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설이 된 ‘17살 DJ오빠’ 김광한을 추억하다

    입력 : 2014.09.02 17: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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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일리시한 청바지, 자연스러운 웨이브 머리에 갈색 뿔테안경 뒤로 퍼지는 기분 좋은 눈웃음. 최연소 팝전문 DJ로 데뷔해 이제는 전설이 된 김광한의 시간은 몇 십 년째 멈춰 있다. 세월을 거슬러 15년 전 그의 사진과 비교해 봐도 큰 차이가 없다. 소녀들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던 따뜻한 목소리로 가슴 속 막힌 곳을 확 뚫어주는 시원한 화법은 예나 지금이나 DJ김광한의 트레이드마크다. “저는 20대 때나 지금이나 옷 스타일이 별 차이가 없어요. 청바지에 부츠, 점퍼에 지금 이 헤어스타일도 그대로예요. 늘 젊게 생각하고 또 자유롭게 살다보니 습관부터 젊어지더라고요. 특히 스트레스를 제일 싫어하고 또 별로 받지도 않아요. 아이도 없고 재산도 별로 없으니 유일하게 가끔 부인과 싸울 때 정도? 그래서 별명도 17살 아저씨 아닙니까.(웃음)”

    1946년생으로 내후년이면 DJ생활 50년차를 맞는 그는 30여 년간 큰 공백기 없이 꾸준히 청취자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몇 달 전 CBS 라디오스타를 그만두고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있다. 쉬는 동안 강단이며 행사, 음악다방 등 DJ김광한을 찾는 곳이 많아 여전히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햇살이 쨍쨍하게 비치던 8월 중순, 20년 손때가 가득 묻어 있는 LP판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서울 마포에 자리한 김광한의 작업실을 찾았다.

    “할 때는 몰랐는데 (생방송을) 내려놓고 나니 감옥에서 탈출한 느낌이 들더라니까요. 잠도 푹 자고 아내와 동유럽 여행도 한 달간 짬을 내 다녀왔어요. 워낙 어렸을 때 시작해 지금까지 달려오다 보니 해방감이 들기도 하지만 또 부스에 들어가고 싶은 걸 보니 별 수 없나봐요.”

    오랜 시간 정갈하면서도 기운 넘치는 DJ김광한의 목소리를 들어왔지만 막상 그의 인생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약관의 나이에 DJ데뷔를 시작한 이후 언제나 마이크 앞에 선 그였기에 얼핏 평탄하고 유복하게만 살아 왔으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의 인생그래프는 심하게 요동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년시절 만난 팝선생님 그 이름은 ‘AFKN’ “영어 수학은 끔찍이 싫어했어요. 대신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고 퍼주기를 잘해서 골목대장노릇도 좀 했죠. 특히 호기심은 많은 편이었는데 어느 날 하와이의 야자수 사진을 보고 꽂힌 거예요. 국민학교 5학년때인가 친구들이랑 부산에 가서 하와이로 향하는 배를 타고 밀항하려고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었는데 어머니한테 계획을 들켜 호되게 맞기도 했어요.(웃음)”

    상경한 안동김씨 가문 넷째 아들로 태어난 소년 김광한은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보내던 김광한은 팝선생님을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형님이 영어공부 할 목적으로 AFKN을 많이 들었어요. 저는 옆에서 자연스럽게 팝송을 듣게 된 거죠. 귀동냥으로 정신없이 듣다가 자연스레 친해졌죠. 그 뒤로 판을 모으기 시작했고 음악공부도 하게 됐어요. 처음 DJ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당시 유명했던 최동욱 씨, 이종환 씨가 있었는데 이 양반들 방송을 들으면서 시작됐죠.”

    넘치는 호기심만큼 고민도 많았던 그는 10대 시절 방황도 많이 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엇나갈 때마다 바로 잡아준 것도 다름 아닌 팝음악이었다. 오로지 팝음악을 깊게 파고 DJ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청소년 시절을 보낸 그는 현재 중앙대의 전신인 서라벌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한다. 입학하자마자 그는 오랜 기간 꿈꿔온 기회를 잡는다.

