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 인문학적 소양 본다고 취업 위해 배우진 마라

    입력 : 2014.04.25 11: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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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계의 가장 젊은 총수 정용진(鄭溶鎭) 신세계 부회장이 지난 4월 8일 저녁 2000여 명의 학생들로 꽉 찬 연세대 대강당에 섰다. 신세계가 올해 장정에 나선 ‘지식향연’의 첫 테이프를 끊는 자리다. 대기업 CEO들이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은 흔하지만 총수가 직접 나오는 것은 드물다. 게다가 재계서열 19위에 순이익 서열로는 10위권에 든 대그룹 총수가 나오는 일은 더더욱 그렇다. 그런 만큼 이날 학생들의 반응은 아주 뜨거웠다.

    참고로 공정위 발표에 따르면 신세계는 올해 그룹 서열을 전년보다 두 단계나 높여 CJ를 제치고 19위에 올라섰다. 공기업이나 농협 등을 제외하면 13위다. 순이익은 6880억원에 달해 공룡 같은 여러 공기업들까지 제치고 10위를 차지했다.

    정 부회장은 이날 회사 홍보가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제대로 사는 것을 제시하러” 나왔다. 앞으로 이어질 인문학 강좌를 통해 세상을 바르게 보는 힘을 심어주겠다고 했다. 이번 행사는 신세계가 단지 소비자에게 물건을 파는 유통회사를 넘어 국민에게 다가가는 ‘국민기업’을 향한 첫 발을 내디딘 것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신세계는 지식향연의 모토를 ‘인문학 중흥을 통해 전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으로 잡았다. 이는 정 부회장이 지난 연말 “소비자보다는 국민 여론을 존중하는, 소비자를 위한 기업보다는 국민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을 이행하려는 것이다.

    말투는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 유명 트위터리안으로 많은 젊은 팬이 있는 정 부회장은 이날 기업의 최고 경영자라기보다는 젊은이의 매너로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비즈니스 관련 공식적인 자리나 임직원 앞에서 말할 기회는 많았으나 오늘처럼 밖으로 나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기회는 없어 이 자리가 긴장되고 흥분된다. … 조금이라도 내가 말하는 게 재미가 없다면 바로 스마트폰 꺼내 카톡이나 페이스북에 ‘야 정용진 부회장 강연 재미없다’고 올릴 것 같아 걱정도 된다”는 너스레에 학생들은 웃음으로 환호했다.

    “교수들처럼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고, 사회를 맡은 정지영 아나운서처럼 말을 잘하지도 못한다”고 했지만 그런 겸손함이 오히려 학생들과 더 가깝게 한 것 같다. “스펙 중요하다고 해서 있는 돈 없는 돈 털어 스펙을 쌓아놨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신세계 부회장이 나타나 인문학 얘기를 하니 짜증이 날 것이다. 저라도 여러분 입장이라면 짜증이 날 것이다”라고 학생들 입장에서 말하는 대목에선 ‘대그룹을 이끄는 것은 다 그만한 능력이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용진 부회장의 인문학론 정 부회장은 “공학적 사고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인문학은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라는 인텔 상호작용 · 경험연구소장인 제네비브 벨 박사의 얘기를 빌려 인문학이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나는 왜 사느냐, 무엇이 나의 사명인가’를 밝히는 것”이라고 풀어 나갔다. “그동안 ‘어떻게 사느냐’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무엇을 위해 사느냐’ ‘왜 그것을 해야 하느냐’를 생각할 때”란 그는 “상대의 겉만 보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읽으려고 하는 게 인문학이란 학문의 시작”이라고 했다.

    정 부회장은 이어 그동안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느라 ‘스펙 좋은 사람’만 가려 뽑았던 것을 반성한다며 왜 스펙에서 벗어나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과거에는 어느 정도 예측이란 게 가능했다. 그래서 기존의 정보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유능한 인재였다. 스펙 높은 사람이 우수한 인재라는 게 통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너무나 급변하고 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새로운 답을 만들어 가야 할 때가 왔다.” 그렇더라도 여기에 왜 인문학이 필요할까. 정 부회장은 새로운 미래를 만들려면 세상을 다르게 봐야 한다는 얘기로 답했다.

