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기업 해외 인수 ‘반토막’ 몸 사리다 글로벌 경쟁력 발목 잡히나

    입력 : 2025.10.27 10:4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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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대기업들의 해외기업 인수(M&A) 금액이 최근 몇 년 새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고 신사업 기회를 확보하려면 국경을 넘는 투자가 필수지만, 국내 재계는 몸을 사리며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해외에서는 미국·중국·일본의 대기업들이 적극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글로벌 위상을 강화하고 있는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해외 M&A, 절반 이하로 뚝

    크로스보더 M&A 전문 사모펀드(PEF)인 SJL파트너스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해외 M&A 규모는 2017년 161억달러, 2019년 169억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2023년에는 65억달러, 지난해에는 69억달러에 그쳤다. 불과 4~5년 사이 반토막 난 것이다.

    올해 들어 삼성전자가 2017년 이후 8년 만에 독일 플랙트그룹을 2조 3725억원에 인수했고, 크래프톤이 베인캐피털재팬으로부터 일본 ADK그룹을 7036억원에 인수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상반기에 이뤄진 ‘빅딜’은 이 두 건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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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하면 위축세가 뚜렷하다. 2020~2021년 크로스보더 호황기에는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90억달러), 넷마블의 스핀엑스 인수(22억달러), 하이브의 이타카홀딩스 인수(11억달러), 현대차그룹의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약 9억달러) 등 굵직한 거래가 연이어 성사됐다. 국내 M&A 전체 시장 규모도 축소됐다. 과거 연간 70조원대까지 올라섰던 거래 규모가 현재는 30조원대에 머무르고 있다. 국내 기업끼리의 인수합병조차 주저하는 상황에서, 해외 기업을 겨냥한 공격적인 인수는 더욱 어려운 환경이라는 분석이다.

    복합적 원인: 환율·유동성 악화·실패 경험

    IB(투자은행) 업계는 해외 M&A 위축의 단기적 원인으로 환율을 꼽는다. 2023년 이후 원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국내 기업이 해외 기업을 사들일 때 지불해야 하는 달러 비용이 늘어나 부담이 커졌다는 것이다.

    재무 여건 악화도 중요한 요인이다.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석유화학 계열사를 보유한 대기업들이 직격탄을 맞았고, 반도체·2차전지 등 주력 산업에서도 불황이 이어졌다. 이에 SK·LG·GS·효성·DL 등 주요 그룹들은 잇따라 계열사 매각이나 자산 유동화에 나서고 있다. 특히 SK와 롯데, DL, 효성 등은 석유화학 계열사 실적 악화로 자금 조달 압박을 받으며, 그룹 지주회사 지급보증을 전제로 한 자산 유동화까지 활용하고 있다.

    여기에 해외 인수 실패 경험이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다. 대표 사례는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다. SK하이닉스는 2020년 10월 이사회 결의를 통해 90억달러(약 11조원)에 달하는 역대 최대 규모 인수를 단행했지만, 미·중 갈등 속 중국 다롄 공장의 장비 반입 차질로 계획대로 영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2023년까지 누적 손실이 7조원에 달했고, “역대 최대 딜이 오히려 대규모 손실을 안겼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IB업계 관계자는 “실패 경험이 쌓이다 보니 국내 대기업 경영진들이 해외 인수에 선뜻 나서기 어려운 분위기가 됐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국내 대기업 경영이 3·4세 오너 체제로 넘어가면서 ‘기업가 정신’이 약화했다고 지적한다. 또 다른 IB업계 관계자는 “해외 기업을 인수한다는 것은 그만큼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데, 현 오너 세대는 보신주의적 경영에 익숙하다”며 “특히 해외기업 인수는 본사에서 직접 통제하기 어려운 만큼, 위험 부담이 배가 된다”고 말했다.

