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⑨ 체코 프라하에서 만난 지성, 프란츠 카프카

    입력 : 2019.10.10 15:16:56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오스트리아 빈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이어 수준 높은 예술과 학문이 발달한 문화의 도시, 프라하. 카프카, 카사노바, 모차르트, 베토벤, 리스트, 릴케, 드보르자크, 다 폰테, 슈베르트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들의 열정과 애잔한 삶이 스민 곳이 바로 프라하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화가 로댕은 프라하를 ‘북쪽의 로마’라 했으며, 카프카는 ‘자신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수많은 예술가가 아름다운 프라하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카프카에게 프라하는 그의 말처럼 ‘어머니’와 같은 도시였다. 프라하와 카프카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서로 맞물려가는 유기체처럼 불가분의 관계이다. <변신>과 <성>, 그리고 몇 편의 단편들로 잘 알려진 카프카는 1883년 7월 3일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체코어로 ‘까마귀’를 뜻하는 카프카 집안의 장남으로 프란츠가 그의 이름이다. 마흔한 살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의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빛바랜 그의 흑백사진을 바라다보면 짧은 인생을 살다간 카프카의 철학적 고뇌와 성격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고독하면서도 희망이 묻어 있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것만 같은 그의 큰 눈망울에서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사진설명
    카프카의 흔적을 찾아 중세풍의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고, 그의 고독한 눈매를 잘 보여주는 그림과 사진도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평생 친구인 막스 브로트와 만남의 장소로 삼았던 틴 교회, 밀레나를 기다리는 동안 서성거렸던 천문 시계탑, 작품 <성>을 썼던 황금소로의 22번지, 카프카 기념관 등 그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유적지들이 꽤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카프카 기념관은 그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아주 남다른 의미를 선사한다.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을 가지고 기념관에 들어서면 은은한 음악과 깔끔하게 전시된 그의 유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내부 장식은 카프카의 성격이나 그의 철학적 고뇌를 암시하듯 다소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다.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 대표작 <변신> 외 다수의 작품이 유리관에 잘 보존되어 있다. 잘생긴 카프카의 젊은 시절 사진은 또 다른 볼거리 중 하나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담긴 그의 눈빛은 프라하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무척이나 닮았다. 그리고 기념관 내부에 있는 또 하나의 흑백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카프카의 연인, 밀레나다. 프라하 출신의 밀레나는 카프카보다 열두 살이나 어렸고, 남편이 있는 유부녀이자 명문가의 딸이었다. 카프카가 독일어로 쓴 자신의 작품 <화부>를 그녀에게 체코어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둘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밀레나는 막스 브로트처럼 미로의 세계에 빠진 그에게 등불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카프카가 만났던 여인 중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위안을 준 연인이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는 카프카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건네준 그의 일기에서 나온 작품이다. 사랑하면서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일기장에 글로나마 옮겨야 했던 카프카의 사랑. 역시 그다운 모습이다. 그녀의 서글서글한 눈빛이 어두운 전시실을 따스하게 밝혀준다. 밀레나의 사진 이외에도 두 번째 약혼식 때 촬영한 펠리체 바우어와 함께 찍은 사진, <변신>의 초쇄본, 그의 친필 편지 등이 전시돼 있다. 이 중에서 초쇄본의 표지는 세월에 의해 낡고 바랬지만, 그 속에 담긴 카프카의 실존주의적 철학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카프카는 <변신>을 통해 부조리와 존재의 불안함을 날카롭게 통찰함으로써 사르트르와 카뮈로부터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은 현대를 살아가는 세일즈맨, 그레고르를 통해 실존의 의미와 부조리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평범한 회사원 그레고르는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레고르라고 말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외면당하고, 끝내 불면증과 식욕부진 등의 여러 가지 주변 환경에 시달리다 죽게 된다. <변신>은 언제, 어디서, 어떤 절박한 상황에 부닥칠지 모르는 소시민의 생활을 상징적으로 묘사해 카프카가 프라하를 대표하는 문학가로 만들어놓았다. 그의 성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흑백사진 몇 점과 가족사진, 1921년 지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 등 카프카가 41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가 남기고 간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기념관을 돌아보는 일은 그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프라하성보다 훨씬 큰 감동일 것이다.
    사진설명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면 그가 젊은 시절에 작업실로 사용했던 황금소로 22번지로 가야 한다. 그곳에는 또 다른 카프카의 추억이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프라하성 바로 옆에 있는 황금소로에는 16세기에 지어진 작은 집들이 모여 있다. 원래 이곳은 연금술사들이 모여 살면서 ‘황금소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황금소로는 다양한 기념품을 파는 상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파란색으로 칠해진 22번지는 카프카가 숱한 나날 글을 쓰고, 주류에 들지 못한 채 주변인으로서 방황해야 했던 시절의 아픔이 스민 곳이다. 22번지의 집주인은 다름 아닌 카프카의 막내 여동생인 오틀라이다. 그는 노동재해보험협회를 다니면서 저녁이면 이곳에서 글을 썼다. 카프카는 왜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이 아닌 동생 집에 와서 글을 썼을까? 그 이유는 유대인의 엄격한 교육을 가르치던 아버지 때문이다. 생활력이 강하고 보수적인 아버지의 교육방식 때문에 카프카는 유대인 공동체의 예배와 의례를 마지못해 지켜야 했고, 법대를 나와 법조인이 되어야 했다. 그 결과 카프카는 그야말로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고, 어른이 돼서도 동생 집을 전전하며 아버지 몰래 글을 써야 했다. 22번지 오틀라의 집은 카프카가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던 자신만의 공간이자 해방구였다.

    이처럼 프라하는 카프카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부족한 곳이다. 아무리 이곳에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많다고 해도 카프카가 없었다면 그 의미는 무색할지 모른다. 오랜 역사와 독특한 건축양식이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프라하 출신의 카프카, 드보르자크, 밀란 쿤데라 등의 예술가가 없었다면 이 도시의 울림은 어땠을까? 로댕이 프라하를 ‘북쪽의 로마’라고 부른 이유는 중세풍의 건물마다 담긴 예술가의 뜨거운 열정과 시민들의 사랑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실존주의적 철학을 가슴에 새기며 프라하성을 등지고 내려오면 하늘이 어느새 붉은빛과 코발트 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블타바강 위에 우뚝 솟은 프라하성은 밤이 되면 수십만 개의 조명으로 불을 밝혀 또 다른 이미지를 연출한다. 프라하가 ‘백 탑의 도시’라는 별칭을 왜 갖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밤이 깊을수록 카를교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즐거워진다. 사람보다 큰 콘트라베이스의 굵은 저음과 트럼펫의 고음이 어우러진 재즈 리듬에 사람들은 어깨춤을 추며 손뼉을 친다.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악사들의 즉흥적인 리듬과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를 닮은 노랫소리가 블타바 강물 위로 유유히 흘러간다. 카프카가 사랑한 프라하의 밤이 그렇게, 그렇게 오늘도 어제처럼 깊어간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9호 (2019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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