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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아람코의 오일뱅크 지분 인수... 국내 IPO 시장엔 독·정유업계엔 약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인수에 박차
입력 : 2019.03.05 10: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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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가 현대오일뱅크(오일뱅크) 지분을 사들이면서 국내 증시에 뜻밖의 ‘나비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증권가에선 아람코의 오일뱅크 지분 인수로 모처럼 타오르던 국내 IPO(기업공개) 시장이 차갑게 식게 됐다고 걱정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올해 IPO 시장 규모는 대어 중 하나로 평가받던 오일뱅크가 빠져 나가면서 10조원을 넘지 못할 것으로 관측된다.
일각에선 아람코가 오일뱅크에 대해 후한 값을 지불했는데 이를 적용하면 일부 정유사의 기업가치는 극도로 저평가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분석도 있다.
아람코가 오일뱅크 지분을 급하게 사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존재하지만 어쨌든 이번 계기를 통해 다른 정유사들의 기업가치가 부각되고 있다는 점은 국내 정유업계에 긍정적 소식이라는 것이다.
현대오일뱅크 대산공장 전경
현대중공업그룹이 지난달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에 현대오일뱅크 지분을 매각해 최대 1조800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하게 됐다.
현대중공업은 최근 “사우디 아람코와 ‘프리(Pre)-IPO’(상장 전 지분매각)에 관한 투자계약서를 체결했다”며 “현대중공업지주가 보유한 오일뱅크의 지분 최대 19.9%를 아람코가 최대 1조8000억원에 인수할 계획”이라고 공시했다. 프리IPO는 정식 기업공개(IPO) 전에 미리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유치하는 것이다.
아람코는 현대오일뱅크 시가총액을 10조원으로 산정해 주당가치 3만6000원 수준으로 인수할 계획이다. 아람코는 현대중공업지주에 이어 오일뱅크 2대 주주가 된다. 이번 계약은 이사회 의결을 통해 최종 확정된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이번 계약을 통해 조달한 금액은 현대중공업그룹 재무건전성 개선과 신사업 투자에 사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회사 관계자는 “세계 1위 석유회사가 투자했다는 점만으로도 현대오일뱅크 기업가치가 크게 상승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강조했다.
아람코는 세계 원유생산량의 15%를 공급하는 세계 최대 석유회사로, 현대오일뱅크의 업계 최고 고도화율(40.6%)과 성장 가능성 등을 높게 평가해 이번 투자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람코는 지난 2015년 11월 현대중공업그룹과 전략적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뒤 사우디 최대 조선소 건립, 엔진 합작법인 설립 추진 등 각종 분야에서 협력하며 시너지를 냈다. 또 아람코는 국내 정유사 에쓰오일(63.4%)의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현대중공업 측이 밝힌 것처럼 오일뱅크 지분 일부를 매각해 현금을 마련하게 되면서 재무건전성 악화라는 ‘급한 불’을 끄게 됐다. 아람코는 최근 글로벌 시장 공략을 통해 원유 공급 창구를 넓혔다는 점에서 이득이다. 앞서 아람코는 지난해 말레이시아 국영 석유업체 페트로나스와의 합작법인을 설립해 말레이시아 정유시설에 대한 투자 확대 계획도 밝힌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아람코가 에쓰오일 등의 주주로서 국내 정유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현대중공업 측도 이번 아람코의 지분 참여에 별다른 부담은 없었을 것”이라며 “오히려 향후 국내 증시에 상장해 받을 수 있는 금액보다 더 많은 현금을, 더 빨리 확보하게 돼 현대중공업 측이 한숨을 돌리게 됐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그룹과 아람코가 이번 계약 이후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동안 국내 증시는 다소 허탈한 입장이다.
당초 증권업계는 오일뱅크가 상장되면 기업가치가 약 10조원, 공모금액은 2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복잡한 국내 IPO를 거치지 않고도 단 한 번의 계약에 이 같은 자금 유입이 가능했다. 현대중공업 그룹 입장에선 급할 게 없어졌지만 자본 시장 확장에 사운을 건 한국거래소는 마음이 급해지고 있다.
거래소 관계자는 “이번 오일뱅크 상장 연기로 IPO 공모액은 당초 예상했던 금액보다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2016~2017년의 경우 삼성바이오로직스(2조2000억원), 두산밥캣(9000억원), 넷마블(2조7000억원), ING생명(1조1000억원) 등 1조원 이상의 대형 기업들이 국내 증시에 진입하면서 그 공모 규모가 2년 연속 4조원을 돌파했다.
