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울트라 사이클 도래하나 AI가 바꾼 구조적 수요 전환

    입력 : 2025.12.16 1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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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계 인공지능(AI) 투자 폭증이 메모리 시장 판도를 통째로 바꿔놓고 있다. 고대역폭메모리(HBM)에 집중된 생산 공정은 범용 D램·낸드의 공급 여력을 빠르게 줄였고 AI 서버 확산은 다시 이들 범용 제품의 수요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공정 전환과 수요 급증이 동시에 맞물리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내년 물량은 사실상 ‘완판’에 들어갔다. AI가 촉발한 이번 구조적 초호황은 과거의 단기 사이클과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평가가 업계에서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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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용 메모리까지 번진 ‘수요 대전환’

    전 세계 AI 인프라 확대는 메모리 수요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며 HBM에서 범용 메모리로 이어지는 연쇄적 품귀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대규모 AI 모델을 학습·추론하기 위한 데이터센터는 기존 서버 대비 수십 배의 연산·대역폭을 요구한다. 이에 엔비디아·AMD 등 주요 가속기 업체의 시스템 설계는 HBM3E와 차세대 HBM4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미 일부 클라우드 기업들은 차세대 서버 아키텍처를 새롭게 재설계하고 있으며 이는 메모리 수요의 확대 방향성을 장기적으로 고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HBM이 극도로 정밀한 공정과 고객사별 까다로운 품질 검증을 필요로 해 단기간에 생산을 크게 늘릴 수 없다는 점이다. 글로벌 메모리 제조사들은 HBM 라인 가동률을 극대화하고 있고, 그 결과 생산능력은 고성능 제품군으로 쏠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선단 공정의 실제 가용량은 절대적으로 제한되며 공정 전환 속도 역시 HBM 쪽으로 우선 배분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서 수요는 범용 메모리 전반으로까지 확산되는 중이다. AI 서버는 HBM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대용량 D램과 SSD 기반 낸드플래시는 안정적 학습·추론 운영에 필수다. 모델 파라미터 저장과 중간 연산 데이터 보관도 범용 메모리가 담당한다. 서버 한 대당 D램 탑재 용량은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이고, SSD 수요도 HDD 대체 속도가 빨라지면서 빠르게 늘고 있는 이유다. 최근 엔비디아가 일부 신제품에 범용 D램을 채택한 사례까지 겹치며 일반 D램은 AI 확산의 직접적 수혜 영역으로 편입됐다.

    SK하이닉스의 6세대 고대역폭 메모리인 HBM4 <사진 연합뉴스>
    SK하이닉스의 6세대 고대역폭 메모리인 HBM4 <사진 연합뉴스>

    반면 범용 D램·낸드 생산능력은 확대되지 못한 채 오히려 축소되고 있다. HBM 투자 확대 과정에서 공정 전환이 지연되고 구형 제품군 생산도 줄었다. DDR4·DDR5 가격은 반년 새 크게 뛰어 2016~2018년 슈퍼사이클 당시의 상단을 넘어섰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장조사업체들은 이 가격 상승을 단순 재고 조정이 아닌 구조적 수요 증가로 진단하고 있다. 특히 최근 가격 흐름은 고객사 ‘선확보 경쟁’과 맞물려 있어, 과거의 단기 변동과 성격이 다르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일부 고객사의 경우 내년 물량까지 선주문이 들어오는 상황이다. 범용 메모리까지 조기 소진되는 이례적 흐름이 나타난 것이다. 결국 HBM 중심 수요 증폭이 생산 공정을 재편시키고, 그 재편이 다시 범용 제품까지 확산시키는 이중 효과가 지금의 구조적 초호황을 만든 셈이다.

