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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조원 풀었지만, 자금경색 여전 “우량채가 돈 빨아들여 내년 초까진 돈맥경화”
입력 : 2022.12.05 16: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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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자금 시장의 ‘돈맥경화’ 현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인다. 강원도의 레고랜드 ABCP 지급보증 미이행으로 촉발된 자금 시장 경색 현상은 최근 흥국생명의 영구채 콜옵션 행사 연기 발표 등 일련의 사건이 이어지며 악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두 가지 사안이 기폭제(Trigger) 역할을 했지만 최근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시장금리의 급격한 상승, 채권 시장과 단기 자금 시장의 수급 불균형 문제 등 다양한 원인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내 채권 및 자금 시장의 위험이 커지는 가운데, 이후 금융당국이 각종 유동성 완화 조치를 내놓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시장에 본격적인 영향을 미칠 경우, 자금경색 현상이 다소 완화될 가능성 있다고 예상하면서도 최근의 긴축 재정 움직임을 생각하면 적어도 내년 초까지는 이러한 시장의 자금경색 기조는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다.
추경호 경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과 한국은행총재를 비롯한 경제 관련 부처장들이 비상 거시경제 금융회의를 마치고 회의 내용을 브리핑하고 있다. 소방수로 나선 금융당국의 부족한 수압금융당국은 즉각 채권 시장 안정을 위한 유동성 공급 조치를 지속해서 내놓기 시작했다.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등 주요 금융당국의 수장들은 일련의 회사채 시장 및 단기 금융 시장의 불안심리 확산, 그리고 유동성 위축을 막기 위해 기본적으로 50조원 규모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는 조치를 공개했다.
먼저 금융당국은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에 20조원을 긴급 투입했다. 일단 1조6000억원 규모의 가용재원을 우선 투입, 시공사 보증 PF-ABCP 등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을 재개했다. 추가 펀드 자금 요청(Capital call) 작업에도 속도를 냈다. 기존 연내 집행 예정이던 ‘캐피털 콜’의 본격적 시행 시점을 기존 내년에서 이달 초로 앞당기고 필요시 추가적인 지원에도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유동성 완화 조치에는 금융권의 역할도 강조됐다. 실질적으로 자금을 공급하는 주체가 금융사인 만큼, 이들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자금경색 위기를 극복하기 어려울 수 있는 당국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에 대한 하나로 한국은행이 지난 10월 21일 자금난을 겪는 증권사 등을 지원하기 위해 2조5000억원 규모의 환매조건부채권(RP)을 사들여 시중에 돈을 풀었다. 자금 시장 경색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그 결과 채권 시장에 단기 초우량 크레디트 물량을 중심으로 유효 매수세가 유입되고 있지만 일부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 금리는 최고 연 20%대까지 급등하는 등 불안감은 여전한 상황이다. 한국은행이 2조5000억원 규모의 RP 14일물 매입을 시행한 결과 모두 3조6000억원 규모가 응찰했는데, 평균 낙찰금리는 연 3.29%였다. 이날 매입한 대상 증권의 환매일은 12월 5일이다.
정부는 중소형 증권사를 위해 1조8000억원 규모 PF ABCP(자산유동화기업어음) 매입 프로그램도 가동했다. 다만 시장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10월 21일 기준 만기 기업어음(CP) 금리는 5.36%로 다시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일 5.33%보다 0.03%P 올랐다. 회사채 투자심리 부진도 여전하다. 국고채 3년물과 신용등급 AA- 회사채 3년물 간 차이인 신용 스프레드는 1.654%P까지 벌어졌다. 통상 스프레드가 커질수록 회사채 투자 위험이 높은 것으로 간주한다.
같은 날 금융위원회는 ‘제2의 채안펀드’를 가동했다. 9개 대형 증권사가 500억원씩 모은 4500억원(중순위 25%)에, 산업은행·증권금융이 각각 4500억원씩(선순위 25%) 더하고, PF ABCP 매입을 신청하는 증권사가 4500억원(후순위 25%)을 마련해 조성한 1조8000억원을 시장에 풀기 시작한 것이다.
일련의 정부의 총력전에도 불구하고 최근 PF ABCP 금리는 최고 연 20%까지 올랐다. 9월 초 3~4% 내외였던 PF ABCP 금리는 레고랜드 사태가 있었던 10월 이후 급격히 상승해 10월 중순 7~9% 수준까지 올랐다가 11월 들어서는 두 자릿수 금리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 11월 14일 특수목적회사(SPC) 파인우노가 발행하고 GS건설이 신용보강한 다음달 23일 만기 ABCP(A2+ 등급)는 연 20.3∼21%, 태영건설의 내년 1월 만기 ABCP(A2 등급)도 연 15% 넘는 금리에 거래됐다.
