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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문열의 현대사 인식 | “한국의 현대는 1985년에 시작됐다”
입력 : 2014.12.05 16: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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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왜 ‘새로운 현대’라는 시점을 생각해야 하는지부터 이야기했다. 이번에 출간한 대하소설 <변경>의 개정판 서문에 그는 ‘80년대 없는 오늘을 상상할 수 없듯이 60년대 없는 80년대는 허구일 뿐이다. 나는 처음 80년대의 뿌리를 더듬어보고 싶어 60년대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이제 80년대를 얘기하려고 보니 절판시킨 <변경>의 60년대를 살려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썼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그와 갈등을 빚는 사람들이나 그가 어떤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새겨봐야 하는 대목이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태 전에 태어난 작가는 이제 서서히 지나간 세월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두툼한 알이 박힌 안경을 꺼냈다.
그리곤 “옛날 같지 못해서 내가 할 말을 다 기억하지 못하고 내가 할 말을 메모해 와야 하고 그 메모를 보려면 안경을 꺼내야 한다. 서로 딱하게 여기자”고 했다.
작가는 “얼른 듣기에는 애매한 현대는 <변경> 이후의 세계라는 내 나름의 해제와 연관이 됐다”고 했다. “<변경>이란 작품을 쓸 때의 현대와 지금의 현대는 달라졌다. 그걸 얘기해보고 싶다. 현대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현대다. 그러나 1980년대 태어난 사람들의 현대와 1901년에 태어난 사람의 현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의 현대와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시대인식이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갖게 하고 그로 인해 갈등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폴 존슨의 현대는 1919년부터 그는 영국의 작가이자 기자이며 역사가 폴 존슨(Paul Johnson)의 ‘현대론’부터 풀어나갔다.
“폴 존슨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매우 보수적으로 여겨지는 사람인데, 현대(Modern Times)의 시작을 날짜를 딱 박아서 1919년 5월 19일 현대가 시작되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과학적으로 증명된 날이라고 한다. … 얼른 생각하면 상대성 원리를 거론했으니 이 사람은 과학적으로 시대를 구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시대를 구분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 그 후 상대성이란 말이 통속적으로 쓰이고 과학을 넘어 인문학으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덕적 상대주의란 말이 생겨났다. 선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통하는 절대적인 게 아니고 누구의 진리, 누구의 선이라고 했다. 도덕이 상대성을 갖게 되는 시기를 폴 존손은 현대라고 봤다.”
그러면서 당시 세계는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로이트의 심리학 이론이 세상을 휩쓸고 다윈의 진화설이 사회적 진화론으로 둔갑해 우리 사회에 특별한 인식을 주었다. 말하자면 적자생존 같은, 투쟁과 경쟁 같은 것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는 도덕적 상대주의로 각 나라들이 갖고 있는 진리라는 게 서로 충돌하면서 세계대전이 일어나 고통스런 20세기를 겪었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가 시작된 그 사람이 살았던 시기를 현대의 시작으로 본 것 같다는 것. 그게 20세기 초라서 존슨은 현대와 20세기를 혼동해 썼다.
“그러고도 100년이 지났다. 이제 21세기로 왔는데 그가 말한 현대가 우리의 현대와 같을 수는 없다. 지금을 혼란스럽고 서로 충돌한 과정의 연장이라고 볼 것이냐, 아니면 우리의 현대라고 볼 것이냐.”
“제국주의 이론 이후의 종속이론은 세상을 핵심과 주변으로 나눠서 본다. 보통 변경이라면 주변이라고 해서 어떤 땅의 변두리로 이해되기 쉽다. 그런데 여기서 ‘변경’은 주변이 아니라 ‘경계’란 뜻이 강하다. 여기에 어떤 세력이 와 있고 그 세력의 끝이 와 있는데 아무것도 없는 변두리가 아니라 그 건너편엔 또 다른 세력의 끝이 와 있어서 두 강력한 세력이 부딪치는 것을 변경이라고 했다. 두 세력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제국, 제국주의 세력으로 규정한다.”
