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ear My Walking] 길에서 길을 묻다, 강원도 양양 낙산사 둘레길

    입력 : 2020.07.06 16:28:10

  • “여긴 길에 이름을 붙여놨어요. 이 길 봐요. ‘근심이 풀리는 길’이네. 오랜만에 절에 왔으니 걱정 좀 내려놓고 갑시다.”

    평일 오후, 낙산사에 들른 노부부가 근심이나 풀어놓고 가자며 걸음을 재촉한다. 두 손을 꼭 잡고 나선 품이 한 폭의 그림처럼 정겹다. 어쩌다 그 뒤를 좇다보니 손을 잡고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귀에 들어왔다.

    “무릎은 좀 어때? 당신 말마따나 낙산사에서 근심 풀고 이번에 병원 가면 수술 일정 잡읍시다. 언제까지 아플 수만은 없잖아….”

    좀 더 길을 걷다보니 이번엔 ‘마음이 행복한 길’이란 표지판이 나타났다.

    “요즘 유치원 못가서 심술 났지? 여기 봐봐, 이 길을 걸으면 마음이 행복해진다고 쓰여 있네. 유치원 친구들과 놀지 못하는 건 아빠도 아쉬운데, 이 길 걸으면서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유치원 못가는 것도 싫지만 아빠가 회사 가는 것도 싫어.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안 된다면서 맨날 지하철에 사람 많잖아.”

    예닐곱은 됐으려나. 한쪽 손을 꼭 잡은 어린 딸의 한마디에 아빠는 벌써 입 꼬리가 귀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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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엔 ‘꿈이 이뤄지는 길’이 오롯하다. 앞서 걷던 중년 부부가 잠시 멈춰서더니 두 손을 모으고 작은 목소리로 소원을 말한다.

    “올해는 가족 모두 건강하게 도와주시고, 우리 남편이 장담한 주식도 대박 나게 해주십시오.”

    남편이 한마디 거든다.

    “들고 날 때 미련 갖지 말고 계획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아 주십시오….”

    꿈이 이뤄지는 길을 지나 아래로 내려서니 이번엔 ‘설레임이 있는 길’이 기다리고 섰다. 잠시 생각해본다. 요즘 어떤 일로 마음이 설는지….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에 다녀왔다. 그 둘레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살짝 숨이 차올랐다. 이 길의 초입엔 ‘길에서 길을 묻다’란 표지석이 객을 맞는다. 한번 되뇌는 것만으로 현재를 되돌아보게 하는 묘한 기운이 싫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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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심 내려놓고 걷는 길

    한여름이다. 30℃를 훌쩍 넘은 기온이 버거운 계절이지만 피서(避暑)는 요원하기만 하다. 이럴 땐 그나마 두어 시간 산책할 수 있는 탁 트인 공간이 제격인데, 강원도 양양에 자리한 낙산사만한 곳이 없다. 사찰을 중심으로 빙 둘러 난 둘레길을 걷다보면 잠시 일상의 근심이 사라진다. 동해바다의 짠 내 나는 바람까지 맞으면 짧지만 이런 피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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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 후문에서 바라본 낙산해수욕장은 한여름이지만 고요하다. 찾는 이가 많지 않아 바다와 모래사장의 구분이 선명하다. 낙산해수욕장을 가로지르는 해파랑길도 비교적 조용했다. ‘동해의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길동무 삼아 함께 걷는다’는 의미를 담은 해파랑길은 부산시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출발해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총 770㎞에 이르는 길이다. 그 중 44코스가 양양의 수산항, 낙산해변, 낙산사, 정암해변, 속초해맞이공원을 지난다. 평평한 해안선을 따라 비교적 편하게 걸을 수 있는데, 여름 휴가철이면 해가 뜨지 않은 아침이나 저물어가는 저녁 무렵에 걷는 이들이 꽤 많은 이름난 트레킹 코스다.

    낙산해변
    낙산해변
    하지만 올해는 쉽지 않다. 한나절 이상 걸어야 하는 탓에 괜한 우려가 앞선다. 어쩌면 이 해파랑길의 정취를 한 곳에 모아놓은 길이 낙산사 둘레길이다. 걷다보면 숲과 바다의 기운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짧지만 알찬 길이다.

    그렇다고 바닷가에 와서 해변을 외면할 순 없는 일. 낙산해수욕장 산책부터 시작해 낙산사 후문으로 걸어 올라갔다. 바다는 세상이 어지럽던 말던 호기롭게 휘몰아친다. 동해안 해수욕장 중 경포대와 함께 명소로 꼽히는 낙산해수욕장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4㎞에 이르는 백사장이 압권이다. 해마다 1월 1일 새벽이면 사람들로 빼곡히 메워지는 일출 명소이기도 하다. 소나무 숲 사이사이에 나무 데크로 길을 내 산책하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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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 낙산해변에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절경은 낙산사다.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한 이 사찰은 지난 2005년 큰 산불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며 국민적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원통보전 내부에 제작 시기가 12세기 초로 추측되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돼 있는데,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량을 복구한 후 이곳으로부터 약 8㎞ 떨어진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靈穴寺)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원통보전의 담장은 조선시대 세조가 낙산사를 고쳐 지으며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기와와 흙을 차례로 쌓고 곳곳에 원형 단면의 화강암을 넣었다. 지금도 조선시대 사찰의 대표적인 담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해 금산의 보리암, 강화 석모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도량으로 손꼽히는 낙산사는 그런 이유로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원통보전, 보타전, 의상대 등 낙산사 내부의 길만 산책해도 풍광이 뛰어난데, 특히 높이 15m, 둘레 3m에 이르는 해수관음상에서 내려다본 낙산해변은 숨이 턱 막힐 만큼 광활하고 아름답다.

    낙산사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해수관음상
    낙산사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해수관음상
    ▶소원 빌고 마음이 행복해지는 길

    아기자기한 오솔길부터 여럿이 걸을 수 있는 대로까지 낙산사 둘레길의 그 모양새가 다채롭다. 특히 걷는 이들이 지루하지 않게 곳곳에 이름을 붙였는데, 정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소나무길’이 직관적이라면 ‘마음이 행복해지는 길’ ‘근심이 풀리는 길’ ‘설레임이 있는 길’ ‘꿈이 이루어지는 길’ 등은 걷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 중 단연 압권은 의상대 정자에서 홍련암으로 이어지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길’이다. 바다와 맞닿은 이 길은 내리막에서 오르막까지 구불구불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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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듯 한여름 뙤약볕까지 이겨내야 홍련암에 닿을 수 있다. 찾는 이들은 그 곳에서 소원을 빌고 바다를 바라본다. 가는 길이 무겁다면 돌아오는 길은 가볍다. 의상대에 앉아 돌아오는 이들의 얼굴을 보면 찡그린 이를 찾기 어렵다. 그래서 길의 초입에 ‘길에서 길을 묻다’란 표지석이 있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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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 찾아가는 길 · 버스 이용 시

    -양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속초행 시내버스를 이용, 10분 후 낙산에서 하차

    -속초에서 양양행 버스(9, 9-1)를 타고 낙산에서 하차

    · 승용차 이용 시

    올림픽대로→서울양양고속도로→설악로→양양IC→낙산사

    [글·사진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8호 (2020년 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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