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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⑲ 에곤 실레가 사랑했던 ‘보헤미아의 숲’ 체코 예술의 도시 체스키크룸로프
입력 : 2020.08.03 15: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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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대표적 표현주의 작가 에곤 실레는 뇌쇄적인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이다. 16세 때 빈 미술학교에 들어가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았지만, 독특한 그림을 그릴 때마다 선생님으로부터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말하지도 말라”라는 등의 모욕적인 말을 듣자,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제도권 밖으로 뛰쳐나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 새로운 기법과 표현 등을 찾기 위해 어린 시절에 감수성을 키웠던 어머니의 고향, 체스키크룸로프를 찾았다.
체코의 남부에 있는 이곳은 아름다운 자연과 유구한 문화유산이 켜켜이 쌓여 있는 예술의 도시이다. 블타바강을 끼고 있는 인구 1만5000여 명의 체스키크룸로프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253년, 비테크 가문이 절벽 위에 성을 쌓으면서부터이다. 이 가문은 오스트리아와 독일 바이에른주의 이주민들을 모아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곳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후손이 끊기자, 친척인 로젠베르크 가문에 도시를 물려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체스키크룸로프가 전성기를 맞이한 때는, 바로 로젠베르크 가문이 이 도시를 300여 년 동안 다스리면서이다.
예술의 도시로 들어가는 관문인 기차역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기차에서 내려 비탈진 길을 따라 20여 분 걸어가면 드디어 한 폭의 그림 같은 도시의 입구가 드러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은 도시의 상징 체스키크룸로프성이다. 이 성에서 에곤 실레는 발리와 함께 산책하고, 사색도 즐기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성 위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풍경은 실레의 그림 속에도 자주 등장한다. 도시에 운치를 더하는 블타바강, 울긋불긋한 지붕, 고풍스러운 골목길,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 거기에 짙은 녹음을 자랑하는 보헤미아 숲까지.
에곤 실레
미술관에는 80여 점의 작품과 친구에게 쓴 편지, 그리고 가구 몇 점이 전시되어 있다. 계단을 따라 2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커다란 거울이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가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했던 거울이자, 작업실을 옮길 때마다 가지고 다녔던 애장품이다. 거울을 뚫어지게 쳐다보면 예술로 인해 방황하고 몸부림치던 실레의 모습과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발리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간다. 거울 안에는 고독감에 휩싸인 실레가 발리를 모델로 정열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 등 다양한 그의 삶이 현실처럼 비친다. 하얀 천장과 기둥이 인상적인 전시실 내부를 돌아보는 순간 ‘겨울 버찌와 자화상’ 작품이 섬광처럼 눈을 스친다. 그 외에도 깡마르고 고독한 이미지의 그의 자화상들이 거울에 나타났다가 이내 그의 그림 속으로 다시 사라진다.
무릎을 들어 올린 붉은 블라우스의 발리
발리는 모델로서뿐만 아니라 연인으로 늘 그의 곁을 지켰다. 어쩌면 그녀는 위대한 화가 곁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에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은 외설적이지 않다. ‘무릎을 들어 올린 붉은 블라우스의 발리’에서도 그녀의 큰 눈망울에는 한 남자를 위한 헌신적인 사랑이 담겨 있다. 두 연인은 한 줌의 바람이 되어 보헤미아를 찾아왔고, 이곳에 정착해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1912)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9호 (2020년 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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