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변서 벌어지는 재건축 수주 전쟁

    입력 : 2025.07.11 15: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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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격차 압구정 삼성이 하면 다릅니다’ 시공사 입찰 공고일을 앞둔 지난 6월 9일 찾은 압구정2구역(신현대 9·11·12차). 3호선 압구정역을 내리자마자 세계 최고층 빌딩 ‘부르 즈 칼리파’와 세계 두 번째 높이 빌딩 ‘메르데카 118’이 나란히 배치된 사진과 함께 이 같은 문구가 적힌 대형 광고판을 만났다.

    압구정 신현대 아파트를 들어서면 관리사무소나 사거리 길목 앞에 현대건설 OS요원들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주민들이 지나갈 때마다 “안녕하세요. 현대건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외치며 인사를 건넨다. 현대건설은 ‘압구정 현대’ 상표까지 특허청에 출원하며 수주 의지를 다지고 있다.

    수주 열기가 과열되자 강남구청까지 나서 제동을 건 상황.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이 단지 인근에 각 사의 홍보관을 열고 조합원을 초청하자 강남구청은 공문을 통해 입찰 공고 전 조합원에 대한 건설사의 개별 접촉을 금지했다. 건설사가 자신들이 지은 아파트에 조합원을 초청해 버스를 타고 투어를 진행하는 이른바 ‘버스 투어’도 금지됐다.

    서울 압구정·용산·성수·여의도 등 서울 한강변 핵심 입지에서 대형 건설사들의 치열한 시공사 수주전이 한창이다. ‘조(兆) 단위’에 달하는 대형 사업장을 사로잡기 위해 차별화된 설계안과 주거개념이 제시되면서 4세대 아파트의 청사진을 엿볼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가장 주목을 받았던 곳은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인 강남구 압구정동. 지난 6월 18일 압구정2구역(신현대 9·11·12차) 조합이 시공사 입찰 공고를 냈다. 2조7500억원 규모의 대형 사업에 국내 1, 2위 건설사인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이 뛰어들며 치열한 경쟁을 예고했으나 출혈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삼성물산은 20일 ‘수주전 불참’ 선언을 했다.

    삼성물산은 세계적 건축 거장인 노만 포스터와 손을 잡고 혁신적인 대안 설계를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선보였다. 노만 포스터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AIA(미국건축가협회) 골드메달, 그와 함께 기존 압구정2구역 설계안을 바탕으로 ▲한강조망 극대화 ▲정교하고 효율적인 주거동 배치 ▲단지 내 주요 동선 최적화 등을 반영한 대안설계를 제안해 조합원의 주거 가치를 끌어올린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조합에서 동수와 스카이라인 등 서울시와 수차례 협의를 거쳐 마련한 기준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유지하고 외관 디자인, 커뮤니티, 조경 영역에서만 대안설계안을 마련하라고 요구하면서 삼성물산의 이 같은 계획은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통합심의를 앞둔 과정에서 동수, 스카이라인 등을 변경하게 되면 심의 과정이 늦춰져 재건축 사업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현대건설은 세계적인 건축가 토마스 헤더윅과 함께 압구정2구역의 입찰지침에 맞춰 대안설계안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삼성물산은 “당사는 압구정2구역을 전략사업장으로 선정하고 조합원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아파트 단지, 세계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단지로 건립하기 위해 글로벌 건축디자이너, 금융사 협업 등 적극적으로 입찰 참여를 준비해왔다”며 “하지만 조합의 입찰 조건을 검토한 결과 이례적인 대안설계 및 금융 조건 제한으로 인해 당사가 준비한 사항들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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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건설은 입주민들의 인프라 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대건설은 최근 압구정동 현대고 인근 유휴부지를 초등학교와 국제학교로 개발하는 업무협약을 서울현대학원과 맺었다. 압구정동이 주거·문화를 넘어 강남권을 대표하는 교육의 중심지로 변모시키겠다는 포부다. 서울현대학원은 고(故) 정주형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초대 이사장을 지낸 곳이기도 하다.

