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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어려운데 고액 월세 급증… 전세 ‘계륵’ 되자 월세 ‘양극화’
입력 : 2023.02.09 16:4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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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택자들의 대표적인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한 전세가 부동산 시장 침체와 함께 외면받고 있다. 전세 시장 침체 속에 월세가 각광받고 있는 가운데 초고가 월세 거래가 속속 등장하면서 월세 시장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임대차 시장에서 아파트 전세 비중은 57.5%를 기록했다. 2년 전인 2020년 68.6% 대비 10%포인트 넘게 비중이 줄어들었다. 전세의 경우 비중이 줄어든 것뿐만 아니라 거래량 역시 큰 폭으로 감소했다. 지난해 서울 주택 전세 거래량은 25만8529건으로 집계됐다. 2021년 대비 7.7% 감소한 수준이다.
거래 침체 속에 가격 역시 급락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아파트 전세 가격은 9.36% 하락했다. 부동산 시장이 꽁꽁 얼어붙으면서 2021년 상승률 5.31%에 따른 가격 상승분을 모두 반납했다. 특히 서울의 경우 지난해 12월 둘째 주부터 이달 둘째 주까지 5주 연속 전세 가격 하락률이 1% 이상 떨어지는 등 가격 급락이 지속되고 있다.
수도권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해 수도권 아파트 전세 가격 하락률은 11.25%로 전년 상승률 9.84%보다 가격이 더욱 떨어졌다. ‘입주 폭탄’이 현실화된 대구광역시의 경우 지난해에만 전세 가격이 14.31% 하락했고, 부동산 시장 상승세의 중심에 섰던 세종특별자치시 역시 전세 가격이 19.79% 하락했다.
계속되는 금리 인상과 거래 절벽 속에 전국·수도권·서울 아파트 매매·전셋값은 역대 최대 하락 행진이 이어졌다. <사진 연합뉴스> 전세 가격 하락 폭이 매매 가격 하락 폭보다 더 크게 나타나면서 일각에서는 ‘전세 소멸’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 아파트 매매 가격은 7.20% 하락해 전세 가격 하락에 비해 다소 하락 폭이 낮게 나타났다. 수도권 역시 매매 가격 하락 폭이 9.14%로 두 자릿수 하락률을 기록한 전세보다는 선방한 것으로 조사됐다.
부동산 시장 침체에 전세 시장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부동산 시장 상승기 때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부동산업계에서는 세입자들이 집주인들로부터 ‘역월세’를 제안받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역월세는 집주인이 떨어진 전세 가격이 하락하면 떨어진 보증금 차액만큼의 이자를 세입자에게 지불하는 방식이다.
집주인들 ‘역월세’ 제안도예를 들어 전세 가격이 하락했는데,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하락분만큼 돌려주지 못하면 세입자가 계속 거주하는 조건으로 하락 금액에 대한 이자를 세입자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 주택 매매 가격이 전세보증금보다 더 낮아지는 ‘역전세’를 우려한 세입자가 전세를 구하면서 ‘집주인 면접’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수개월 동안 매물로 내놓아도 세입자를 좀처럼 찾기 힘든 상황에서 전세 계약을 하겠다고 나선 이가 있는 만큼 ‘울며 겨자 먹기’로 ‘면접’까지 봐야 하는 셈이다.
이같은 전세 시장 침체를 파고든 것이 월세 시장이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서울에서 전세 거래 비중이 줄어드는 동안 월세 비중은 42.5%까지 치솟았다. 2020년 31.4% 대비 11.1%포인트 증가한 사상 최고 수준이다. 월세 선호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매일경제신문이 ‘2023년 부동산 시장 설문조사’를 통해 전문가 52명에게 ‘월세 선호 현상’이 올해에도 지속될 것인지 물은 결과 88.2%인 45명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지난해 임대차 시장에서는 월세가 전세를 처음으로 역전하기도 했다. 대법원 등기정보광장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확정일자를 받은 임대차 계약 269만8610건 가운데 월세는 51.8%인 139만9201건을 기록했다. 세입자들 사이에서는 전세 계약 기간이 끝나는 것에 맞춰 월세로 전환하는 것을 고민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서울에 사는 40대 직장인 B씨는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하더라도 지금같이 전세 가격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굳이 가격을 올려 계약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며 “금리 인상으로 이자 부담이 커지는 만큼 차라리 월세로 돌리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부동산 시장이 상승하던 2021년에는 세입자들이 어쩔 수 없이 월세로 밀려난 측면이 있다”며 “반면 지난해의 경우 거듭된 금리 인상으로 전세대출에 대한 이자를 부담하는 것보다 차라리 월세를 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월세 비중이 증가하면서 ‘고가 월세’ 거래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경제만랩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아파트 월세 거래 41만5445건 가운데 월세 100만원 이상 거래는 8만812건으로 집계됐다. 월세 거래 가운데 약 5건 중 1건이 100만원이 넘는 계약이 이뤄졌다.