그는 한반도는 1945년부터 두 제국 중 하나인 소비에트가 망할 때까지 5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전형적인 변경이었다고 했다. 다른 나라는 아메리카 제국의 변두리거나 소비에트 제국의 변두리였는데 우리만 유일하게 그것도 우리 땅에서 38선 이북엔 소비에트 제국의 변경이 와 있었고 남쪽엔 아메리카 제국의 변경이 와 있었다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것조차 이 변경이라는 블랙홀에 빠지면 왜곡되고 지워지거나 사라지고는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변경이라는 틀로 만들었다고 했다.
“내가 쓴 소설 <변경>의 해제로서 말할 때 소설 제목 <변경>은 사실은 ‘두 제국의 변경’이란 말을 줄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한반도가 50년 동안 몸으로 겪어낸 상황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1990년대 초 한 제국이 몰락했지만 그 몰락이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한 제국이 몰락하면 하나의 관리 가능한 제국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우리가 50년 동안 겪어온 두 제국의 연장 또는 대체인지는 알 수 없다. 또 그것이 새로운 형태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맞게 된 새로운 세계, 아마도 사라진 한 제국의 몰락과 관계가 있지 않나 해서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그는 여기서 ‘제국’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국어사전적 제국으로 이해해도 좋다고 했다. 침략주의의 한 형태로 정교하게 발전한 제국주의나 레닌의 제국주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두 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 땅에서 대립해 두 제국의 지배를 한꺼번에 받게 된 상황을 변경의 배경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이데올로기의 쇼윈도였던 한국 “독일이 분단됐다지만 우리의 분단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땅도 같은 크기로 갈라졌고 두 제국의 이념 선전장이 됐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이데올로기의 쇼윈도가 됐다. 이게 세계의 주목을 받는 선전장이 되면서 우리의 블랙홀로 작용했다. 두 제국의 변경이라는 특별한 사정이 우리 땅을 외골수로 만들었다.”
그는 이 특수한 사정이 우리 현대사에 우리에게만 있는 ‘변경의 산술’을 낳았다고 본다.
“이 변경의 산술은 제로섬 게임을 두 배로 강화한 것이다. 하나를 빼앗아 온다는 것은 단순히 나 하나 가지고 저쪽은 하나를 잃은 게 아니라 하나를 가져와서 하나를 보태니 나는 두 개를 갖고 저쪽은 두 개를 잃은 것 같은 이상한 심리적 마술 같은 셈이 나와 이것이 여러 요소로 작용했다.”
그 이상한 산술이 우리를 변경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제국에서 벗어나서 다른 제국으로 간다고 할 때 두 개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것을 시도하는 세력은 두 지역 모두로부터 가장 엄중한 단속을 받고 가장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제3세계가 유행할 때 그게 “우리의 낙일 것 같고 희망일 것 같아” 그걸 지향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것도 아니었다고 했다.
“제3세계 활동하는 사람들은 반둥회의를 중심으로 활동한다고 해서 ‘반둥의 용들’이라고도 했는데 세월이 지난 뒤 보니 반둥의 용들이 아니었다. 폴 존슨 같은 사람은 대놓고 ‘반둥의 건달들’이라고 한다. A에도 B에도 속하지 않는 게 아니라 중간에서 사기를 쳤다.”
그 마지막이 리비아의 카다피 원수 같은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겉으로는 미국에서 독립한다고 했지만 뒤로는 소련한테 붙었다가 튀어나오고 했다는 것. 그러나 제3의 길로 살아남기는 어렵다고 했다. 한국이 끝까지 두 제국의 변경에서 전시장 기능을 했지만 남쪽은 아메리카 제국의 변경으로서 쇼윈도 역할을 했기에 크게 안 뺏기고 오히려 이만큼 살게 됐다고도 할 수 있었는데 그것조차 ‘변경의 삶’이란 작가의 인식이다.