    해외 기업들은 정반대 행보

    국내 기업들이 몸을 사리는 사이, 해외 기업들은 정반대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국경을 넘어 신사업 확장에 나섰다. 구글의 영국 인공지능 기업 딥마인드 인수, 마이크로소프트의 스웨덴 게임사 모장(‘마인크래프트’ 제작사) 인수, 시스코의 이스라엘 사이버보안업체 인수는 대표적이다. 이는 인공지능, 클라우드, 보안 등 미래 성장동력 확보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미국 사모펀드 업계도 마찬가지다. IT 특화 사모펀드인 토마 브라보(Thoma Bravo)는 영국 다크트레이스와 호주 니어맵을 수조원대 자금을 들여 인수하며 글로벌 IT 기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있다. 해외 기업 인수로 ‘사모펀드발 IT 제국’을 만들고 있다는 평가다.

    중국도 해외 M&A로 글로벌 존재감을 키웠다. 레노버의 IBM PC사업부 인수, 지리자동차의 볼보 인수, 텐센트의 라이엇게임즈(리그 오브 레전드 개발사) 인수는 대표 사례다. 비록 최근에는 미국의 제재로 제동이 걸렸지만, 중국은 한때 “글로벌 M&A 시장의 큰손”으로 불렸다.

    일본의 소프트뱅크도 마찬가지다. 손정의 회장은 2016년 영국 ARM을 320억달러에 인수하며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에서 영향력을 확대했고, 최근에는 미국 반도체 설계업체 암페어 컴퓨팅을 65억달러에 사들였다. 올해 초에는 오픈AI·오라클과 함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미국 내 데이터센터 설립을 위해 수백억 달러 투자를 예고하기도 했다.

    최근 2년을 봐도 미국 기업·사모펀드는 여전히 활발하게 해외기업 인수에 나서고 있다.

    AMD는 2024년 8월 핀란드 사일로 AI를 6억 6000만달러에 인수하며 AI 소프트웨어·모델 역량을 강화했다. IT 특화 PEF 토마 브라보는 지난해 10월 영국 다크트레이스를 약 53억달러에 인수하며 보안 포트폴리오를 확대했다.

    리사 수 AMD 대표는 역대급 자금을 투입, 핀란드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사일로 AI를 인수한다고 밝혔다. AI 소프트웨어 분야를 강화, 엔비디아를 추격한다는 목표다. <사진 연합뉴스>
    리사 수 AMD 대표는 역대급 자금을 투입, 핀란드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사일로 AI를 인수한다고 밝혔다. AI 소프트웨어 분야를 강화, 엔비디아를 추격한다는 목표다. <사진 연합뉴스>

    바이오 영역에선, 미국 생명과학 기업인 써모피셔사이언티픽이 스웨덴의 프로테오믹스(단백질체학) 전문 기업인 올링크홀딩스를 지난 2023년 31억달러에 인수했다. 인프라 영역에선 KKR 컨소시엄이 이탈리아 TIM 고정망(NetCo)을 최대 220억유로에 지난해 사들였다. 이밖에 블랙스톤은 노르웨이 최대 광고업체 아데빈타를 140억원유로에 지난 2023년 인수했다.

    특히 유럽 시장에 대한 미국 자본의 공세가 뚜렷하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유럽 사모펀드 거래 중 미국 투자자 참여가 전체 건수의 19%로 전년 동기 대비 1.1%p 늘었다. 국내 기업만 주저하는 사이, 해외 경쟁자들은 글로벌 생태계의 핵심을 차지해 나가고 있다.

