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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 (5) 중세 십자군 전쟁 | 영화 `킹덤 오브 헤븐`과 성지 예루살렘의 의미
입력 : 2020.05.07 10:5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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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은 기독교가 이슬람에게 빼앗긴 성지를 되찾기 위해 일으킨 중세 최대 규모의 종교 전쟁이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발생하게 된 이면의 다양한 이유들과 200년 동안 8차례나 진행된 전쟁 과정을 보면 과연 이 전쟁이 종교 전쟁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킹덤 오브 헤븐(2005)
성 밖 전투에서 군사들이 거의 몰살당한 상태에서 발리앙은 살라딘의 대군에 맞서 성을 지키려 하지만 성벽이 무너지고 만다. 덕을 갖춘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은 관용을 베풀어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기독교의 땅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보장하고 예루살렘을 얻는다. 발리앙은 고향에 돌아오지만 성지를 되찾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리처드 왕을 만난다. 영화는 “사자왕 리처드의 3년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살라딘과의 불편한 타협으로 끝났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하늘의 왕국에는 평화가 멀기만 하다”는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글래디에이터-템플 기사단(2007)
<킹덤 오브 헤븐>은 기독교 입장에서 이슬람 세계를 그린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기독교인과 아랍인에 대한 시각이 비교적 공정하고 균형이 잡혀있다. 십자군 전쟁의 추악한 속살을 드러내면서도 양심을 지키려는 인물로 살라딘과 발리앙을 부각시킨다. 살라딘은 13세기 단테의 <신곡>에서조차 ‘림보’에 살고 있는 영웅으로 그려지는 이슬람 군주이다. 단테는 저승세계로의 순례여행을 주제로 한 <신곡>에서 기독교가 성립되기 이전에 태어나 세례를 받지 못했거나 그리스도를 몰라 어쩔 수 없이 영혼이 지옥에 머무는 곳으로 림보를 설정하고 이곳에 호메로스, 호라티우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등과 같은 위대한 인물과 살라딘의 영혼이 함께 머무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만큼 살라딘은 십자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슬람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살라딘은 관용과 용기, 지략을 겸비한 훌륭한 전략가로 등장한다. 발리앙 역시 가족이나 시빌라 공주와의 관계에서 각색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십자군 전쟁 당시 군사적 능력과 협상 능력이 뛰어났던 실존인물이다. 발리앙이 수성전을 준비하면서 연단에 올라 사람들을 향해 외친 연설은 21세기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로 읽힌다. “이제 예루살렘의 수호는 우리 손에 달렸다… 우리들은 (태어나지 않아) 저지르지도 않은 공격 때문에, 그 때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자들의 공격을 받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무엇인가? 그대들의 성지는 로마인들이 무너뜨린 유대인들의 성지 위에 지어졌고, 무슬림의 성지는 그대들의 성지 위에 지어졌다. 무엇이 더 신성한가. 벽? 모스크? 성묘? 그 누가 이 땅을 가질 권리를 갖고 있는가? 모두가 갖고 있다!… 우리가 이 도시를 지키는 것은 그런 돌덩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는 성벽이 무너진 후 성지가 아닌 성벽 안의 사람들을 위해 살라딘과 협상했고 그들을 모두 지켜냈다.
더 킹덤 앳 로즈 엔드(2008)
영화에서 ‘킹덤 오브 헤븐’이 의미하는 지역인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이며 서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신성시되는 곳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은 각 종교의 이름으로 옛날부터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로마 시대는 그리스인과 유대인, 중세에는 무슬림과 기독교인, 근대 시대에는 대영제국과 오스만 제국, 현대 시대에는 아랍인과 유대인들이 서로 싸우는 지역이다.
영화에서 발리앙은 예루살렘의 의미를 처음에는 자신과 아내의 구원을 위해, 아버지에게 기사작위를 받은 후에는 성지 수호와 평화유지에 두지만, 결국 신은 성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에 대한 믿음을 품고 있는 자신의 가슴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발리앙이 협상을 마치고 살라딘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예루살렘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냐고. 살라딘 역시 성지(聖地)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Nothing”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이 “Everything”이라고 덧붙임으로써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모든 것을 걸기도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실상은 Nothing이지만 현실에서는 Everything이 되는 아이러니.
더 킹덤 앳 로즈 엔드(2008)
십자군 전쟁은 1096년 1차로 구성된 십자군을 시작으로 약 200년간 8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성지 탈환이라는 명목상의 목적이 달성된 것은 1차 십자군 원정 때뿐이고 나머지 원정에서는 타락과 실패만 거듭했다. 십자군 원정의 명분은 박해받는 기독교도를 위해 성지를 탈환하는 데 있었지만 사실 불순한 목적이 숨어있었다.
11세기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은 내부의 분열과 외세의 침입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고 튀르크족에게 예루살렘과 아나톨리아 지역을 잃게 되었다. 알렉시우스 동로마 황제는 서유럽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소수 병력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기독교 유럽을 통일하고 수장이 되려는 우르바누스 2세는 공격적 성격의 군대를 파병한다.
십자군 제창으로 유명 무명의 기사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농민들도 적극 호응했다. 이들 중에는 순수한 신앙심으로 원정에 가담한 이도 있으나, 주로 상속받을 토지와 재산이 없는 차남 이하의 기사들로 구성된 봉건 영주와 하급기사들이 새로운 영토 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농노 상태에 있던 농민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했다.
1차 원정에서 십자군은 1099년 예루살렘 입성에 성공했지만, 6주간 계속된 전투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자행했다. 영화에서 보두앵 4세가 죽은 뒤 한 구호 기사단원이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면서 “백 년 전의 일에 대한 응보가 일어날 겁니다. 무슬림들은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잊어서도 안 되고”라고 하는 말은 십자군들의 당시의 끔찍한 만행을 연상시킨다. 이후에도 유럽은 여러 차례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8차례 십자군 원정 중 4차 원정은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과 관련 없는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고대 로마 때부터 전해 내려온 예술품, 유물, 성물 등 눈에 띄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약탈하며 방화했다. 심지어 수도원의 묘역에 있는 황제의 관까지 끄집어내 부장품들을 약탈했다고 한다. 십자군 전쟁 중에 유럽에서 ‘소년 십자군’ 모집에 응한 소년들을 선주가 몽땅 알렉산드리아 노예로 팔아넘기는 잔혹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의 복잡한 동기와 200년간 진행된 전쟁의 참상을 보면 신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인간의 탐욕과 폭력성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소름이 돋는다. 영화에서는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이 예루살렘을 의미하지만, 그 곳은 성지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모든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도록 노력하는 양심적인 머리와 가슴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은 오늘날에도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속죄를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간다는 발리앙에게 죽음을 앞둔 고프리가 당부한 말이 가슴을 울린다. 예루살렘은 신분의 차별 없이 누구나 자기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구원의 땅이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이 가능한 세계라고. 양심이 살아있는 하늘의 왕국을 만들라고. 과연 이러한 당부는 언제쯤 실현될 수 있을까.
[이미영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6호 (2020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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