“60년대와 80년대 미국의 외교정책을 표현하는 말로 ‘독재자와의 왈츠(Waltz with a Dictator)’라는 게 있다. 독재자들이 어떤 일을 하든지 미국 이익만 지킬 수 있다면 그와 왈츠도 춘다는 것인데, 그 때문에 서로 싸우면서도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경우도 있다. 북한은 남한 핑계를 대고 남한은 북한 핑계를 대면서 독재자들이 자기 좋은 것은 다 챙겼다.”
두 제국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니 우리가 가장 허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까지 허용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남한의 유신이나 북한의 세습이 가장 오지게 해먹은 거다. 그래도 거절하면 돌아설 수 있기에 (제국이) 허용했다.”
그 관계가 묘하게 깨졌다고 했다.
“북한은 소비에트가 망해버렸고 남한은 미국에서 제국에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도덕주의가 대두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도덕주의가 한국의 유신에 패배했지만 어쨌든 10·26사태로 연결돼 독재자와의 왈츠는 끝났다. 작가는 이 시기까지를 <변경>에서 다뤘다. “미국은 그때부터 독재자와의 왈츠를 끝냈고 소련은 (이후) 망해버렸기에 더 논의할 것도 없고, 그 상황이 해소가 돼 버렸다.”
다만 작가는 한국에서의 현대는 북쪽까지 독재자와의 왈츠를 끝낸 시점부터로 보았다.
“폴 존슨이 40년 전에 도덕적 상대주의를 현대의 시작으로 보았듯이 우리에게 현대의 시작은 소련의 몰락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이것이 새로운 제국인지,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라고 할지는 알 수 없지만, 뭔가 큰 변화가 온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미 여러 사람이 세계의 패러다임이 바뀐다거나 문화가 바뀐다는 등으로 얘기했다는 것이다. ‘제3의 물결’ 역시 새로운 혁명을 예측한 것일 수도 있고 어쨌든 새로운 시대의 징후라는 것이다.
북한 이야기 세계에 먹힐 소재 작가는 북한 이탈주민의 삶에 관해 누군가 쓴다면 해외에서 주목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문학전략으로 본다면 특히 미국이 근래에 제3세계 출신 작가를 세계적 작가로 만드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미국이 기다린 세상과 관련된 사람, 악의 축에 대해 쓴 사람들이다. 월남에서 나온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 때 악의 축으로서 미국을 괴롭혔던 나라에 대해 쓰면 조명을 받는다. 중국 작가들도 많은데 대륙에서의 이념적 핍박이나 고통에 대해 쓴 것들이 그렇다. 근래 에이미 탄의 <조이럭클럽>이 많이 팔렸고 문화혁명 뒤에 온 홍위병 중에 미국이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 반공적으로 쓴 것이 많이 팔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개의 찬란한 태양>은 탈레반 이야기를 쓴 것인데 많이 팔렸다.” 그런 면에서 북한의 실상 이야기는 많이 팔리겠지만 자신이 쓰기엔 부담이 있다고 했다.
“2006년 미국 가서 그런 걸 느꼈다. 그래도 나는 낯이 있어서 쓰지 못한다. 우리 분위기로는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것이다. 우리 분위기에선 반미적이라면 모르나 친미적이라면 나쁜 놈이 될 것이다. 또 ‘이문열이 반공얘기 썼네’라고 할 것이다.”
작가의 과제 이 시대 작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자 작가는 “제일 어려운 질문”이라며 “그건 당신은 왜 작가가 됐고 무엇을 하려고 작가가 됐느냐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한마디로 답하기 어렵고 또 시간이 흐르며 계속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자신은 지금 집필 우선순위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됐다고 했다.
