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언대용신탁’ 상속 걱정 끝! 유언장 대신에 은행 통해 상속 중산층도 이용 갈수록 늘어

    입력 : 2025.10.27 17: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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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영업을 하는 60대 A씨는 최근 한 은행을 찾아 유언대용신탁에 가입했다. 가지고 있는 부동산과 현금 등을 맡기기 위해서다. 자식이 없는 A씨는 사망하면 재산 일부를 조카들에게 상속하고 나머지는 기부할 작정이다. A씨는 “아프거나 치매에 걸렸을 때 가족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고, 조카들에게 일부 재산을 물려주고 싶다”는 내용으로 상담을 받았다. 은행에선 유언대용신탁 상품을 통해 향후 노후 비용이나 상속 방안 등을 추천해줬다. A씨가 사망 이후 장례 절차를 맡을 곳도 지정했다.

    고령층 자산, 이른바 ‘시니어 머니’가 자본시장의 주류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해 처음으로 65살 이상 인구 비중이 20%를 넘어선 가운데 60살 이상 고령층의 총 순자산이 4300조원에 이르는 등 급증세를 보인다. 향후 10~20년 사이에 이들 자산의 상당 규모는 이후 세대에 이전될 터다. 은행 등 금융권이 고령층 자산을 중심에 둔 경쟁을 본격화하고 있는 까닭이다.

    초고령사회의 새로운 고민거리 중 하나가 바로 상속이다. 특히 고령 치매 환자의 자산은 사실상 사용되지 못하고 잠들어 있어 사회·경제적 문제로 불거질 우려가 크다. 정부의 ‘고령 치매환자 자산 전수조사’ 결과를 보면, 2023년 기준 124만명의 고령 치매 환자가 보유한 자산은 154조 5416억원이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 따르면 치매환자는 2030년 178만 7000명, 2040년 285만 1000명, 2050년 396만 7000명으로 늘어나고, 치매머니 역시 급증해 2050년에는 488조원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신탁 잔액 4조원 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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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따라 시중은행들은 관련 상품에 힘을 쏟고 있다. 대표적인 상품이 유언대용신탁이다.

    유언대용신탁은 금융사에 자산을 맡기면서 사망 이후 수익자와 분배 조건을 미리 정하는 상품이다. 생존시 운용수익은 생활비·치료비 등으로 쓰다가 사망하면 지정된 수익자에게 자산이 이전된다. 건강이 악화되거나 치매에 걸릴 경우를 대비해 신탁 관리자를 지정해두면 병원비·요양비·장례비 등을 집행해준다.

    올해 상반기 말 기준으로 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 등 5대 은행의 유언대용신탁 상품 잔액은 3조 7663억원이다. 지난해 말보다 1605억원 증가하는 등 최근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2020년 1조원이 되지 않던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의 유언대용신탁 잔액은 지난 8월 기준 3조 9000억원으로 성장해 4조원을 목전에 두고 있는 셈이다.

    잔액뿐 아니라 이용 건수도 늘어나는 추세다. 유언대용신탁은 도입 초기였던 2012년 1만 8000건에 불과했으나 지난해 9월에는 25만 5000건까지 증가했고, 현재는 30만 건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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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언장과 차이점은

    유언대용신탁은 특히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 유언에 비해 금융사를 통한 계약만으로 재산 관리 및 상속방식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기에 부동산을 포함한 자산가치 상승으로 상속 재산이 증가하는 데다 가입 문턱도 낮아지면서 대중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고객(위탁자)이 금융사(수탁자)와 계약을 맺고 재산을 맡긴 후 배우자, 자녀, 손자 등에게 배분한다. 고객은 생전에 금융사를 통해 재산을 운용하다가 사후에 가족에게 재산을 지급할 수 있다. 현금, 증권, 채권, 부동산 등 자산이 신탁 대상이다.

    유언대용신탁의 가장 큰 장점은 재산 관리 및 상속방식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들은 빼고 손자에게만 재산을 물려주는 등의 방식으로 상속자를 선택해 지정할 수 있다. 위탁자는 자녀에게 한 번에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특정 기간 매달 생활비로 지급되도록 설계할 수 있다. 또 배우자에게 1차 상속을 하고, 1차 수익자가 사망한 이후 자녀에게 재산을 승계하도록 수익자를 순차 지정할 수도 있다. 유언장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상속 설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상속 분쟁을 줄일 수 있는 수단으로 주목받는다. 자녀가 부양 의무를 다해야 재산을 상속한다는 조건을 달 수도 있다. 자녀가 충분히 자산을 관리할 시점까지 수탁자인 금융사가 보관해 뒀다가 추후에 재산을 이전해주는 식이다.

