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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잉저우 캉스푸 회장 | 중국 본토 공략 강화하는 세계적인 ‘누들 킹’
입력 : 2014.12.05 14: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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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으로 시작한 캉스푸는 지금은 음료수와 과자류, 체인점, 할인점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해 중국 최대의 식품 메이커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시장조사기관 AC닐슨에 따르면 지난해 캉스푸 라면과 차음료, 생수의 시장점유율은 각각 44.1%와 51.8%, 23.6%를 차지했다. 이런 상품들은 중국 전역에 촘촘히 들어서 있는 영업점을 통해 팔리고 있다. 캉스푸는 중국 전역의 영업점 584개와 창고 82개 등 총 11만7000개 이상의 직영 소매점에서 판매된다.
최근 들어 상하이와 홍콩 증시에서 상호 교차 투자가 가능한 ‘후강퉁’이 개시되면서 캉스푸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홍콩 증시에 상장돼 있는 중국 본토 기업에 시선이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캉스푸는 1996년 2월 홍콩 증시에 상장한 우량 종목이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이 홍콩 항셍지수 블루칩으로 분류한 캉스푸는 후강퉁 도입에 따른 수혜주에 단골로 포함되고 있다.
경쟁사 따돌리며 압도적 1위 올해 중국 라면업계의 전반적인 성장 둔화 속에서도 캉스푸는 경쟁업체인 퉁이를 따돌리고 양호한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상반기 캉스푸의 매출액은 338억위안(약 6조1500억원)으로 퉁이(123억8700만위안)의 2.7배에 달했다. 퉁이가 라면사업에서 1억1600만위안 적자를 기록한 것과 달리 캉스푸는 전년 동기 대비 4.2% 증가한 9억8850만위안(약 1800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이런 캉스푸의 최대주주는 대만 딩신국제그룹이다. 딩신그룹이 1992년 일본의 산요식품과 합작으로 캉스푸를 설립했다. 그리고 딩신그룹의 주인이 바로 웨이잉저우(魏應州) 캉스푸 회장이다.
웨이 회장은 대만 출신으로 중국 본토에서 성공한 대표 기업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1954년 대만의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대만에서 작은 식용유 판매점을 운영했다. 웨이 회장의 원적지는 푸젠성 룽옌시 융딩현이다. 이른바 커자족(客家族)의 집단 거주지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 역시 커자족이다.
커자족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생활양식을 지금껏 유지하는 민족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중국 푸젠성에 가면 커자족들의 공동 거주지인 투러우(土樓)가 무려 2만여 채 존재한다. 원형으로 지어진 투러우는 마치 현대의 아파트처럼 수십 가구가 한 곳에 몰려 살 수 있도록 고안돼 있다. 외벽은 견고한 흙벽돌로 지어져 있어 외부 침입을 막기에 용이하다. 커자족은 예로부터 머리가 좋기로 유명하다. 웨이 회장 일가 역시 커자족 특유의 머리를 타고 났다는 평가를 듣는다.
웨이 회장은 1980년대 초반 부친으로부터 식용유 매장을 물려받아 동생 3명과 함께 열심히 운영했다. 보잘 것 없는 생산 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그는 매일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열심히 제품을 팔았다. 그럼에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부친이 남겨준 것은 매장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유한 자산은 대부분 빚으로 이뤄졌다. 도처에서 빚 독촉에 시달렸다. 상황이 악화됐을 때는 구매 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법원으로부터 압류를 당한 적도 있었다.
그다지 넉넉하지 않던 삶을 영위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88년 중국이 대만에 문호를 개방한 것. 웨이 회장은 동생들과 함께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시장 분석에 나섰다. 부친의 유지를 이어받아 식용유 판매 사업에 뛰어들었다. 식용유를 가게에서 조금씩 덜어 사는 본토 중국인들을 겨냥해 깔끔한 병 포장 식용유를 시장에 내놨다. 당시로서는 거금을 들여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실패였다.
남쪽의 따뜻한 곳에서 사용되던 기계를 베이징으로 들여와 사용하다보니 겨울에는 얼어붙기 일쑤였다. 또한 식용유 품질은 좋았지만 비싼 값의 병 포장용 식용유는 중국 본토인들에게는 사치품이나 다름없었다.
투자금의 절반 이상을 날린 웨이 회장은 본토를 떠나기 위해 광둥성 선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기차 안에서 허기를 달래기 위해 가방에서 대만산 컵라면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그가 라면을 먹는 모습을 중국인 승객들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당시만 해도 중국인들에게 라면은 생소한 식품이었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중국인들로부터 “그런 걸 어디가면 살 수 있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드디어 1992년 8월 그는 800만달러를 투자해 톈진 탕구경제기술개발구에 딩이국제식품을 설립했다. 현재 캉스푸의 최대주주인 딩이국제그룹의 전신이다. 당시로서는 거액인 3000만위안을 마케팅 비용으로 쏟아부을 정도로 그는 사업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가 내놓은 첫 제품은 ‘훙샤오 뉴러우 사발면’이었다. 이 라면은 출시 초기부터 소비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컵라면 맛을 알기 시작한 중국 본토인들의 구매 열풍이 이어졌다.
당시 톈진공장 제1생산라인에서는 매월 십만여 개 라면을 생산할 수 있었지만 톈진과 인근 지역으로만 공급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주문이 몰려들었다. 푸젠성 샤먼시에서 온 한 중개상은 톈진 공장 인근에 한 달간 머물면서 매일 공장에 라면 공급을 독촉하기도 했다. 그 중개상은 나중에 “공장에서 라면을 받아 정문을 나서기만 하면 현금을 들고 라면을 고가에 사겠다는 사람들이 앞다퉈 줄을 서곤 했다”고 기억했다.