    “학교 부학장님이 어느 날 강의실에 들어와서 ‘여기서 판 제일 많이 가진 사람 누구냐?’라고 대뜸 물으시는 거예요. 주변에서 다 저를 지목하니 ‘그래 그럼 광한이가 맡아라’하고는 나가버리셨어요. 알고 보니 당시 최초의 FM방송이 1965년 6월 25일에 개국을 하는데 한 4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로 판을 틀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운명적으로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아르바이트로 DJ데뷔를 하게 된 거죠. 판을 열심히 틀다가 정식 개국하면서 자연스레 방송을 하게 된 거죠.”

    그러나 김광한의 데뷔 스토리는 동화가 아니었다. 청취자의 반응은 좋았지만 방송사 운영난으로 100여 회를 끝으로 DJ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첫 번째 시련을 맞은 청년 김광한은 이 시점에 어머니를 잃는 슬픔도 맞아야 했다.

    “심정적으로 많이 지친 시기였어요. 이럴 바에는 ‘싸우다 죽자’라는 심정으로 월남전 파병군에 지원했어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말한 ‘사람의 죽고 삶은 신만 알 수 있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되새기면서 비장하게 갔죠. 그런데 막상 배 타고 가서 내려 보니까 신세계가 따로 없었어요. 어렸을 때 밀항해서 와야지 했던 야자수도 보이고 죽으러 왔다는 생각보다 여행 왔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역설적이지만 삶의 의미에 대해 되새기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병아리 장수, 신문배달부 김광한 군에서 제대한 후 김광한은 집을 떠나 홀로서기에 나선다. 자수성가하라는 부친의 가르침도 한몫했다. 혼자가 된 김광한은 군 시절 더욱 커진 DJ에 대한 열망을 위해 음악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나 좀처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1968년부터 병역기간을 포함해서 14~15년이 훌쩍 흘러가 버렸어요. 지금처럼 DJ가 되기 위해 매니지먼트에 찾아가거나 그럴 환경도 아니었고 해서 그냥 무작정 판 모으고 음악 공부해서 나를 채우면 기회가 오겠거니 미련하게만 생각한거죠.”

    집안에서 어떤 경제적인 도움도 받지 않은 채 오랫동안 준비기간을 가진 김광한은 목구멍에 거미줄을 칠 지경이었다.

    “별 수 없이 돈을 벌어야 했죠. 시골에서 병아리 장사도 해봤고 하숙집 관리인, 우유 배달, 기자, 보험 판매원, 아크릴 간판업 등 한 16가지 일을 경험했어요. 단 정규직이 아니라 자유직이라고 할까요?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조건으로만 일했어요. 돈이 생기면 음반 샀어요.”

    하루 벌어 입에 풀칠하며 DJ의 꿈을 키워온 그도 문득 어느 날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데뷔는 훗날 꿈으로 남겨두고 직장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후 가지고 있던 유일한 자산인 판부터 정리하기로 마음먹는다. 돈암동, 성대, 종로, 이대, 신촌 등지에 밀집해 있던 음악다방에 악착같이 모아왔던 판을 들고 나갔다.

    “좋은 판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 엄청 반기더라고요. 그렇게 하나씩 판을 정리하고 있는데 신기한 일이 벌어져요. 판을 팔러 나갔는데 통장에 돈은 늘어나고 판도 더 많이 생기는 거예요. 음악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니 주문이 들어오면 도매상가에서 판을 사서 또 팔다 보니 이윤이 남더라고요. DJ 할 운명이었나 봐요.(웃음)”

    끈질기게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김광한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다. 1979년 당시 방송 DJ계의 독보적 존재였던 박원웅 씨가 진행하던 MBC FM ‘박원웅과 함께’에 게스트로 나서게 된 것이다. 그의 팝 지식을 대번에 알아본 박원웅 씨의 배려였다. 단박에 방송계에서 주목을 받은 그는 이듬해 TBC 89.1MHz FM에서 ‘탑 튠 쇼’로 화려하게 컴백한다. 그러나 경쟁자는 거물 김기덕 씨였다. 무명에 가까웠던 김광한으로서는 버거운 상대였다. 그때 김광한을 지켜준 것은 당대 최고의 팝스타 레이프 가렛이었다.

    “제게는 수호신과 같은 존재죠. 신인을 한번에 스타 DJ로 만들어 줬으니까요. 레이프 가렛 하면 당시 10~20대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는데 내한공연이 있다는 소식을 제가 제일 먼저 알게 된 거예요. 정보원은 제 선배이자 유명 힙합가수 타이거JK의 아버지인 팝칼럼니스트 고 서병후 씨였어요. 내한공연 일정부터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전부 들어서 방송을 하니 특종이 된 거죠.”

