했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박지성은 때를 기다렸다.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자신이 준비를 잘했다면 그 기회를 기다리는 게 가장 중요하며, 기다리면서 정신적인 컨트롤을 하지 못 하면 기회가 왔을 때 보여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하나씩 하나씩 정신적 육체적 준비를 거듭했다. 결국 그의 잠재 능력이 터지면서 아인트호벤에서는 그를 응원하는 거대한 함성 ‘위쑹 빠르크’가 울려 퍼졌고, 맨유에서의 활약을 기반으로 비유럽인 최초로 맨유 앰버서더로 선정되었다.
그렇다면 박지성이 생각하는 성공의 방정식은 무엇일까? 사실 그는 한창 유럽무대를 누빌 당시 다른 팀으로 이적하는 조건으로 백지수표를 제안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축구였고 팀이었다. 축구로 성공을 하면 부가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프로가 되어서도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어제보다 나은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일을 사랑하고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가 어렸을 때부터 열렬히 사랑했던 축구를 그리고 세계적인 무대에서 뛰고 싶다는 그 열망 하나만을 바라보고 왔기에 그는 자신이 원하는 팀에서 뛰었고 성공과 부를 모두 누릴 수 있었다.
[최인제 MBN 경제부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4호(2015년 03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