    그렇다고 국내 기업이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 성공 사례가 KCC다. KCC는 2019년 SJL파트너스, 원익 등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약 3조 5000억원을 투입, 미국 실리콘 전문 기업 모멘티브를 인수했다. 이 거래로 KCC는 건자재·도료 중심 기업에서 국내 1위 실리콘 전문 기업으로 변모했다. 연결 기준 매출은 2018년 3조 7821억원에서 2024년 6조 6587억원으로 확대됐고, 해외 매출 비중도 20%에서 55%까지 늘었다. 고부가가치 전자·전기차·반도체 소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해외에도 크로스보더 M&A를 통해 성장한 사례는 많다. 미국의 이콜랩(Ecolab)은 지난 10년간 적극적인 인수를 통해 단순 세제 기업에서 글로벌 스페셜티 화학사로 탈바꿈했다. 2015년 캐나다 Ultra Fab Industries 인수는 에너지·정유 화학 분야 고부가가치 라인업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같은 전략 덕분에 이콜랩은 2014년 약 136억달러였던 매출을 2024년 약 155억달러까지 늘렸다.

    임석정 SJL파트너스 대표는 “대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하고 성장하려면 크로스보더 딜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사모펀드가 매각을 앞둔 우량 자산 가운데 밸류체인 상단 기업들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유럽 최대 공조기기 업체인 독일 플랙트그룹(Fla‘ ’ktGroup, 이하 플랙트)을 인수해, 고성장 중인 글로벌 공조 시장에 본격 진출한다.
    삼성전자는 유럽 최대 공조기기 업체인 독일 플랙트그룹(Fla‘ ’ktGroup, 이하 플랙트)을 인수해, 고성장 중인 글로벌 공조 시장에 본격 진출한다.

    중국 빈자리, 지금이 기회

    최근 미·중 갈등은 오히려 기회 요인이 될 수 있다. 미국과 유럽 각국이 전략산업 보호를 이유로 중국 기업의 자국 내 인수를 제한하기 시작하면서다. 실제로 중국의 크로스보더 딜 규모는 2016년 1679억달러에서 2022년 106억달러로 16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그렇다면 어떤 해외기업을 인수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국내 핵심 산업(반도체·배터리·전기차·원전·조선·방산) 관련해 밸류체인 상단에 있는 기업을 국내 기업이 인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를테면, 원자력 분야 생태계서 설계를 담당하는 미국 웨스팅하우스를 국내 기업이 인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웨스팅하우스는 최근 국내서 논란이 된 기업이다. 웨스팅하우스는 캐나다 사모펀드 브룩필드가 지난 2018년 46억달러를 주고 인수한 기업이다. 브룩필드는 2022년에 웨스팅하우스의 나머지 지분 49%를 캐나다 우라늄 기업 카메코에 매각했다. 웨스팅하우스는 브룩필드 재생에너지 파트너스와 카메코의 합작 회사인 브룩필드 재생에너지 파트너스가 51%, 카메코가 49%를 소유한 기업이 됐다.

    IB업계선 브룩필드가 보유한 웨스팅하우스 경영권 지분(51%)이 향후 매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사모펀드 특성상 10년 이내에 엑시트(Exit·투자금 회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웨스팅하우스 몸값이 이미 많이 올랐지만, 설계기술을 점유하며 원전산업 생태계 상단에 위치한 웨스팅하우스를 만약 인수한다면, K-원전 수출에 더욱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번에 삼성전자도 영국계 사모펀드인 트라이튼(Triton)으로부터독일 공조 기업 플랙트그룹을 사들이며, 데이터센터 공조사업 영역에 뛰어들었다. 이같이 글로벌 사모펀드들이 보유한 기업 중에, 신사업 혹은 산업 생태계 내 가장 상단에 위치한 기업들이 있다. 사모펀드가 10년 내 엑시트를 해야 하는 만큼, 이들 기업 중 괜찮은 기업을 매수하며 국내기업의 해외 경쟁력을 더욱 높이는 계기로 만드는 지혜가 필요하다.

    또 다른 IB업계 관계자는 “미국계 자금을 받은 중국 사모펀드들이 최근 중국 투자가 제약을 받으면서 한국 업체 인수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라며 “반대로 우리나라 사모펀드들도 국내 대기업과 연합해 해외기업 인수로 눈을 돌려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나현준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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