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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 (7) 근대 신항로 개척 | 영화 `1492 콜럼버스`와 ‘파라다이스’ 정복
입력 : 2020.07.07 10: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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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초 유럽인들은 신항로 개척에 열을 올렸다. 무엇보다 동방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려는 목적이 가장 컸다. 유럽에서는 중세 말기부터 동방에서 유입된 비단, 향료 등의 물품이 대량으로 소비됐고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와 아라비아 상인들이 무역을 독점했다. 특히 후추, 생강, 계피 등의 향료는 육류를 먹던 서양인들이 고기의 냄새를 제거하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필수적이었고 향료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은 막대했다.
따라서 신항로 개척은 당시 해외 무역과 새로운 시장 확보를 통해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려고 했던 유럽 군주들의 이해와 맞물려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신항로 개척을 시작으로 15세기 후반에 벌어진 해외 진출은 유럽이 타 문명을 앞지르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인도의 향신료와 중국의 도자기, 차, 견직물 등으로 대표되는 동방 무역, 신대륙 약탈로 얻어진 감자와 담배, 엄청난 양의 귀금속은 유럽 군주에게 막대한 경제적 힘을 안겨주었다. 아시아와 아메리카라는 광대한 시장을 소유하게 된 유럽은 상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자본주의 경제로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992)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항로를 발견하기 위해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을 찾아가고, 위원회 토론을 거쳐 여왕의 후원을 받는다. 평민이었던 콜럼버스는 성공할 경우 귀족 칭호를 받고 식민지의 총독으로 임명되며 그 지역에서 나오는 총이익의 10%를 받는다는 것 등의 요구조건을 약속 받은 후 항해를 시작한다. 명예와 돈을 동시에 얻으려는 콜럼버스의 야망은 중세와는 다른 근대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랜 고생 끝에 일행은 서인도 제도인 바하마 군도의 한 섬에 도달하지만, 그는 이곳이 아시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원주민 부족을 만나고 이들의 순수함에 경탄하며 그곳을 에덴동산과 같은 곳이라고 일기에 기록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949), 1492 콜럼버스(1992)
그러나 백인들이 원주민과 갈등을 겪으면서 원주민을 잔인하게 학살하게 되고 묵시카를 비롯한 일부 귀족들이 콜럼버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등 극심한 혼란이 빚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새로 건설하는 도시가 태풍으로 거의 파괴되는 사태가 발생 하고 귀족들로부터 모함까지 받게 되자 결국 콜럼버스는 고국으로 송환된다. 고국으로 돌아온 콜럼버스는 귀족을 부역에 동참토록 하고 원주민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고 전 재산을 빼앗긴다. 영화는 콜럼버스가 막내아들 페르난데스와 함께 회고록을 쓰면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런 비판과 각색에도 불구하고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리들리 스콧은 신대륙을 ‘파라다이스’로 표현하고 신대륙 발견을 개척이 아닌 약탈과 정복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균형 잡힌 시각도 보유하고 있다. 콜럼버스 개인에 대해서는 미화했지만 낙원과도 같았던 대륙을 야만적으로 정복한 유럽인의 침략행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992)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란 표현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이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콜럼버스가 이곳을 발견하기 전부터 이곳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이 부른 땅의 이름도 있었을 것이며 독자적인 위대한 문명도 있었다. 멕시코 지역의 마야, 아즈텍 문명과 페루 지역의 잉카 문명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라는 말이 과연 맞는 표현인가. 더군다나 이 대륙은 콜럼버스 이전에 북유럽의 바이킹이 먼저 도달했다고 한다. 누가 이 대륙을 먼저 발견했는지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대륙 발견이나 아메리카라는 명명이 유럽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표현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수수께끼(2007)
스페인에서는 콜럼버스가 와틀링섬에 도착한 10월 12일을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미국과 중앙아메리카 일부 국가에서도 이 날을 기념해 ‘콜럼버스의 날’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원주민에게 무자비한 학살을 했고 그의 탐험 이후 유럽인들의 탄압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콜럼버스에 대한 평가는 떨어지고 있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2002년 ‘콜럼버스의 날’인 10월 12일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는 대통령령을 발동하고,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상륙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학살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최근 미국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에게 목이 눌려 숨진 사건에 분노한 시위대가 메사추세츠주 보스턴의 콜럼버스광장에 자리 잡고 있던 콜럼버스 동상을 쓰러뜨리고 머리를 잘라낸 사건이 발생했다. 콜럼버스를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흑인 노예제와 연결시킨 인식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된다. 콜럼버스가 위대한 탐험가며 개척자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탄압과 학살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지 않으면 강자의 역사 해석이 사실로 인식되고 상식으로 둔갑되는 사례는 흔하다. 역사 속 사건이 새로운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겠다.
[이미영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8호 (2020년 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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