    “당장의 질서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 그래서 더 깊게 봐야 한다. 일을 하든 개인생활을 하든 행복하게 잘 살려면 나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총체적으로 생각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 그런데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검색으로 정보를 얻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검색을 통해 쉽게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사실 방에 들어가면 검색을 한다. 검색 참 좋은 것 같고 그래서 참 많이 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쉽고 빠른 길만 가려고 한다. ‘왜, 어떻게’ 라는 생각 없이 쉬운 길만 가려는 잘못된 생각을 바꾸는 게 인문학이다.”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에게 스펙 쌓기에 정열을 바치게 한 기존 인재선발 방식은 잘못됐다고 했다. “(오늘) 열심히 사는 후배들에게 제대로 사는 길을 제시한다. 취업 준비 잘 돼 가냐고 할 때 무엇이 떠오르나. 기업정보나 스펙, 멋진 자기소개서, 면접 때 입을 의상 같을 걸 떠올리고 면접장에 간다면 계속 다른 면접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국내 기업은 물론이고 글로벌 기업들도 모두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인사나 재무 마케팅 등 기업의 전 조직분야에 걸쳐서 그렇다.”

    이야기가 딱딱해진다고 생각했는지 정 부회장은 스마트폰을 빼어들고는 “여기 스마트폰이 있다. 삼성 갤럭시 S5인데…”라고 해 잠시 웃음을 자아낸 뒤 이어나갔다.

    “우리가 쓰고 있는 이 스마트폰만 해도 대충 만든 것 같지만 인간의 정신적 행동 패턴이나 인간의 사고와 직관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가 제품 디자인과 서비스에 모두 들어 있다.” 그런 면에서 인재의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하는 것은 글로벌 기업들의 공통사항이라고 했다.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는 구글 같은 기업조차 신입사원 채용할 때 ‘당신은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이냐’ ‘어떠한 세상을 당신은 갖고 싶냐’고 묻는다. 이런 질문을 통해 인문학적 상상력을 평가해 인재를 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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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세계 채용방식 바꾼다 정 부회장은 이 같은 트렌드에 맞춰 지금 신세계도 채용방식을 많이 바꾸려 한다고 소개했다. “지식만 많이 쌓은 사람을 뽑는 게 아니고 인문학적 소양과 철학적 통찰력을 가진 사람을 뽑으려고 한다. 취업을 위해 스펙 쌓기에 지친 여러분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인문학적 소양이나 철학적 통찰력을 묻는다는 게 이공계보다 인문사회 계열을 우대하겠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떤 전공을 했느냐, 어떤 책을 읽었느냐를 떠나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 사회문화에 대한 관심, 이 세상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열린 마음이 있는지를 본다.”

    그러면서 매년 신입사원 선발 때 면접소감도 털어놨다.

    “나는 매년 신입사원 선발할 때 직접 면접을 한다. 최근 지원하는 사람들의 스펙이 매년 점점 높아지고 있다. 놀랄 정도다. 예전엔 몇 명밖에 없던 높은 스펙의 지원자가 지금은 70~80%나 된다. 그런데 그 좋은 스펙 갖고 앵무새처럼 똑같이 말한다. 많은 지원자들이 자신의 소신을 말하지 않고 마치 모범답안을 얘기하는 것 같이 말한다. 자신의 소신만 제대로 밝힌다면, 자신의 철학을 말한다면, 그 좋은 스펙이 훨씬 돋보일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다.”

    그러면서 신세계가 왜 인문학적 소양을 보겠다는 것인지 설명했다.

    “신세계에는 5만 명이 넘는 임직원이 일하고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획일적이라면 조직이 어떻게 창의적으로 해결해 나가며 성장할 수 있겠나. 조직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소신과 주관을 가진 구성원이 자기 의사를 정확히 말하고, 자신 있게 얘기하고 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토론하는 가운데 창의적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혁신적 결과를 만들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정 부회장은 인문학적 가치는 신세계의 경영철학과도 맞물려 있다고 했다.

    “신세계 경영철학의 중심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인문 예술 문화를 통해 고객의 소중한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그래서 인문학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확산되도록 후원하려고 한다. 젊은 세대와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신세계가 사회와 청년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는 길이다.”

    그가 평소 마켓셰어보다 소비자의 일상을 점유하는 라이프셰어를 강조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세계는 같은 맥락에서 최근 교외형 복합쇼핑몰을 라이프스타일센터(LSC) 전략으로 추진하고 있다.

    ※ 44호에서 계속...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4호(2014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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