    주거 공간에 헬스케어 개념을 더한 ‘올라이프케어 하우스’ 개념도 제시했다. 이는 유전자 분석 기반의 웰니스 기술로 건강을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운동·수면·식단까지 맞춤형으로 조절할 수 있는 주거 개념이다.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병원과 즉시 연동해 대응할 수 있고 온도·습도·조도 등을 스스로 제어해 최적의 환경도 만들 수 있다.

    이를 두고 압구정 2구역이 하이엔드 아파트의 진화 방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왔다. 대단지, 고층단지, 커뮤니티 시설 고급화 순으로 진화해온 아파트가 이제 입주민의 전반적인 삶과 접목되는 ‘하나의 마을’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분양업계 관계자는 “도심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특화설계, 식사·의료·컨시어지 서비스를 IoT(사물인터넷) 기술과 접목시키는 것이 4세대 아파트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번 압구정2구역 수주전은 두 건설사가 올 상반기 맞붙었던 ‘한남4구역’ 수주전 이후 이뤄지는 ‘리턴매치’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아왔다. 지난 1월 삼성물산은 공사비 1조 6000억원 규모의 한남4구역 재개발 시공권을 현대건설을 꺾고 따낸 바 있다.

    한남4구역 수주전에서 두 건설사는 ‘제 살 깎아먹기’ 수준의 파격적인 경쟁으로 벌이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삼성물산은 총 3조원 수준의 사업비를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보증 없이 자체 조달해 보증 수수료 256억원과 사업촉진비 대출비용 1185억원을 아끼겠다고 했다. 공사비 인상 여파를 줄이기 위해 착공 전까지 물가 상승에 따른 공사비 인상분 중 최대 314억원을 자체 부담하겠다고도 했다.

    글로벌 설계사와 손잡은 화려한 디자인도 주목을 받았다. 삼성물산은 글로벌 설계사 유엔스튜디오와 협업해 한강 조망권을 극대화할 수 있는 나선형 구조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현대건설은 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 아키텍처와 손을 잡았다. 입주민 시설로는 630평 규모의 그랜드 아쿠아 파크존(현대건설), 인공지능의 주차 안내 서비스(삼성물산) 등이 제시됐다.

    이처럼 치열한 수주전은 6월 용산정비창 전면1구역을 둘러싼 포스코이앤씨와 HDC현대산업개발의 수주전에서도 재연됐다. 결국, HDC현대산업개발이 27%p 차라는 큰 차이로 포스코이앤씨를 제치고 시공권을 따냈지만, 한강 조망권을 살리기 위한 양사의 치열한 설계 경쟁, 각종 사업 리스크를 부담하겠다는 공약은 오히려 수주 경쟁을 더 부각시켰다. 포스코이앤씨는 최적의 한강 조망 설계를 위해 인공지능(AI)를 활용해 1만 2000번의 시뮬레이션을 진행했고, 이에 따라 기존 조합 설계안보다 178가구 늘어난 513가구의 한강 조망이 가능해졌다고 밝혔다. ‘에테르노 청담’ 등 고급 주택에 적용된 독일 슈코 창호를 도시정비사업에 처음으로 도입해 개방감 있게 한강뷰를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HDC현대산업개발은 포스코이앤씨 보다 더 많은 600가구의 한강 조망이 가능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444가구는 욕실에서도 한강뷰를 누릴 수 있도록 설계했다. 단지명은 한강변을 따라 단지 내 초고층 타워를 연결하는 330m 스카이브릿지를 딴 ‘더 라인 330’으로 제안했다.

