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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 (11) 근대 계몽주의 | 영화 `로얄 어페어`와 군중에 의해 실패한 개혁
입력 : 2020.11.03 1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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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계몽사상은 인간의 이성으로 문화와 문명을 발달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해 이성의 힘으로 자연과 인간관계, 사회와 정치문제를 객관적으로 관찰해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려는 시대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계몽사상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 자유권을 강조하고, 전제군주와 종교의 족쇄로부터 인간 이성의 해방을 주장했다. 이러한 계몽사상은 국가·정부의 역할을 바꾸는 데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정부를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게 했다. 이런 연유로 계몽사상은 17, 18세기 시민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당시 최대의 정치적 사건으로 손꼽히는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덴마크에서는 독일의 한 계몽사상가가 국왕의 주치의로 왕실에 들어가 봉건적인 구습에 반대하는 혁신적인 개혁정책을 단행한 일이 발생했다. 계몽사상에 기반한 그의 정책은 대중의 존엄과 자유권을 쟁취하는 데 성공하는 듯했으나, 왕비와의 염문으로 개혁은 대중의 외면을 받고 실패했다. <로얄 어페어>는 18세기 덴마크에서 일어난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시대극이다.
개혁이 급속도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요한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귀족들은 왕비와 요한의 관계를 눈치 채고 이들을 궁에서 몰아낼 계략을 꾸민다. 결국 요한은 왕비와 함께 왕을 시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당하고 왕비는 이혼당해 유배지에서 병을 얻어 죽어간다. 요한이 제거되자 덴마크는 다시 중세로 후퇴한다. 하지만 왕비가 유언으로 남긴 계몽정신을 이어받아, 아들인 프레데리크 6세는 통치 55년간 요한의 법안 대부분을 부활시키고, 농노제 폐지와 소작농 해방도 실현했다는 자막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봉건적 구습의 또 다른 유형으로는 태형이나 고문과 관련된 장면이 나온다. 요한이 우울한 여왕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말을 타고 함께 야외로 나갔다가 고문에 짓이겨 죽은 한 남자를 본다. 그 남자는 심하게 맞아 형체가 어그러졌고 나무에 묶여 있었다. 왕비는 놀라지만, 요한은 이 남자가 도둑질 같은 잘못을 해서 주인에게 벌을 받았을 것이고 귀족들의 사유지에서 가끔 발생하는 일이며 현재로서는 막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후 개인의 신체가 함부로 구속되지 않을 권리인 ‘태형 폐지’나 ‘고문 금지’ 법안은 요한이 실권을 잡은 후 통과된다. 그러나 요한이 체포된 후 새 내각에서 고문이 다시 부활되고 요한이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하는 장면에서 개혁 실패의 참담함이 느껴진다.
영화는 과학보다 신앙을 중시했던 구시대의 모습도 보여준다. 왕세자가 천연두에 걸리자 새로운 치료를 받을지 말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진다. 요한은 당시 발명된 종두법을 이용하자고 주장하지만 왕실에서는 왕위를 계승할 목숨은 하느님께서 지켜주실 거라며 반대한다. 왕비의 결정으로 종두법이 시행되고 치료는 성공한다. 이 일을 계기로 왕비는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시립병원에서 천연두 예방접종을 확대하는 것을 건의하고, 이 법안은 요한의 섭정 속에서 통과된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최고의 봉건적 구습은 허수아비 왕의 존재이다. 국왕이 정신질환에 걸려 국정을 보살필 수 없지만 명목상의 권력은 다 가졌기 때문에 섭정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많은 폐단을 갖고 있던 군주제는 18~19세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로 바뀌어간다.
흑인이 끔찍한 노예생활을 할 때가 인본주의가 고개를 들던 계몽주의 시대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칸트 또한 흑인을 인류 등급에서 가장 바닥에 두었다고 한다. ‘이성’을 중시한다는 계몽사상이 지금의 이성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프레임에 갇혔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이성으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계몽사상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 자신을 알라’며 무지를 일깨워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더 계몽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영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2호 (2020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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