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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명화극장] 영화 <애드 아스트라> 프런티어 정신을 망각한 채 끝없이 헤매고 있는 미국
입력 : 2019.10.29 1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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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피트 주연의 작품 치고 그다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애드 아스트라>는 그 레퍼런스를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1968년에 만든 걸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1972년작 <솔라리스>에서 가져온다. 미래 세계 우주 여행 과정에서 주인공이 이뤄가는 내면의 성찰을 담았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애드 아스트라>가 왜 흥행이 안 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대중들에게는 어려운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스타워즈>류의 SF 활극도, <그래비티>류의 SF 휴먼드라마도 아닌, 난해한 작품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덧씌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드 아스트라>는 매우 흥미롭고 철학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우주 탐사의 행위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 그 정신적 행복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근원주의적 탐구임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는 나사(NASA)의 인정받는 우주 비행사다. 그는 얼마 전 우주 안테나를 수리하던 중 전류의 이상 급증현상, 소위 ‘써지’로 인해 추락 사고를 겪었다. 그가 살아난 것은 요행이 아니라 엄연히 오랜 기간의 훈련과 경험으로 쌓인 노련함 덕이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극비 임무가 떨어진다. 해왕성으로 날아가 써지의 원인을 제거하되, 아마도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진 로이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 그를 설득하든 그것이 안 되면 제거하라는 것이다. 로이의 아버지 클리포드 맥브라이드(토미 리 존스)는 우주 비행사 사이에서 전설이 된 인물이다. 클리포드는 30여 년 전 리마 프로젝트, 곧 외계 생명체를 찾아 태양계 밖으로 나가는 모험을 감행한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부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해왕성에 생존해 있으며 써지의 원인이 그의 위험한 실험 때문임이 밝혀진다. 로이는 아버지를 찾아, 지구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위험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놀랍고 영리한 점은 전체 내러티브 구조를 그 같은 ‘과학’과는 별개로 꾸렸다는 것이다. 만약에 써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된다면 영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공상과학 영화는 과학적 근거를 가지면 된다. 과학일 필요는 없다. 과학은 칼 세이건의 다큐멘터리가 수행해야 할 일이다. <애드 아스트라>는 극영화로서의 그 같은 ‘규칙’을 잘 완수해 간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관객들을 저 드넓고 깊은 우주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그곳에서 유영(遊泳)하던 끝에 길을 잃게 만든다. 관객들은 이윽고 애드 아스트라, 곧 별과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를 더욱 그럴 듯하게 만들기 위해 제임스 그레이는 여러 사건을 배치시키되 그것을 실물화한다. CG나 특수효과 기술보다는 실제 세트를 만들어 보는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이 영화에서는 우주 공간을 매우 인상적으로 그려낸 장면이 많은데 그건 오프닝 때부터 그렇다. 주인공 로이가 일하는 스카이랩과 국제우주정거장, 우주선 내부 공간 역시 모두 정교한 세트로 만들었다. 갖가지 우주 공간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화면상으로 그와 가장 근사치로 보일 만한 장소를 물색해 로케이션 촬영을 해내기도 했다. 예컨대 이 영화는 종종 액션 활극을 보여주는데 달에서 우주 해적의 습격을 받는 장면은 로케이션으로 촬영됐다. 달에서 저런 게 가능할까? 광선총이 아니어도 발사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필요가 없다. 이 추격 신은 이 영화가 정적인 작품이 아니라 동적인 작품이 될 것이며, 그렇게 끝까지 이어갈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 준다. 이 장면은 아프리카 모하비 사막에서 실사 촬영이 이루어진 뒤 CG가 가미됐다. 우주선과 우주선 간에 이어지는 통로는 LA의 한 버려진 백화점을 활용해 다시 디자인했고 화성 기지의 지하 공간(화성에서는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 생활공간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을 착안했다.)은 폐발전소를 썼다. 할리우드 SF영화들이 단 한 장면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돈과 물량을 쏟아 붓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상상력과 미술, 세트 디자인 기술이 따라 붙어야 함을 나타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과학을 모르면 무신론자가 되지만 과학을 깊이 알면 신의 질서를 알게 된다.’
그렇다면 거꾸로도 가능하다. 인간을 탄생시킨 신의 의지가 존재했다면 인간은 그 신의 의지를 증명하기 위해 과학을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클리포드처럼 우주를 깊이 파고들어 또 다른 생명체의 존재를 찾아내야 한다. 아버지 클리포드가 수십 년 동안 우주를 떠돈 이유는 ‘외계인을 찾고=신을 찾아서=자신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클리포드의 과학적 목적은 궁극으로는 철학적인 이유에 닿아 있다. 아들 로이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험난한 과정에서 점점 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우주는 내 안의 우주이다. 인간이 돌고 돌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국 자신 안의 심연이다. <애드 아스트라>를 보고 있으면 내 안의 심연이 들여다보인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나는 이 광활한 우주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는가. 나는 우주의 질서와 신의 의지로부터 몇 억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것인가. 할리우드 SF 영화에는 일정한 스피릿이 있다. <애드 아스트라>는 현재의 미국 사회가 프런티어 정신의 본질을 망각한 채 우주 공간에서 끝없이 헤매고 있음을 은유한다. 목적과 가치를 상실한 시대, 그 회복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영화 속에 담겨져 있다. 그런데 그건 꼭 미국 얘기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얘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보편적으로 읽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0호 (2019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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