    생산은 묶이고 수요는 폭발

    AI 연산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글로벌 메모리 시장은 사실상 ‘공급 묶임’ 상태에 들어섰다. HBM 중심으로 공정이 이동하면서 범용 D램·낸드 생산 여력이 줄었고, 여기에 주요 고객사들의 조기 선점 전략이 더해지고 있다. 일부 고객사는 최종 서버 출시 일정에 맞춰 메모리를 확보하기 위해 발주 시점을 앞당기고 있으며, 데이터센터 자산운용사들은 “메모리 확보가 전체 프로젝트 일정의 핵심 변수가 됐다”고 전한다.

    병목의 핵심은 HBM의 특성이다. HBM은 고객사별 품질인증(Qualification)이 필수이기 때문에 생산을 빠르게 늘리기 어렵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HBM 전용 라인의 가동률을 극대화하고 있고, 1c·1b 기반 선단 공정의 상당 부분을 HBM 생산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다. 반면 범용 제품은 구형 라인 중심의 제한적 운영만 가능해 생산 증가 여지가 작다. 시장 전체 공급량이 제조사 의지가 아니라 공정 구조 자체에 의해 제한되는 상황이다.

    이런 공급 제약 속에서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들은 2025~2026년 데이터센터 확장 계획을 앞당기며 부품 조달 안정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일반 메모리(D램·낸드)까지 장기계약을 체결하고, 일부 기업은 2026년 물량까지 구매 주문(PO)을 발행하고 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재고로 쌓이던 제품군이 조기 매진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업계에서는 “이제는 메모리가 ‘있으면 쓰고 없으면 못 쓰는’ 자원이 아니라, 프로젝트 초기 단계에서 선점해야 하는 필수 요소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결국 양사의 완판 체제는 단기 반등이 아니라 생산 공정과 수요 구조가 동시에 바뀐 데서 비롯된 구조적 현상으로 풀이된다.

    생산 측면에서는 공정 미세화와 HBM 전환이 범용 제품 공급을 물리적으로 제한하고, 수요 측면에서는 AI 서버·자율주행·로봇 등 신규 시장이 D램·낸드를 흡수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 조합 때문에 공급 긴축은 내년 이후에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가 나온다.

    2027년까지 이어지는 구조적 상향곡선?
    삼성전자 평택공장 내부 모습.
    삼성전자 평택공장 내부 모습.

    AI가 촉발한 이번 메모리 슈퍼사이클은 과거와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이며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거 업무 현황이 1~2년 호황 뒤 공급 급증으로 조정에 들어가는 전형적 재고 순환형이었다면, 지금은 AI 인프라 확대라는 구조적 수요 요인이 중심이다.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과 생성형 AI 서비스 업체들은 향후 2~3년간 대규모 데이터센터 투자를 확정해 놓은 것이 배경이다. 시장은 단순 가격 상승이 아니라 수요 기반 재편이라는 구조적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메모리 수요는 개별 제품 가격보다 인프라 구축 속도와 더 긴밀히 연결되기 때문에, 단기적인 수급 변화에 휘둘리기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핵심은 HBM 수요다. AI 서버는 기존 대비 수십 배의 메모리 대역폭을 요구해 HBM3E와 HBM4가 수요 중심에 섰다. 그러나 HBM은 고객사별 품질 인증을 필요로 하는 ‘반 맞춤형’ 제품이기 때문에 갑자기 공급을 급격하게 늘릴 수 없다. JP모건 등 글로벌 투자기관들이 이번 사이클이 최소 2027년까지 이어질 것이라 전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CAPA 증설 자체가 기술적·물리적 제약을 받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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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서버 고객들이 2027년 물량까지 선계약을 추진하고 있고 이로 인해 PC·모바일용 메모리 공급이 제한되고 있다”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가격 협상력이 강화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업계 관계자는 “수요의 기저가 학습·추론 서버뿐 아니라 자율주행, 로봇, 엣지 AI까지 확장되고 있다”며 “2027년까지 이어지는 ‘울트라 슈퍼사이클’ 시나리오는 단순 낙관론이 아니라 시장 구조 자체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박소라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3호 (2025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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