    유언대용신탁은 위탁자가 살아 있을 때도 유용하다. 사고나 질병 등으로 인지 능력이 떨어져 의사소통이 어려워졌을 때 재산 일부를 처분해 요양비나 병원비를 매달 내도록 미리 계획할 수 있다. 1인 가구는 사망 후 장례와 봉안 등의 준비까지 해놓는게 가능하다는 점에서 활용도가 더 높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연하게 설계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유언 내용 변경도 자유롭다. 유언장은 내용을 바꾸려면 새로 써야 하고 자필증서, 녹음, 공증 등이 필요해 작성 과정이 복잡하다. 하지만 유언대용신탁은 은행을 통해 계약서를 변경하는 것으로 쉽게 내용을 바꿀 수 있다. 유언장 진위 여부나 분실 위험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이밖에 맡긴 재산을 주식, 상장지수펀드(ETF), 채권 등에 투자해 불릴 수 있고, 맡길 수 있는 자산이 다양(금전·부동산·유가증권·금전채권·보험금 청구권 등)하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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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리빙트러스트가 최초

    특히 최근 상속 재산 증가와 가족 간 상속 관련 법적 분쟁 건수 증가의 영향으로 유언대용신탁 시장은 확장하고 있다. 상속 관련 법적 분쟁 건수는 지난해 2776건으로 2021년(2379건)에 비해 400건 가까이 증가하는 등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상속재산도 꾸준히 증가했다.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상속재산은 44조 5169억원으로 2020년(21조 4779억원)의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상속세 납부가 확정된 인원은 2만 1193명으로 사상 최대다.

    유언대용신탁은 하나은행이 2010년 출시한 ‘하나 리빙트러스트’가 금융권 최초다. 최근 유언전용신탁은 접근성을 낮추고 자산관리·상속을 넘어 돌봄·상조 등을 연계하는 종합서비스로 진화하고 있다.

    여기에 유언대용신탁의 가입 문턱이 낮아지면서 고액 자산가뿐 아니라 중산층으로도 유언대용신탁 계약은 확장하고 있는 추세다.

    신한은행이 지난 4월 출시한 간편형 상품은 최소 가입금액 기준을 없애고 수수료도 대폭 낮췄다. 지난 8월 초에는 유언대용신탁 금전기본계약 상품을 내놨는데 역시 최저 금액 제한이 없다. 신한은행은 영업지점 창구에서 정기예금에 드는 고객에게 관리 수수료가 없는 유언대용신탁에 가입할 수 있는 우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사후 자산 분배 집행 수수료만 받겠다는 얘기다. 특히 2022년 8월엔 유언대용신탁의 위탁재산 제한을 아예 없앴다.

    국민은행은 가입금액을 1000만원으로 낮춘 간편형 상품을 지난 6월 선보였다. 10억원이었던 최소 가입금액이 크게 낮아지면서 신탁계약자가 몰려 잔액이 수백억원 늘어났다. 우리은행도 최저 금액을 1000만원으로 낮춘 상품을 이달 중에 출시한다. 이전까지는 위탁재산 10억원 이상인 고객에게만 이 상품에 가입할 자격을 줬다.

    농협은행은 금전형 상품의 경우 500만원부터 가입할 수 있고, 종합형은 최소 가입금액을 3억원에서 5000만원으로 낮췄다.

    하나은행은 단순히 사후 자산 분배에만 국한하지 않고, 고객 생애 전반에 걸쳐 신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치매 발병 전에 미리 유언대용신탁을 통해 재산 관리 방식을 계약해두고, 발병 이후에는 법원 절차와 연계해 성년후견지원신탁을 진행할 수 있다. 전담 조직도 속속 갖추고 있다. 하나은행은 유언대용신탁 전문가로 구성된 ‘시니어마스터’ 조직을 신설해 관련 업무를 전담하고 있으며, 우리은행은 ‘가족신탁팀’에서 유언대용신탁을 비롯한 각종 신탁 관련 법률 및 세무상담을 지원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시니어 전담 컨설팅센터 ‘KB골든라이프센터’를 운영 중이며, 신한은행은 ‘쏠메이트라운지’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금융업계의 한 관계자는 “부양가족이 없는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치매 등에 대비해 은퇴 이후 자산 설계에 나서려는 중장년층도 늘어나고 있다”며 “향후 금융권의 유언대용신탁 상품에 대한 인기가 증가해 유언대용신탁이 대중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때 공공신탁제도 도입을 공약한 바 있다. 보건복지부는 시법사업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도 올해 말까지 관련 대책을 포함한 제5차 기본계획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전문가들은 신탁이 활성화되려면 세제 지원과 제도 정비가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탁 재산에 대해 민법상 유류분(법정상속인에 대한 최소한의 상속분)을 인정할지에 대해선 여전히 법원의 판결이 엇갈린다. 신탁법·민법 간 정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지난 2022년 ‘신탁업 혁신방안’을 통해 후 견원·장애인 신탁 등 소위 ‘복지신탁’을 활성화하는 내용을 담았는데, 법제 정비는 멈춘 상태다. 서정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신탁이 대중화된 일본의 경우처럼 교육원·결혼자금 등 특정 목적에 대해 상속세나 증여세를 비과세하고, 병원·요양비 등 복지 목적의 신탁은 과세 이연이나 공제 확대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김병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1호 (2025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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