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프 레섬` 플로리스트·신라호텔 웨딩 부문 자문…난 비의 팬, 그의 결혼식을 장식하고 싶다

    입력 : 2011.10.27 09:57:51

  • 사진설명
    청바지에 화려한 앵글부츠, 수북한 가슴 털을 살짝 드러낸 블랙 라운드 티에 어깨선이 가지런한 블랙 재킷이 다소 얌전하다…는 첫인상은 호피무늬 머플러 하나로 산산이 부서졌다. 오히려 ‘올드한 서부영화의 마초적 아메리칸 아닐까’란 호기심이 슬쩍 고개를 들 즈음 카메라 앞에서 장난치듯 취한 섹시 포즈에 두 번째 선입견도 산산이 흩어졌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보랏빛 꽃다발을 얼굴에 대고 카메라 앵글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윽했고 어깨보다 두어 뼘 더 벌린 다리에선 왠지 오만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이 세련된 품격에 내재된 도발적인 감각은 바지 지퍼 앞에 꽃다발을 갖다 대고 포효하는 포즈로 마무리됐다. 그러니 이 모든 파격을 설명하는데 섹시보다 나은 단어가 있을까. 장충동 언덕 신라호텔 로비에서 플로리스트 제프 레섬(Jeff Leatham)을 만났다. 그의 공식 직함은 프랑스 파리 포시즌 조르주 상크 호텔의 아트디렉터이자 지난 3년간 신라호텔의 웨딩 부문을 자문해온 디자인 컨설턴트. 언뜻 컨설턴트가 뭐 그리 대단할까 싶지만 티나 터너, 오프라 윈프리, 마돈나, 카일리 미노그, 믹 재거, 달라이 라마 등 몇몇 이름을 나열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2010년엔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의 딸 첼시 클린턴의 결혼식을 25만 달러에 달하는 꽃으로 장식했고 한국에선 장동건·고소영(장·고) 커플의 결혼식 꽃 장식을 담당하며 이름을 알렸다. 알렉산더 맥퀸, 톰 포드, 필립 트레이시, 지방시, 버버리, 엠마누엘 웅가로 등 명품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 무대를 선보이는가 하면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오프닝 갈라 무대에 작품이 전시되며 다양한 분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럭스멘은 말과 행동에 품격이 있는 사람
    제프 레섬은 즐기는 문화가 곧 바람직한 웨딩문화라고 이야기했다.
    제프 레섬은 즐기는 문화가 곧 바람직한 웨딩문화라고 이야기했다.
    인터뷰를 위해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가 던진 질문 하나. “럭스멘(Luxmen)? 도대체 당신이 생각하는 럭스멘은 어떤 사람입니까?” 가까스로 카운터펀치를 피한 복싱 선수 마냥 동그래진 눈으로 “자기 소신이 확실하고 쉽게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라 했더니 “단순히 돈이 많은 게 아니라 말과 행동, 취향, 활동에 품격이 있는 사람”이란 답이 돌아왔다. 이른바 럭셔리한 상류층이 주 고객인 그는 스스로 고객을 선택하는 플로리스트로 유명하다. ‘형식의 틀을 깬 파격’이라 평가받는 플로리스트의 고객이 안정을 추구하는 부자란 점도 아이러니지만 때로 그 부자들의 부름을 마다하기도 한다니, 소문 무서운 동네에서 너무 오만한 마케팅 아닐까.

    “물론 고객이 상류층이긴 하지만 제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분을 원합니다. 얼마 전에도 러시아의 한 부자가 디자인을 원했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어요. 금전적으론 도움이 됐겠지만 너무 많은 걸 요구할 것 같더군요.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요구가 많다는 건 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 아닙니까. 대부분 고객과의 관계는 원만해요. 간혹 고객을 보좌하는 분들이 어렵게 만들곤 합니다. 첼시 클린턴의 결혼식이 그랬는데 노출에 대해 이것저것 지적하는 통에 얼마나 힘들던지(웃음).”