‘월세 100만원 이상 아파트’ 거래는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00만원 이상 월세 거래는 2017년 2만4015건을 시작으로 2018년 2만4395건, 2019년 2만6051건, 2020년 3만2668건까지 증가했다. 2021년에는 6만4712건까지 급증했고, 지난해 들어 증가 폭이 더욱 확대됐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3만3116건으로 가장 많다. 경기도 2만7663건, 인천 5141건, 부산 3632건, 대구 2672건, 충남 1266건, 경남 1062건 등이 뒤를 이었다.
‘초고가 월세’ 거래 역시 늘어나고 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조회시스템에 따르면 서울에서 월세 금액이 1000만원 이상인 아파트 거래는 2022년 146건으로 집계됐다. 2021년 73건 대비 두 배 증가했고, 2020년 23건과 비교하면 6배 넘게 늘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PH129’ 전용면적 273.96㎡는 지난해 3월 보증금 4억원·월세 4000만원에 계약이 이뤄지며 전국에서 가장 높은 월세 금액을 기록하기도 했다.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한남더힐’ 역시 초고가 월세 거래가 빈번하게 이뤄지는 아파트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한남더힐의 28건 전세 계약(1월 15일 기준) 가운데 1000만원 이상 월세 거래는 절반인 14건을 집계됐다. 가장 비싼 월세 금액은 2500만원이다. 이 단지에서는 전용면적 233㎡, 235㎡에서 각각 2건, 1건의 2500만원 월세 거래가 이뤄졌다.
경기도에서는 고양시 일산동구에 위치한 ‘킨텍스원시티 3블럭’ 전용면적 148.93㎡가 보증금 3억5000만원·월세 1200만원에 월세 계약이 이뤄졌다. 인천의 경우 연수구의 ‘더샵퍼스트월드’ 전용면적 179.169㎡가 지난해 9월 보증금 1억2000만원·월세 500만원에 계약됐다.
황한솔 경제만랩 리서치연구원은 “금리 인상으로 전세대출 이자 부담이 커진 데다 전세보증금 사기 피해 우려 등으로 전세보다 월세를 선호하는 임차인이 늘어나 고액 월세 아파트 거래도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 노원구 아파트 밀집지역. 거듭된 금리 인상 기조 역시 월세 선호 현상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1월 13일 기준금리를 3.25%에서 3.5%로 0.25%포인트 인상했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임대차 시장은 매각 지연에 따른 임차 매물 전환과 입주잔금 마련을 위한 전세 매물 증가 외에도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전세 대출 이자 부담이 월세 이율의 상대적 매력도를 높일 것”이라며 “월세 거래 비중 증가는 이어지고, 전세 가격 하락도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깡통 전세’와 같은 전세 피해를 우려하는 임차인이 증가하는 점도 무주택자들이 월세로 눈을 돌리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서울 강서구의 한 공인중개사는 “임차인들이 전세를 기피하는 상황에서 대출금리가 워낙 높아 차라리 보증금을 낮추고 월세를 더 주려는 경향이 생겼다”고 밝혔다. 월세를 선호하면서 월세 평균 가격 역시 최고 수준을 기록 중이다.
깡통 전세 우려도 한몫지난해 11월 기준 전국 월세 평균 가격은 68만3000원으로 집계가 시작된 2020년 7월 66만1000원 대비 3.3% 증가했다. 부동산 전문 리서치 업체 리얼투데이가 한국부동산원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11월 전국 전월세 전환율은 5.33%를 기록했다. 이는 2020년 7월 집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전월세 전환율은 전세 보증금을 월세로 전환할 때 적용하는 연 환산 이율이다. 월세 선호 현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 가격이 하락 조짐을 보이면서 ‘양극화’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전국 월세 가격은 지난해 11월 0.11% 하락했다. 월세 시세가 전월 대비 하락한 것은 2019년 10월 이후 3년 1개월 만이다. 지난해 중순부터는 상승세가 둔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전국 월세 가격 변동률은 지난해 8월 0.15% 상승했지만 전월 상승률 0.16% 대비 상승률이 0.01%포인트 감소했다. 이후 같은 해 10월까지 2개월 연속 상승률이 둔화되는 모습을 보이다가 지난해 11월 하락 전환했다.
월세 가격이 하락한 것은 전세 시장 둔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전세 가격이 하락하는 동시에 매물이 적체되자 수요자들이 전세에 다시 관심을 보이면서 월세 시세가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수요가 밀집된 지역은 월세가 상승세를 보일 것”이라면서도 “수요가 뒷받침되지 않는 지역은 결국 하락하면서 격차가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진태인 집토스 아파트중개팀장은 “미국발 금리 인상과 채권 시장의 돈맥경화로 대출금리가 치솟자 대출액을 축소하고 월세로 갈아타고자 하는 문의가 전년 대비 20% 이상 늘었다”면서 “전세의 월세화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무리한 대출을 줄이고, 전세가율이 낮고 안전한 주택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정석환 매일경제 부동산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