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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명화극장] 영화 <블랙머니> 73세 노감독이 손쉽게 풀어낸 정치경제학
입력 : 2019.11.26 14:4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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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음모는, 혹은 그 음모를 다룬 영화는 두 가지를 정확하게 찾아내면 된다. 그러면 모든 걸 한꺼번에, 그리고 손쉽게 드러내게 할 수 있다. 첫째가 모든 일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였는가라는 것 하나, 두 번째는 이 같은 ‘작당(作黨)’을 통해 가장 이득을 보는 이(들)가 누구냐는 것이다. 간단한 일이다. 두 가지만 찾으면 되니까. 하지만 그게 아주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얘기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였는지를 찾거나 판단해내는 게 어렵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음모 전체를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자칫 얘기 전체를 비비 꼬인 상태로 굉장히 어렵게 그려내게 된다. 흔히들 범죄 인물도(人物圖), 그 관계도, 심지어 가계도(家系圖)까지 동원하게 되는데, 그쯤 되면 파이다. 일반 대중들의 머릿속에는 사건 전부가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로 변해 버린다. 오직 나쁜 놈이 누구고 당한 놈이 누군가만 남는다. 그렇게 되면 진실 파악은 물을 건너기 위해 노를 저어가는 중이 되기 십상이다.
미국 FBI의 부국장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의 내부 고발자였던 마크 펠트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뒤를 좇던 워싱턴포스트지 기자 밥 우즈워드와 칼 번스타인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돈을 좇으시오!(Follow the Money!)” 우즈워드와 번스타인은 이때부터 영수증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대한 음모의 뿌리를 캐내는 데 성공한다.
그 모든 것이 어찌 보면 이번 조국 전 장관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 가운데 사모펀드 논쟁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검찰과 언론은 필요 이상으로 조국 부인의 사모펀드 운영을 부풀리고 왜곡한다. 대중들은 뭔 얘기인지 잘 모르는 상황이 된다. 그걸 이용해 특정 집단은 사건의 주도권을 끌고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전의 론스타 때가 그랬다. 지금의 론스타도 여전히 그렇다. 론스타 사태는 아직 진행형이다.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5조원에 이르는 소송이 아직 결론 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부패 고리, 곧 정치-경제-사법의 프레임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지, 그 고리의 강도가 얼마나 단단한지를 보여준다.
영화 <블랙머니>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건, 정치·사회 비리의 문제를 지루하다 해서 잊어버리고 내팽개치면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는지 중간 중간 유머도 적지 않게 비벼 넣었다. 사실상 지루한 얘기를 지루하지 않게 하려 노력한다. 그럼으로써 이것이 바로 우리들 자신의 얘기임을, 우리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임을 인지하게 한다. 그때 날아간 돈이 다 우리 것이었음을 강조한다. 정지영 감독이 노린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어려운 정치경제학을 손쉽게 알아 볼 수 있는 텍스트로 정리해냈다. 그것도 상업영화가 갖는 장르적 특성을 유연하게 휙휙 휘둘러 가며. 정지영은 한동안 꽤나 뾰족하게 살아왔다. 정지영 하면 국내 영화계의 대표적인 좌파 감독으로 손꼽혀 왔다. 그가 만든 <부러진 화살>, 특히 <남영동1985>가 그런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하지만 원래 그는 상업영화 감독이었다. 사람들은 잘 모를 수 있는데 정지영은 워낙 장르영화를 잘 찍는 감독이다.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가 그랬고 <블랙잭>이 그랬다. <블랙머니>는 정지영이 충무로에서 한창 놀았던 때, 그 전성기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나이 먹은 감독이 예술영화를 찍는 건 역설적으로 쉽다. 인생과 세상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을 테니까 그걸 그대로 옮겨 적으면 될 것이다. 나이 먹은 감독들이 자꾸 종교영화를 찍거나 종교적 색채나 그런 느낌의 영화를 찍는 건 그 때문이다. 반대로 정지영처럼 나이 먹은 감독이 상업영화를 찍는 건 아주 어렵다. 그래서 더 존경스러운 일이다. 세상의 트렌드를 못 좇아가는 것은 기본이고 나이를 먹으면 배움이 더뎌져 기술적으로도 한참이 뒤처지기 마련이다. 상업영화는 ‘요즘 세태’와 ‘요즘 세대’, 그 흐름을 모르고서는 도저히 찍을 수 없는 노릇이다. 노(老)감독으로서, 그 정체성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를 전달하면서도 동시에 그걸 대중적 어법으로 정리하기란, 도통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정지영은 그걸 <블랙머니>로 해냈다. 그는 1946년생 73세이다. 한국에 이런 노감독은 현재 거의 유일한 존재이다. 한편으로는 이번 영화를 보고 있으면 <월 스트리트2>를 만들 때의 (<월 스트리트1>이 아니라) 올리버 스톤이 생각난다. 올리버 스톤도 1946년생이다. 그는 그 영화를 10년 전에 만들었다. 올리버 스톤이나 정지영이나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점점 마음속이 세상에 대한 근심으로 꽉 들어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젊은이들한테 세상의 진면목을 알려주고 싶은데 그게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 나이가 돼있는 것이다. 그래서 쉽고 친절하게, 마치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듯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둘 다 그 진심이 느껴진다. <블랙머니>는 세상과 후세대를 걱정해서 남긴(나중에라도 꼭 챙겨 보라고 하는 의미에서) 선배 감독의 촘촘한 사건 기록서 같은 작품이다. 이 영화로 론스타 사건이 잘 해결될 수 있을까.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영화 한 편이 많은 일을 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론스타 문제에 관한 한 대중들의 인식은 굉장히 높아질 것이다. 그게 어디인가. 그거면 됐다. 영화든 세상이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뀌는 법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1호 (2019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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