    셀리브리티에게 의뢰받은 행사에서 그가 집중하는 부분은 세 가지. 새로운 것, 존재하지 않는 것, 고급스러운 것이 그것이다. 이 세 덕목으로 장식된 작품은 고객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며 새로운 사업으로 발전했다. 최근 자신의 이름을 딴 향수와 향초 등 뷰티 라인을 출시한 그는 두 권의 꽃 관련 서적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뿌린 향수가 제 향수에요. 좋은 향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플로리스트를 그만두더라도 계속 가야 할 길이란 예감이 들어요. 아, 또 하나는 꽃병인데요. 우선 한정판 15개를 디자인해 1만3000불에 판매했습니다. 다 팔렸어요(웃음). 곧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는데 크리스털로 된 투명한 꽃병입니다.”

    사실 제프 레섬이란 이름 앞에 붙은 ‘세계 정상급’이란 수식어는 우연한 기회에 얻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를 도와 정원손질에 나서기도 했지만 어린 소년에게 플로리스트란 직업은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꽃은 향기가 아닌 시련을 앞세웠다.

    “대학을 다니다 중퇴했는데 당연히 직업이 필요하더군요(웃음). 갭(Gap) 매장에서 매니저로 일하다 우연히 모델이 됐어요. 덕분에 자주 유럽을 접했습니다. 그 때 프랑스에서 디자인을 보게 됐죠.”

    3년간 모델로 활동하다 LA로 돌아왔지만 수입이 필요한 백수 신세가 전부였다. 생계를 위해 꽃 관련 회사에 취직한 그는 또 다시 우연한 기회에 LA 포시즌 베벌리힐스 호텔의 플라워숍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꽃에 대한 그의 재능은 이 시점부터 몽우리를 맺기 시작한다.

    “그 호텔에서 처음으로 제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꽃 앞에서 포즈를 취하더군요. 꼭 디즈니랜드 같았어요(웃음). 열심히 했습니다. 하는 만큼 인정해주더군요. 그렇게 지금의 파리 포시즌 조르주 상크 호텔로 스카우트됐습니다. LA에서의 시작은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자 추억입니다.”

    그는 파리에서 3년 연속 ‘최고의 유럽 호텔 플로리스트’로 인정받았다. 꽃과 디자인을 전공한 이들이 즐비한 플로리스트의 세계에 제도권 교육이 전무한 고졸 학력자가 넘버원이 된 것이다.

    “꽃과 관련된 공부는 못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한계나 틀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거해라 저거해라가 아니라 스스로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라고 생각했으니까. 또 하나, 스트레스 받지 않고 하고 싶은 데로 하다 보니 이 자리에 올라오게 된 것 같습니다. 거리낌 말투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네요(웃음).”

    받아야 줄 수 있고 줘야 받을 수 있다 이번이 여섯 번째 방한인 제프 레섬이 신라호텔에서 선보인 올 가을과 겨울 웨딩 디자인 트렌드는 겨울의 대표 컬러 화이트를 기본으로 한 ‘핫핑크’. 그에게 핑크빛 웨딩을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을 묻자 ‘최소 5만불’이란 답이 돌아왔다.

    “현재 살고 있는 프랑스의 경우는 가격이 낮아질 수도 있는데, 다른 국가는 꽃값에 체재경비가 포함되기 때문에 최소한 이 정도 금액은 돼야 합니다. 덕분에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세운 에이즈 치료약 연구단체에 기부도 하고 무상으로 꽃 장식을 해주기도 하죠. 받아야 줄 수 있고 줘야 받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럭셔리 웨딩(Luxury Order-Made Wedding) 전문가에게 한국의 결혼식 문화는 어떻게 비춰졌을까.

    “결혼식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는 건 좋지 않아요. 주인공의 취향이 살지 않습니다. 한국의 결혼식은 많은 분들이 참석해 밥만 먹고 집에 가더군요.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 좀 더 즐겨야죠. 식 전엔 칵테일을 나누며 대화하고 식 후엔 장소를 바꿔 파티를 즐기는 겁니다. 그러려면 완전히 분위기를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렇게 즐기는 문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장·고 커플은 어땠냐고요? 글쎄요. 전 비 팬이라서(웃음). 비의 결혼식은 꼭 제가 장식하고 싶습니다.”

    [안재형 기자 ssalo@mk.co.kr│사진 =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4호(2011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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