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유화학 구조조정, 제자리걸음...정부 주도 ‘화학적 통합’ 요구 높아져

    입력 : 2025.08.18 15:51:41

  • 대산석유화학단지 전경
    대산석유화학단지 전경

    위기 산업이라 불리는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구조조정 논의가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며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과 경쟁력 강화라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주요 산업단지별로 나프타분해시설(NCC)의 과잉 설비 문제가 반복해서 지적되고 있음에도 기업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NCC 통폐합 논의는 번번이 제동이 걸리는 실정이다. 업계 내부에는 각 산업단지별로 적어도 한 곳 이상의 NCC 설비를 통폐합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일정 부분 형성돼 있다. 하지만 실제 자율적인 구조조정 결론까지 도달하는 데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정부의 정책적 개입과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공급과잉, NCC 통합 진전 없어
    사진설명

    대산 석유화학단지는 현재 국내 대표 석유화학 기업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NCC 설비 과잉 문제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지역 중 하나다. 이곳에서는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이 5대 5로 합작해 설립한 HD현대케미칼이 롯데케미칼의 NCC 시설을 인수해 물리적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두고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이른바 ‘물리적 통합’이 추진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두 기업 중 한 곳이 상대방의 설비 및 인력 등을 실질적으로 흡수해 운용 효율을 극대화하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합병을 위한 조건에 입장 차가 있어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고용 안정성 보장과 인수 대가로 일정 수준 이상의 현금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HD현대케미칼은 이러한 조건이 지나치게 과도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특히 HD현대케미칼의 모회사인 HD현대오일뱅크는 해당 NCC의 가동률을 점진적으로 줄여가며 중장기적으로 사업을 재편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어,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면서까지 부담스러운 인수에 나설 유인이 부족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결국 협상은 지지부진한 상태로 이어지고 있으며, 산업단지 내 구조조정의 실질적 첫걸음 조차 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대표 석유화학 생산 거점 중 하나인 울산 석유화학단지도 구조조정 논의에서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특히 2개의 NCC를 보유한 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 간 통합 가능성이 한때 시장의 기대를 모았지만, 여러 복합 요인이 얽히며 실현 가능성은 점차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구조조정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은 있으나, 실제 결단과 실행까지 이어지기에는 재정적 제약과 미래 공급 과잉 우려 등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다는 평가다.

    업계 안팎에서는 공급 과잉 시대를 맞아 울산 지역의 NCC를 하나로 통합하거나 생산 조정을 통해 과잉 생산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일정 부분 형성돼 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전 세계 석유화학 시장이 중국발 공급 쇼크, 경기 둔화, 친환경 전환 등의 영향으로 심각한 수익성 악화를 겪으면서 구조조정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이 과정에서 거론된 시나리오가 바로 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 간의 흡수합병 또는 공동 운용 방안이다. 가장 큰 장애물은 재정적 여력이다. SK지오센트릭은 최근 석유화학 부문 부진으로 인해 실적이 크게 악화됐다. 한 때 연간 수천억 원의 영업이익을 자랑하던 SK지오센트릭은 2022년 이후 급격히 내리막을 걷고 있으며, 일부 분기에는 적자 전환까지 겪었다. 글로벌 수요 위축, 고정비 부담, 그리고 플라스틱 사용 규제 강화 등 대외적 악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에 따라 인수합병(M&A)을 단행할 만한 충분한 유동성과 투자 여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태다. 대한유화 역시 설비의 고도화나 수익 다변화를 위한 대규모 투자 여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2020년대 들어 코로나19 팬데믹과 원유 가격 급등락, 물류비용 증가 등의 악재가 겹치며 단가 경쟁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결국 두 회사 모두 각자의 이해득실을 따졌을 때 구조조정 추진에 선뜻 나설 수 있는 유인이 부족하다는 것이 업계 중론이다.

    이처럼 기업 차원의 구조조정 동력 자체가 약한 상황에서, 울산 NCC 통합 논의에 추가적인 압박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바로 에쓰오일의 ‘샤힌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사우디 아람코가 최대 주주인 에쓰오일이 9조원 이상을 투입해 울산 온산공단에 건설 중인 초대형 석유화학 복합단지다. 2026년 상업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고, 연간 180만t 규모의 에틸렌을 생산할 수 있는 NCC 설비를 포함하고 있다. 이 에틸렌 생산 규모는 국내 전체 NCC 설비 증가분 중에서도 단일 설비 기준으로 가장 큰 수준에 속한다. 하지만 이미 국내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고 있는 가운데, 추가적인 대규모 생산 능력 투입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업계 전반의 공급 과잉 문제를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실제로 샤힌 프로젝트가 본격 가동되면 울산 지역에서만 연간 300만t 이상의 에틸렌이 쏟아지게 되며, 기존 NCC 설비를 운영 중인 기업 입장에서는 채산성 유지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샤힌 프로젝트는 단순한 공급 확대에 그치지 않고, 최첨단 설계와 공정 혁신을 기반으로 고효율·저탄소 생산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이는 상대적으로 노후화된 기존 NCC 설비들과의 경쟁력 격차를 부각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따라서 울산 NCC 구조조정 논의는 기존 두 기업 간의 협상 문제를 넘어 향후 샤힌의 상업 가동 이후까지 고려한 중장기 전략 수립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가 중장기 로드맵을 제시하고, 일정 수준의 재정적 유인과 법·제도적 정비를 병행하지 않으면 산업 재편은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여수산단의 빅딜, 가능할까