    단숨에 스타 DJ 반열에 오른 그는 구름처럼 팬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후 해박한 팝 지식과 특유의 방송스타일이 빛을 발하며 1983년부터 4년 연속 인기 1위 DJ자리를 휩쓸기도 했다. DJ로는 처음으로 소녀팬을 몰고 다니며 CF모델로 나서고 영화에도 출연했다.

    이후에는 탄탄대로였다. ‘김광한의 쇼 비디오 쟈키’라는 자신의 이름을 건 TV 프로그램에도 고정 출연하는가 하면 톱스타만 설 수 있다던 ‘가요톱텐’ MC로 서기도 했다. 당당히 김광한 시대를 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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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돌 음악이 판치면 그 나라의 대중음악은 죽는다 영원한 현역으로 활동하며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를 무색하게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김광한이지만 또 다른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팝음악의 인기가 시들해진 상황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팝 전문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마저도 설 수 있는 방송 수가 확연히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빌보드 차트가 매주 신문에 실리던 예전과 달리 최근 팝에 대한 인기가 시들해졌지만 예전 라디오DJ가 소개하는 팝송을 듣고 자란 세대가 이제 대중음악을 만들고 있잖아요. 그런데 예전에 가졌던 감성을 잃고 상업적이고 컴퓨터 소리가 난무하는 음악이 많아졌어요.”

    특히 그는 아이돌 음악이 방송은 물론 라디오나 음반차트를 잠식하고 있는 현 음반시장을 우려했다.

    “전설적인 그룹 비틀즈의 존 레논과 팝그룹 ‘웸’의 조지 마이클은 10대 음악이 판을 치면 그 나라의 대중음악이 죽는다고 했어요. 현 상황에서 아이돌 음악만 모든 방송에 노출되고 있잖아요. 특히 라디오란 매체에서 공영방송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못하고 있는 것이죠. 라디오에 많은 주파수를 사용하면서 방송을 하고 있는데 우리 세대가 들을 방송은 클래식이나 국악밖에 없는 것은 문제가 있는 거죠.”

    DJ로 컴백하면 방송국과 다시 가족이 될 수 있는 그였지만 그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바른 소리라면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특히 50여 년간 지켜온 라디오DJ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향후 목표에 대해 물었다. 수십 년간 스타 DJ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린 그였지만 히딩크 못지않게 아직 배고프다고 했다.

    “향후 전국을 순회하면서 야외나 소극장에서 DJ쇼를 하는 것이 목표예요. 또 하나 있다면 자선활동이에요. 신문배달할 때 아프고 어려워서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아이들이 아직도 생각나거든요. 그런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정기적인 자선음악감상회도 확대해 나갈 생각입니다. 더 바빠지게 생겼네요. 하하하.”

    포크페스티벌에서 만나는 김광한의 ‘추억의 음악다방’ DJ김광한이 오는 9월 13일 경기도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열리는 2014 파주 포크페스티벌에서 ‘추억의 음악다방’을 운영한다. 김광한은 출연 가수들의 본무대가 시작되기 전인 오후 12시부터 3시까지 공연장 입구에 설치되는 특설 텐트에서 왕년 최고의 팝디제잉 솜씨를 재현할 예정이다. 특히 개인 소장의 LP명반을 진공관 앰프를 통해 수준 높은 음악을 선사하는 한편 특유의 전문적이고 맛깔스런 멘트와 함께 공개한다.

    한편 ‘2014 파주 포크페스티벌’은 파주시가 주최하고 경기관광공사, 죠이커뮤니케이션이 공동주관하며 이장희, 김장훈, 유리상자, YB, 장필순, 한동준, 여행스케치, 자전거탄풍경, 동물원, 임지훈, 김목경, 심삼종, 이정란 이윤선, 안드레아스 샌드런 등 대표 포크뮤지션들이 출연한다. 또 부대행사로 ‘재야의 포크 고수’들을 대상으로 한 포크오디션 ‘제2회 파주 포크송 콘테스트’를 함께 진행한다.

    파주 포크페스티벌 사무국 (031)931-6666 www.pajufolk.com

    [박지훈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8호(2014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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