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경영의 클래식 에세이] 베토벤 탄생 250주년, 그가 만든 음악 세상

    입력 : 2020.07.07 10:54:09

  • 베토벤에 대한 숭배는 대체로 추상적이다. 그의 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봤거나 그의 음악이 주는 감동에 깊이 빠진 경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혹은 어려서 그리 배웠으니까 위대한 작곡가라고 말한다. 이미 그렇게 알고 있으니 그의 음악을 경험하는 일은 이미 정해진 답을 확인하는 작업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가 태어난 지 250년이 되는 올해에는 대체 베토벤이 왜 여전히 클래시컬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인지 한번 구체적으로 생각해봄 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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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알 만한 음악으로 시작해 보자. 교향곡 5번 ‘운명’. “따따따딴~”이라는 강렬한 4개 음으로 시작되는 이 곡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혹시 그 다음이 어떻게 되는지 기억하는지. 그 다음 부분 역시 “따따따딴~”이다. 그럼 그 다음은? “따따따딴, 따따따딴, 따따따딴, 따따따딴 따따따딴 따따따딴…”이다. 이 교향곡의 시작은 온통 “따따따딴”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그뿐이랴. 2악장을 지나 3악장이 되면 또다시 시작한다. “따따따딴, 따따따딴, 따따따딴, 따따따딴.” 음은 좀 바뀌었지만 여전히 같은 리듬을 반복한다. 온통 이 네 개 음만으로 가득 찬 이 ‘빈곤한’ 음악이 왜 그리 위대한가? 물론 이 곡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덧붙어 있다. 음악가로서 특별히 더 치명적일 청각장애, 그리고 그 가혹한 운명의 노크 소리라는 이야기가 이 음악과 함께 전해진다. 그리고 그 어둡고 무거운 운명과 싸우기로 마음먹고(3악장) 기어이 그 운명을 극복하는 찬란한 승리(4악장)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음악에서 들린다. 그러나 고난과 고난에 관한 승리의 경험, 예술적 승화가 어찌 베토벤만의 것이랴. 서양에서 음악이 기록되어 우리에게 구체적 실체가 전해지기 시작한 11세기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작곡가들이 있었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한 작곡가들이 적지 않다.

    혹은 그의 선율이 소름 돋도록 아름답거나 가슴을 훅 치고 들어와 잠시나마 할 일을 멈추게 하고, 시간이 흐른 후에도 문득문득 떠올라 나의 삶을 간섭하던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슈베르트의 선율이나 세련되면서도 들을 때마다 먹먹하게 만드는 라흐마니노프의 화성이 더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뭘까? 베토벤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 수많은 작곡가들 중에서 그를 클래시컬 음악의 대표자로 서슴없이 선택하도록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뭘까? 빨리 말하자면, 우리가 여전히 그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클래시컬 음악계의 상식들은 원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베토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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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따따딴~”은 자족적이지 않다. 이 네 개의 음이 하나의 완결된 음악적 문장을 이루는 것도 아니고 나름의 정서나 개성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 부분만 따로 떼어놓고 즐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다음 부분을 들어야 할 텐데, 그 다음 부분도 똑같이 생겼다. 그러니 그 다음도, 또 그 다음도 계속 들어야 한다. 대체 언제 이 음악적 문장이 끝나는지, 똑같이 생긴 이 블록들이 계속 모이면 결국 나중엔 뭔가가 만들어지는지, 독특한 정서와 개성이 생기는지 그 과정이 어떤지 신경 써서 들어야 한다. ‘따따따딴~’은 따로는 의미가 없지만 그것들이 모이고 쌓이면 결국엔 무엇인가를 이루는 레고 블록을 닮았다. 이런 작곡 방식이 당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 원래 음악은 그렇게 신경 써가며 듣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 이야기하며, 밥 먹으며 음악을 들었다. 때로 이야기가 멈추면 음악에 집중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 어김없이 잠자리에서 다시 떠오를 만한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토벤은 다르다. 처음 “따따따딴” 하고 시작한 음악, 한참 이야기하다가 잠깐 집중하면 또 “따따따딴”, 밥 좀 먹다가 또 음악을 들으면 똑같은 “따따따딴”. 이 음악은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맨날 똑같은 소리만 반복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 음악의 묘미는 “따따따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따따따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집중해서 듣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음악은 ‘산만한 청취’를 불가능하게 했다.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책을 읽을 수 없게 했다. 그러자 연주회장이 변했다. 서로 이야기하지 못하게 의자는 모두 정면을 향하게 되고 책을 읽을 수 없게 불을 끄게 된다. 음악회장에서는 열심히 음악만 듣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 음악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 수 있게 되니까. 음악은 그저 내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윤활유나 디저트, 벽지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심각한 감상의 대상이 되는 것, 그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예술작품의 지위를 비로소 얻게 된다. 그 위대한 인간의 성취 앞에 감히 아무 때나 박수를 치거나 기침을 해서 방해꾼이 돼서는 안 된다. 그 앞에서 침묵하며 겸손히 작곡가가 블록을 쌓아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베토벤이 만들어 놓은 세계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음악 개념, 음악회의 매너, 음악에 대한 태도, 이것이 모두 베토벤과 그의 “따따따딴”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베토벤은 청중을 위해 음악을 작곡했다기보다는 자기 음악을 위해 청중을 바꾼 사람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가 만들어 놓은 세계 속에서 음악을 생각하고 느끼고 존중한다. 그는 여전히 살아있고, 음악을 듣는 우리와 늘 함께하고 있다. 그러니 베토벤은 음악 ‘운명’을 작곡했을 뿐 아니라 음악의 운명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여전히 베토벤이 클래시컬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인 이유다.

    [음악학자 정경영]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8호 (2020년 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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