    국내 최대 규모의 석유화학 산업단지인 전남 여수산단의 최대 관심사는 롯데케미칼과 LG화학 간의 NCC 구조조정 성사 여부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대기업 간의 통합 시나리오, 이른바 ‘빅딜’이 논의 테이블 위에 오르면서 석유화학 업계는 물론 지역 사회 전반에 걸쳐 예의주시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두 기업은 모두 여수 지역에 각각의 NCC 설비를 운영하고 있으며, 업계 내부에서는 이들의 설비가 기능적으로 상당 부분 중복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공급 과잉 시대를 맞아 생산설비 효율화가 절실한 상황에서, 중복된 NCC를 통합하거나 가동률을 조절하는 등의 구조조정은 산업 경쟁력 회복을 위한 필수 과제로 여겨진다. 그 연장선상에서 ‘롯데케미칼-LG화학 간 NCC 통합’이라는 빅딜 시나리오가 최근 들어 다시금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두 석유화학 회사는 여수 국가산업단지에 대규모 생산 거점을 확보하고 있으며, 에틸렌, 프로필렌을 중심으로 한 범용 석유화학 제품을 대량 생산해 국내외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이들은 각기 독립적인 설비, 인력, 공급망을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최근 시장 환경 변화로 인해 서로의 경쟁보다는 협업 혹은 효율적 조정이 필요한 시점에 다다랐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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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NCC 전체 생산능력은 이미 연간 1200만t을 초과하고 있는 가운데, 글로벌 수요는 정체 또는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중국과 중동의 신규 NCC 설비 가동이 본격화되면서 글로벌 에틸렌 가격이 급락하는 등 시장은 심각한 수급 불균형을 겪고 있다. 이러한 외부 환경 속에서 여수 내 중복 설비가 효율적이지 않다는 문제의식이 커지며 두 대기업 간 협력 또는 재편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점차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빅딜이 실현될 경우, 이는 단순한 설비 통합이나 생산 효율화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NCC는 공정자체가 복잡하고 원료 수급부터 최종 제품까지 연동되는 고도화된 체인을 기반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통합 효과는 전방위적이다. 문제는 그만큼 후폭풍도 크다는 점이다. 롯데케미칼과 LG화학 간 NCC 통합 또는 생산 재편이 현실화되면,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을 영역은 인력 구조다. 두 기업은 여수산단 내에서 수천 명의 정규직 및 협력업체 근로자를 직·간접 고용하고 있으며, 생산설비 운영과 유지보수, 물류, 안전관리 등에서 고용 연계 효과가 크다. 일부 설비의 감축이나 통합 운영은 필연적으로 인력 재배치 혹은 감원을 수반하게 되며, 노사 간 갈등 요인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실제로 일부 전문가들은 “두 기업 간 구조조정을 단순한 M&A나 사업 재편의 개념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국가 산업 경쟁력 재구축’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정책적 로드맵과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정거래법상 담합 우려나 독점 규제, 고용 문제 등에 대한 제도적 예외 조항이 논의되지 않는다면 통합 논의는 계속 공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급망에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NCC는 단순히 에틸렌·프로필렌을 생산하는 설비가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한 다운스트림 제품군, 예컨대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 고무, 합성수지 등의 생산에 직접 연계된다. 두 기업이 설비를 통합하거나 일부 생산을 조정할 경우 이들과 거래하는 수십 개의 협력사 및 부자재 공급업체, 운송업체의 사업 구조도 함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부 업체는 거래 물량 축소로 인한 생존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가장 민감한 영역은 지역경제다. 여수시는 전체 경제활동 인구의 상당수가 석유화학 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하고 있다. 이들 기업의 경제적 파급력은 단지 고용에만 그치지 않는다. 지역 세수, 주택시장, 상권 형성, 교육기관과의 산학협력, 공공기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만약 구조조정이 대규모로 단행된다면 그 여파는 단기간 내에 지역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할 때

    이 같은 배경 속에서 여수 산단을 중심으로 “기업의 자율적 구조조정에만 맡겨선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며, 정부 주도의 ‘화학적 통합(Chemical Integration)’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화학적 통합은 복수의 기업이 물리적으로 합병하지 않고도 설비를 공동 운영하는 방식으로, 투자 부담은 낮추면서 효율은 극대화할 수 있는 대안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현행 공정거래법은 이러한 형태의 공동 운영이나 생산 조정을 ‘카르텔’이나 ‘담합’으로 해석할 수 있어 법적 리스크가 상당하다. 실제로 기업 간 공동 가격 결정이나 공급량 조정은 시장 경쟁을 제한하는 행위로 간주돼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화학적 통합이 가능한 제도적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다.

    결국 석유화학업계 내부에서도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할 때”라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기업 간 자율적인 논의만으로는 고용, 환경, 세제 등 복잡한 제반 이슈를 해결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정부가 구조조정을 유도하는 정책적 로드맵을 제시하고, 동시에 공동 설비 운용에 대한 공정거래법상의 예외 규정 도입, 세제 혜택, 고용 안정 장치 마련 등 제도적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글로벌 경기 둔화와 중국발 공급 쇼크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내 석유화학 산업이 경쟁력을 회복하고 지속 가능한 구조로 재편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감산이나 비용 절감이 아닌,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요구되고 있다. 석유화학업계 한 관계자는 “NCC 설비의 효율적 운영, 고부가가치 제품으로의 전환, 친환경 공정 도입 등 중장기 전략이 뒷받침돼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라며 “정부의 전향적 결단과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추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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