그러나 작년에 SK이노베이션의 윤활유 사업 부문인 SK루브리컨츠가 공모를 철회한 데 이어 오일뱅크마저 상장을 연기하면서 작년 IPO 공모 규모는 2조7000억원으로 5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일각에선 까다로워진 공모 절차를 지적하기도 한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태로 회계감리가 강화되면서 대어급들이 증시 노크를 주저하고 있다.
또 작년 8월 오일뱅크의 자회사 현대쉘베이스오일의 회계처리 관련 문제가 지적되면서 상장 절차가 연기된 것도 오일뱅크의 마음이 돌아선 이유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오일뱅크는 국내 증시 상장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려 했지만 국내 증시의 자질구레한 절차가 결국 발목을 잡은 것”이라며 “특히 정부가 삼성그룹을 정조준하며 바이오로직스의 회계 처리를 끊임없이 문제 삼았고 부랴부랴 자회사에 대해 보수적 회계처리를 하는 데 시간을 보냈는데 사우디가 좋은 조건을 제시하니 프리IPO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연초부터 대형 계약이 터진 것에 한동안 ‘뜬금포’라는 얘기가 돌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복잡한 실타래는 풀리고 있다. 이후 현대중공업이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나서면서 일단 자금력을 키워야 했다는 속사정이 드러난 것이다.
그동안 부실 조선사의 대명사로 불렸던 대우조선이 세계 1위 조선사인 현대중공업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지난 2월 12일, 대우조선의 1대주주인 산업은행은 현대중공업을 대우조선의 주인으로 최종 낙점했다. 향후 현대중공업이 중간지주사를 만들어 1대 주주가 되고 산업은행은 2인자로 내려가게 된다.
향후 중간지주사 역할을 하게 될 조선합작법인은 상장을 유지하고, 사업부문인 현대중공업은 비상장사가 된다.
이를 위해 산업은행이 보유한 대우조선 지분 전량은 이 조선합작법인에 출자된다. 조선합작법인은 산업은행의 현물출자 대가로 1조2500억원의 상환우선주와 600만9570주의 보통주를 발행해 넘길 계획이다. 이들의 계약이 성공적으로 완료될 경우 ‘현대중공업지주→조선통합법인→대우조선해양·현대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의 체제로 바뀌게 된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중공업과 산업은행이 이처럼 복잡한 방식을 택한 것은 주인을 바꾸면서도 당장의 현금 입·출입이 없어 단기 자금 부담이 없다는 것”이라며 “그러나 대우조선이 부실해지면 자금 부담은 현대중공업이 지게 되기 때문에 일단 재무 건전성을 높일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오일뱅크 지분을 예상보다 빨리 매각하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일뱅크의 지분 매각 이전에 재무제표상으로 보면 현대중공업지주의 자금력은 부족한 편이다. 작년 9월 말 기준 현대중공업지주의 현금성자산은 1조2486억원에 그쳤다. 현대중공업이 산업은행에 대우조선 인수의향서를 제출할 당시 대우조선 지분가치가 약 2조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현금이 8000억원 넘게 모자란 것이다. 그러나 아람코가 오일뱅크 지분을 1조8000억원에 사면서 이 같은 자금난은 곧바로 해소됐다.
일각에서 현대중공업그룹이 ‘중동 머니’로 대우조선을 인수하게 됐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원래 대형 계약을 앞두고 급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법이다. 그러나 이번 아람코의 오일뱅크 지분 인수는 예상을 깬 사례다. 실제로는 아람코도 사정이 다급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미국에게 아시아 시장을 다 뺏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이 같은 후한 계약을 이끌었다는 의견이다.
특히 국내 정유사 중 오일뱅크의 중동산 원유 비중이 가장 낮았다는 점을 보면 아람코가 오일뱅크를 정조준한 이유가 나온다.
아람코의 국내 투자 역사는 길다. 지난 1991년 아람코는 쌍용양회가 보유한 쌍용정유 지분 35%를 인수한 데 이어 외환위기 이후 쌍용그룹이 해체되자 지분 28.4%를 추가로 샀다. 2015년에는 한진그룹 계열사인 한진에너지가 보유하고 있던 에쓰오일 주식 3198만주를 전량매수하며 지분율을 63.41%로 끌어올린 것이다. 사우디 입장에선 한국이 원유 소비의 ‘큰손’이다. 한국은 원유를 통해 화학제품을 생산해 수출한다. 반도체와 함께 수출 주력 업종이다.
그러나 아람코 입장에선 최근 한국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사우디산 원유 수입은 전년 동기보다 17.1%나 줄었다. 반면 미국산 원유 수입은 같은 기간 1361만 배럴로, 전년 같은 달의 6배 급증했다.