이후 캉스푸는 말 그대로 탄탄대로였다. 라면사업의 성공을 바탕으로 1995년에는 톈진개발구에서 스낵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국 전역에 4개 스낵공장과 21개 생산라인을 운영하고 있다. 곧이어 1996년에는 저장성 항저우에서 음료 생산에까지 돌입했다. 현재 중국 내 13개 공장에서 82개 생산라인을 가동하고 있다.
미국 펩시와 손을 잡은 것도 캉스푸의 혜안이다. 캉스푸는 펩시의 모든 제품에 대한 중국 내 생산과 판매를 담당하고 있다. 펩시의 강력한 브랜드 파워와 캉스푸의 중국 내 유통망이 결합되면서 상당한 시너지를 내고 있다는 평가다.
딩신국제그룹은 1997년에는 상하이에서 대형 할인점 테스코(Tesco)를 설립했다. 현재 전국 10개 도시에 26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1998년에는 대만에서 50년 역사를 가진 제2의 식품그룹인 웨이췐을 인수합병해 덩치를 더 키웠다. 2002년에는 패스트푸드점 디코스(DICOS)를 인수합병하면서 요식업종에도 발을 들여놨다. 맥도널드를 경쟁사로 하는 디코스는 현재 중국 전역에 300개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캉스푸의 사업이 일취월장하면서 웨이 회장은 2010년 12월 ‘중국 10대 경제 지도자’로 선정됐다. 이듬해 5월에는 미국 포브스지로부터 자산 57억달러 평가를 받아 대만 부호 순위 4위에 올라섰다.
웨이 회장은 주변을 돌보는 기업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푸젠성에 있는 자신의 고향을 정성껏 보살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996년 고향에 있는 학교들의 증·개축 비용으로 100만위안의 기부금을 쾌척한 것을 비롯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향 사람들을 위해 돈을 쓰고 있다. 그의 동생인 웨이잉자오 부회장도 마찬가지다. 웨이 부회장이 1997년 10월 푸젠성 융딩현 고향을 방문해 학교 건물 준공식에 참석했을 때 마을 주민들은 그의 금의환향을 열렬히 환영했다. 웨이 회장은 2002년에는 90만 대만달러를 기부해 타이베이시에 융딩향우회 회관 건물을 매입해 주기도 했다. 이 회관은 대만에 거주하는 융딩현 출신 커자족들의 모임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웨이 회장을 말할 때 그의 동생들을 빼놓을 수 없다. 웨이 회장을 비롯한 4명의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사업 전선에 뛰어들어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는 습관을 길렀다. 뿐만 아니라 어느 형제들보다 창의력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면서도 4명의 형제들이 서로 약간씩 다른 특성을 갖고 있어 서로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으로 꼽힌다.
이들은 지금도 서로의 분야를 나눠 맡으면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웨이 회장이 총괄 지휘를 맡은 가운데 웨이 부회장은 시장판매와 마케팅, 웨이잉충은 재무관리를 책임진다. 웨이 회장이 딩신국제그룹 회장으로서 그룹 내 최고 의사결정자 역할을 하고 있고, 웨이 부회장은 주로 양안간 유통사업을 총괄한다. 웨이잉충과 웨이잉헝은 여전히 계열 식품회사인 대만 웨이췐을 경영한다.
이들 네 형제의 가훈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다. 특이한 것은 초기부터 각자의 부인들이 사업에 간여하지 않도록 했던 약속을 지금껏 잘 지키고 있다. 형제의 딸들도 전혀 회사 업무에 참여하지 않는다. 시대가 달라졌지만 특유의 가부장적 체제를 잘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웨이 회장은 기업을 어마어마한 규모로 키웠지만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언론과 인터뷰를 한 적도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경영 철학은 매우 분명하다. 웨이 회장은 평소에 이런 말을 자주 한다. “나는 대만에서 왔지만 중화민족에 대한 감정이 깊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있었던 덕분에 우리 중국인들이 부유해질 수 있었다. 부는 사회로부터 온 것이므로 나는 이를 어떻게 다시 사회로 환원할 수 있을지에 대해 늘 고민한다.”
웨이 회장이 공익사업에 열심인 이유다. 그는 회사가 크게 성장하기 이전인 1995년부터 벌써 전국의 빈곤한 지역에 딩신희망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산골 마을 아이들이 책을 읽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500만위안을 투입해 딩신펀드를 설립하기도 했다. 중국 본토에 큰 재해가 날 때마다 가장 앞장서 지원하는 기업인도 바로 그다.
웨이 회장은 대만인이지만 중국에 훨씬 더 많이 거주한다. 그는 1년 365일의 30일가량을 대만에서 생활하고, 30일가량을 해외에서 생활한다. 나머지 300일가량을 캉스푸 본사가 위치한 톈진개발구 내에서 지낸다. 톈진이 그의 제2의 고향인 셈이다. 그가 지금까지 중국 본토에 투자한 금액이 어느덧 15억달러를 넘어섰다.
지금까지 그의 성과는 시작에 불과하다. 중국 라면시장 전망이 워낙 밝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과 함께 소비 시장 자체가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 첫 번째 이유다. 또한 중국의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새롭게 라면을 먹기 시작하는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현재 중국의 도시화율은 50% 남짓. 중국 도시화율이 70%를 넘어설 때까지 라면 시장은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라면의 고급화가 진전되고 있는 것도 캉스푸에는 큰 기회다. 현재 중국의 라면 값은 우리 돈으로 평균 200원 정도. 한국의 신라면이 중국에서 600원 정도에 팔리는 것에 비해 3분의 1수준에 불과하다. 적어도 중국 라면은 향후 10년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고속 성장을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웨이 회장의 캉스푸 신화가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인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정혁훈 매일경제 베이징 특파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1호(2014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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