다만 정부의 채안펀드가 시장에 개입하면서 급한 불은 껐다. 최근 만기를 하루 앞둔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이 PF 자산유동화증권 차환에 성공했다. 총규모 5423억원에 만기 83일물(2023년 1월 19일)로, 금리는 최고 12% 안팎으로 발행됐다. 기존 발행 금리(3.55~4.47%)보다 대폭 상승했다. 채안펀드도 자산유동화증권 매입에 참여했으며, 둔촌주공 시공사업단 중 HD현대산업개발을 제외한 현대건설(2005억원), 롯데건설(1710억원), 대우건설(1708억원)이 대출채권에 대한 연대 보증을 했다.
돈맥경화 단기 해결 어려워전문가들은 돈이 들어간다고 해도 갑자기 시장의 방향성이 바뀌기는 힘들다고 봤다. 단기적으로 자금 시장 경색에 대한 위험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여건들이 개선되지 않는 이상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중론이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레고랜드발(發) 자금경색이 발생한 이후 크레디트 채권 시장이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며 “‘50조+α’와 같은 정책 당국의 적극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시장 참가자들의 크레디트 채권에 대한 접근은 조심스럽기만 하다”고 분석했다. 레고랜드 사태 직후에 나타났던 급격한 경직 현상은 지금도 조금씩 완화되고 있으나, 기업들의 자금 조달이 원활한지 확인할 수 있는 지표인 크레디트 스프레드가 본격적인 축소나 안정세를 보이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고비들이 많다는 것이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일정 자금이 들어간다고 해서 갑자기 경색이 풀리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통상 자금 수요와 공급에 접점이 만들어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급격하게 많은 자금이 투입되지 않는 한 경색의 방향성이 단시간 내 바뀌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지난 10월 이후 연이어 유동성 공급 대책을 내놓으면서 PF ABCP 차환도 조금씩 이뤄지고 있어 단기 자금 경색은 점진적으로 진정 국면에 들어섰다. 다만 건설사와 증권사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커지고 PF ABCP 자체에 대한 의구심과 투자 선호도는 저하된 상황이다. 이에 따라 PF ABCP 차환은 여전히 쉽지 않다는 전망이 다수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12월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PF 유동화증권 규모는 약 34조원에 이른다.
김성노 BNK투자증권 연구원은 “한국 신용 스프레드는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로 상승한 상태”라며 “10월에 발표된 정부 주도의 유동성 지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금 시장 불안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연말까지 CP,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단기사채 만기가 집중된 시기라는 점에서 올해 마지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 인상보다는 실질적인 유동성 지원 대책이 나올 것인지에 더 관심이 커지는 이유”라며 “유동성 지원 대책이 나와야 연말까지 자금 시장 불안이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증권사들이 보증한 PF ABCP는 20조2867억원 규모이며 중소형 증권사가 보증한 A2 등급 ABCP 1조1244억원이 연말까지 만기가 돌아온다. 건설사들이 지급보증 등을 제공한 PF ABCP의 만기는 비교적 분산된 편이지만 증권사들이 신용이나 유동성을 공여한 PF ABCP는 73.5%가 연내 만기가 도래한다.
김명실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정책자금을 통한 ABCP 매입만으로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 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된 부동산 경기 침체는 수도권까지 전이된 상황”이라며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조절하고 내년 초 채권 시장으로의 자금 유입이 원활해지기 전까지 단기 자금 시장의 경색이 지속될 수 있다”고 전했다.
강원도가 레고랜드 조성을 위해 지급 보증한 205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이 2022년 10월 부도 처리되면서 채권 시장 경색 등 금융 시장에 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김정주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 역시 “지금의 위기가 금리 인상과 그에 따른 금융 시장 환경 변화 때문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나, 과도한 부동산 규제, 예측하지 못한 원자재 가격 상승, 부동산 PF 구조 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촉발됐다”며 “지금의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부동산 PF 시장-부동산 시장-금융 시장 전반의 안정화 관점에서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단기적인 자금 시장 경색 완화가 어려운 만큼 장기적·추가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김영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금리 인상이 일차적인 원인이며, 한전의 한전채 대규모 순발행과 은행의 은행채 발행 확대 등이 시중 자금을 빠르게 흡수했다”며 “근본적으로 한전채, 은행채 등 우량채권의 순발행 규모를 축소하여 근본적으로 자금 쏠림을 완화해줄 수 있는 정책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적자가 확대되고 있는 한국전력이 자금 확보를 위해 한전채를 발행하고 각종 규제 비율 준수를 위해 은행들이 은행채 발행을 확대하면서 시중의 자금을 빠르게 흡수한 것을 자금 시장 경색의 한 원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금융지주사들은 한목소리로 자금 시장 위축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돼온 은행채 발행은 당분간 자제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은행채 발행을 줄여 상대적으로 위축된 회사채 발행을 늘리고 이를 기반으로 산업계 전반에 자금이 돌 수 있게끔 유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김 연구위원은 “자금 공급 측면에서 채권 시장 및 자금 시장에 자금을 공급하는 투자자들에게 대한 한시적인 인센티브를 줄 수 있을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7호 (2022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