에너지 분야 정보분석업체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글로벌 플라츠’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아람코는 현대오일뱅크 지분 인수로 아시아 주요 원유 소비국에 안정적인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바꿔 말하면 아람코가 미국으로부터 아시아 원유시장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포석이라는 것이다.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셀을 생산하고 있는 엔지니어
또 하나의 나비 효과는 SK이노베이션의 가치 부각이다. 경쟁업체인 오일뱅크가 높은 가치를 인정받은 만큼 SK이노베이션의 저평가 매력이 부각될 것이란 기대감이 나온다.
아람코의 속내를 제쳐두고 이번 지분 매입이 정상적인 시장 가치 평가법에 따른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서 기업가치(EV)는 연간 현금창출력(EBITDA)에 EV/EBITDA 배수(멀티플)를 곱한 후 순차입금을 빼서 계산한다.
이 같은 계산법(SOTP방식)을 아람코의 오일뱅크 지분가치 산정에 적용해보면 오일뱅크의 작년 EBITDA는 1조810억원으로 추정된다. 또 작년 말 기준 순차입금은 3조257억원이다. 아람코가 오일뱅크 지분 19.99%를 1조8000억원에 샀기 때문에 전체 EV를 9조360억원이라고 산정한 셈이다.
따라서 이를 역산해보면 멀티플은 11.2배라는 수치가 나온다. 시장 평균이 9~10배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확실히 아람코가 오일뱅크 지분 인수에 후한 값을 지불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멀티플을 SK이노베이션에 적용하면 어떨까. 같은 방식으로 SK이노베이션 작년 EBITDA는 3조1220억원 수준으로 여기에 멀티플 11.2배를 곱하고 순차입금(3조6360억원)을 빼면 31조3304억원이 나온다. SK이노베이션의 시가총액은 16조9674억원(2월 14일 기준)이다. 이 업체가 주식시장에서 평가받는 가격이 아람코 기준으로 본 기업가치(EV)의 절반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조현렬 삼성증권 연구원은 “SK이노베이션의 현재 주가는 전기차 배터리와 같은 성장동력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수준”이라며 “중장기적 성장성을 고려하면 정유화학업종에서 최선호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은 국내 정유 1위 사업자라는 타이틀로 유명하지만 화학 사업을 키우면서 사업 다각화에 성공했다.
SK이노베이션이 최근 발표한 지난해 영업이익은 2조1202억원으로 전년 대비 34.2% 줄었다. 특히 같은 해 4분기에는 2788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겉으로만 보면 이 업체가 장사를 크게 잘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유사의 실적은 유가 하락에 따라 변동폭이 큰 편이고 유달리 작년 4분기는 ‘보릿고개’였다. 다른 정유사들도 모두 실적이 크게 하락했다.
SK이노베이션은 석유사업에서 급락한 국제유가 탓으로 재고평가 손실과 정제 마진 악화가 발생해 554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영업이익상의 부진은 유가 변동에 대한 손익 악화를 방어하기 위한 원유 구매 헤지(Hedge)에서 대거 만회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같은 헤지 관련 수익이 포함되는 영업외이익은 작년 4분기에 6556억원에 달했다.
이명영 SK이노베이션 재무본부장은 “원유제품 트레이딩을 통해 일부 물량에 대해 헷지를 시행 중”이라며 “4분기에 반영된 헷지 수익은 작년 9월 유가인 배럴당 70달러 상단일 것으로 판단해 이익 확보 목적으로 파생해 둔 것”이라고 언급했다.
작년 4분기 유가 하락을 예측하고 유가 하락 국면에 유리한 파생 상품 거래로 더 큰 손실을 막았다는 설명이다.
또 미래 사업으로 키우고 있는 배터리 사업에서 향후 흑자를 기대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작년 4분기 실적을 발표하며 사상 최초로 전기차배터리 부문 실적을 별도로 공시했다. 통상 적자 사업의 경우 다른 사업에 포함시켜 실적 악화를 숨기기 마련인데 SK이노베이션은 정공법을 택한 셈이다. 증권가에선 향후 흑자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면 이 같은 별도 분리 공시는 실행하기 힘든 시스템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정유사들은 유가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혁신과 사업 구조 개편을 시행하고 있다”며 “이 같은 환경이 아람코의 정유사 지분 인수로 이어진 만큼 향후 국내 정유사들의 기업가치는 높아질 여지가 많다”고 내다봤다.
[문일호 증권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2호 (2019년 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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