“우리 목숨이야 10년 20년 더 살 수도 있으나 제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그래서) 매일 점검하는 게 내가 우선 순위대로 하는가, 급한 것부터 하는가이다. 적어도 허용된다면 7~8년, 10년까지는 내가 꼭 쓰고 싶은 것, 꼭 써야 할 것에 우선 순위를 정해 써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무엇을 쓰겠다고 하기는 어렵다.”
우선 이미 정해진 것을 쓰고 여력이 난다면 그 다음에 다시 쓰고 싶은 걸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는 얘기다.
작가의 <변경> 이후 구상
그렇지만 또 다른 대하소설 계획은 접었다고 했다.
“원래 79년으로 시작해 90년 초까지 제목을 바꿔서 하나를 짓고, 그 다음에 그 이후 어느 시간을 골라서 마지막 매듭을 지으려고 했다. <영웅시대>가 프롤로그가 되고 그 다음이 <변경>시대, 다음이 ‘제국의 황혼’이 되고 마지막 에필로그로 해서 대략 25권 정도로 맺기를 바랐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그런 대하(大河)로 종합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하란 소설 양식이 이미 세계적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하란 양식이 문학적으로 죽은 것은 1950년대 초반이다. 사람이 진지하게 긴장하는 양이 있다고 한다. 대하는 진지하게 긴장하기엔 너무 길다. 그래서 대하는 서양에서는 죽은 양식이다. 우리나라엔 1980년대 이후에도 좋은 대하가 있었으나 서구에선 단 한 편도 나온 적이 없다. <토지>도 외국 가지고 가서 열두 권으로 내려다가 한 권 내고 손을 들었다. … 나 같은 경우 프랑스서 열 권 정도 나왔는데 <변경>이 번역돼 나올 가능성은 없다. 그런 걸 따지는 것은 아니나 스무 권씩이나 쓰는 것도 그렇고 미련스럽게 쓰는 것도 그렇고, 지금 쓴 <변경>도 후회가 많다. 그것을 세 개 정도 부작으로 갈라서 잘 썼으면 한몫을 할 것인데… .” 대작이 해외 진출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 그래서 80년대를 쓰더라도 3부작 형태로 쓸 것이라고 했다. “진지하게 생각할 범위 내에서….”
이문열 SNS 떠난 사연 “SNS 사용은 자해행위”
이문열은 분단된 체제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다. 어려선 부친이 6·25전쟁 때 월북했다고 해서 고생했고 장년이 돼선 보수를 지지한다고 해서 좌파로부터 매도당했다. 그래서 지금은 SNS마저 닫았다.
“예전엔 했으나 지금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끔씩 자해행위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해행위의 창을 닫는다고 끝냈다. 이렇게 말하면 호전적으로 들리기에 설명을 하겠다. <매체의 탈 대중성>이 문제다. 대중매체가 대중을 잡지 못하고 원래 대중성을 지향하지 않고 일대일 대화를 지향하는 SNS가 대중을 장악했다. 이 방식은 사람의 사고를 자극하지 못한다. 거기선 어떤 얘기가 나왔을 때 ‘좋아, 오늘 하루 생각해 보겠어’ 이렇게 답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모든 게 즉문즉답이고 단문단답이다. 사유에 대한 배려가 없는 소통에 대해선 믿지 못하겠다. 일정한 양의 사고나 이치를 담으려면 일정한 양이 필요한데 거기선 한두 문장만 난무한다. 워낙 짧은 글이 많아 믿지 못한다. 질문과 답 사이에 시간을 갖고 사고를 하고 그래야 한다. 질문과 답 사이에 시간이 있고 형식도 길어지고 사고가 있다면 참여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이런 사회에선 이분법적 분열을 봉합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그의 견해다.
“어떤 소통 방식이든 이분법적인 걸 다 완화하거나 조화시킬 수는 없다. 효과적으로 조화시킬 방법도 있고 오히려 조장하는 것도 있겠지만 내 경우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지금 같은 즉문즉답, 단문단답으로 두서없이 몰아치는 것, 이런 게 사라진 다음에야 가능하지 않을까.”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1호(2014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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