    금융 비용을 둘러싼 경쟁은 더욱 치열했다. 포스코는 조합이 분양을 통해 확보한 수입 안에서 공사비를 지급받겠다고 밝혔다. 이사비 마련이나 분담금 지불 등을 위해 조합원 개개인에게 빌려주는 사업 촉진비는 정비사업 사상 최대 규모인 1조5000억원으로 약속했다. HDC현대산업개발은 주거시설은 물론 상가와 오피스 등 비주거 시설에 미분양이 생기면 이를 건설사가 떠안겠다는 파격적인 안을 제시했다. 미분양이 생기면 최초 일반분양가 또는 준공 시 감정가 중 높은 금액으로 대물 변제하는 조건이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2구역의 모습.
    서울 강남구 압구정2구역의 모습.

    건설사들이 출혈 경쟁을 감수하고서라도 수주전에 나서는 원인으로는 한강변 아파트의 높은 사업성이 꼽힌다. 같은 단지, 같은 면적이라도 한강 조망 여부에 따라 10억원 이상 가격 차이가 벌어질 만큼 한강변 아파트의 가치가 급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한강변 핵심 입지에만 한정되는 현상으로, 현재는 잠실 우성 1·2·3차와 같은 강남권에서도 시공사 단독 입찰이 이뤄지는 상황이다. 노원구 상계주공 5단지와 같은 서울 외곽에서는 시공사 유찰 사례가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올해 하반기에는 ‘한강벨트’ 재개발 최대어로 꼽히는 서울 성동구 성수전략정비구역1지구(성수1지구)는 8월 말쯤 공고를 내고 시공사 선정 절차에 돌입한다. 3014가구, 공사비 2조원 규모의 대형 사업장을 두고 GS건설, 현대건설, HDC현대산업개발 등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성수 2지구는 9월에 시공사 선정을 위한 입찰공고를 내는 방안이 유력하다.

    GS건설은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립한 설계사인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와 설계 작업을 하겠다고 밝히며 수주 의지를 보이고 있다.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독일 베를린의 신박물관 복원 프로젝트, 제임스 시몬 갤러리, 중국 상하이의 웨스트번드 미술관이 꼽힌다.

    한강 한가운데 위치한 여의도의 수주전도 주목된다. 대교아파트가 6월 입찰 공고를 내고 9월 시공사 선정 총회를 열 계획이다. 공사비 8000억원 규모인 여의도 대교에는 삼성물산과 롯데건설이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범(65층·2473가구)도 이르면 연내 시공사 선정에 나서는 가운데, 삼성물산, 현대건설, 대우건설이 뛰어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여의도 공인중개사는 “롯데건설과 대우건설이 공을 들이고 있지만,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것이 현실”이라며 분위기를 전했다.

    한편, 시공사 수주전에서 제시된 공약들은 실제 인허가 과정에서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유의가 필요해 보인다. 과거 한남2구역에서는 대우건설이 고도제한 완화 등을 포함한 ‘118 프로젝트’를 제안하며 수주권을 따낸 바 있다. 하지만 서울시가 이 같은 계획에 인허가 불가 방침을 밝히면서 프로젝트는 무산됐다. 이에 조합이 내홍에 휩싸이며 2번이나 시공사 재신임투표를 진행하는 해프닝이 벌여졌다. 서울 여의도 공작아파트에서는 대우건설 수주 당시 전용 145㎡의 펜트하우스 등의 제안이 담겼지만 현재 무산되며 주민들의 반발이 나오는 상황이다.

    수주 과정에서 ‘해외 설계사’를 내세우는 현상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해외 설계사가 참여하면 비용이 치솟는 데다 국내 아파트 설계 경험이 없어 현실과 맞지 않는 설계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서울시가 초고층 규제를 풀면서 한강변 단지들이 잇달아 해외 설계사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들이 설계했던 건물은 대부분 초고층에 초호화 빌딩”이라며 “외관 디자인을 신경 써야 하는 빌딩 설계와 내부 활용도를 고민해야 하는 주택설계 사이에 접점을 잘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위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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