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걷기 프로젝트] 강서둘레길 1코스| 한강변 아기자기한 트레킹, 강 따라 걷다 산에 올라 서울 전경까지

    입력 : 2019.10.07 16:19:18

  • “칼로 물 베는 게 뭐 그리 어렵겠어요. 하겠다고 결심하는 게 어려운 거지.”

    아차, 괜한 말을 뱉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슬쩍 미소 짓는다는 게 똥 씹은 양 입술이 일그러졌다. 아이고 이런 입방정이라니. 아무렇지 않게 툭 던졌는데 악수(惡手)도 이런 악수가 없다. 상대방도 그런 내 맘을 알았는지 웃는 표정이 쓰다. 쓴 소주 털어넣으며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은 때도 있었다”고 할 땐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미안했고 또 측은했다.

    사진설명
    얼굴 트고 지낸 지 겨우 1년 여 남짓 된 이가 술 한 잔에 속내를 드러낼 땐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그만큼 괴롭다는, 곁에 있는 이들보다 1년에 서너 번 만나는 이에게 하소연하는 게 더 편한 이유….

    30대 후반에 잘 다니던 중견기업을 차버리고 중국으로 건너간 김 이사는 무역상으로 성공했다. 그의 말로는 회사에서 받는 연봉의 두어 배를 단 한 달 만에 벌어들였다. 본인은 운이라고 했지만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싣고 부리는 상품이 늘 히트했다. 생각지도 못한 통장 잔고에 당연히 중국에 머무는 일이 잦아졌고, 1년의 반 이상은 중국에 있을 만큼 바빠졌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운이 좋았어요. 중국에서 사업파트너를 잘 만나기도 했지만 회사 다니면서 다져놓은 네트워크가 적재적소에서 도움을 주더군요. 그런데 얼마 전에 집사람이 이렇게 헤어져 있을 거면 따로 살자더군요. 중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거기서 뭐하는 거냐 하는데 그동안의 생활이 필름처럼 돌아가더니 숨이 턱 막히는 거예요.”

    나 혼자 잘 살자고 이러느냐는 말은 그저 공허한 핑계에 불과했다. 사업한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부어라 마셔라 했던 일부터 하나밖에 없는 딸 생일에 함께 있어주지 못했던 순간이 정지화면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부랴부랴 귀국해 수습에 나섰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잠시 떨어져 지내잔 말에 사무실에서 먹고 자던 그는 얼마 전 집으로 귀가했다.

    “너무 답답하니까 누구 하나 붙잡고 이렇게 하소연이라도 해야 잠이 옵디다…. 아주 큰 걸 놓칠 뻔했어요. 답답하니까 좋았던 때만 생각나더라고요. 돈으로 살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었다면 벌어놓은 거 전부 털어넣고 돌아갔을 겁니다. 요즘은 좋은 말 하나씩 이렇게 가슴에 묻어두고 다닙니다. 매번 반복해서 되뇌고 있어요.”

    그가 내민 메모지엔 법륜스님의 희망편지 한 구절이 쓰여 있었다.

    “부부싸움은 사소한 데서 시작합니다. 사소한 일에서 시작하여 상대를 고쳐보겠다면서 어린 아이처럼 기 싸움을 벌이게 되죠. 그러나 누구도 내 식대로 고칠 수가 없습니다. 나도 나를 못 고치는데 어떻게 남의 성질을 고치겠습니까? 비난보다는 충고가 낫고 충고보다는 이해가 낫습니다. 정말 고쳐야 할 건 누군가를 고치겠다는 나의 마음입니다.”

    전망대 부근 데크길
    전망대 부근 데크길
    ▶겸재가 그린 한강, 그리고 300년 후 서울

    한강을 사이에 두고 행주산성과 마주보고 선 서울 강서구의 개화산(128m) 자락에는 ‘약사사(藥師寺)’라는 사찰이 있다. 고려 후기 시대 3층 석탑(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9호)과 석불(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0호)이 모셔져 있어 고려 후기에 창건됐다고 유추되는데, 이곳 언저리에서 바라보는 한강과 서울의 풍경은 그대로 화폭에 옮겨도 될 만큼 빼어나다. 이 약사사를 끼고 돌아 나가는 둘레길이 ‘강서둘레길’인데, 총 3코스 중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순환형 코스가 1코스다. 원래는 ‘방화근린공원’에서 출발해야 하지만 살짝 편법을 썼다. 약사사 옆에 주차를 하고 둘레길 걷기에 나선 것이다. 제대로 걷기 위한 나름의 준비운동, 그러니까 그동안 쓰지 않던 근육에게 이제 네가 움직여야 한다고 알려주는 과정을 거친 후 하늘을 바라보니 한동안 그렇게 바라마지 않았던 가을이 활짝 열렸다. 푸르다는 건 이 정도는 돼야 한다는 듯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약사사로 들어서니 규모가 제법 크고 넓다. 한쪽에선 산을 찾은 이들이 모여 차 한 잔에 수다 중이고, 다른 한쪽에선 여름 한 철이 아쉬운 때 잊은 매미 울음이 구슬프다. 도심 한가운데 오르기 쉬운 산이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게다가 그 산에 사찰이 있다는 건 산을 오르는 이들에겐 잠시 들러 목을 축이거나 공양까지 얻을 수 있는 오아시스나 다름없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둘레길로 들어서니 몇 걸음 떼지 않았는데 탁 트인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 데크를 놓아 걷기 편하게 만든 ‘개화산전망대’에 서보니 공활한 가을 하늘 아래 서울타워와 북한산이 선명하다. 매년 1월 1일이면 새벽부터 해맞이 인파가 몰린다는데, 그래서인지 전망대의 또 다른 이름이 ‘개화산 해맞이 공원’이다.

    전망대 앞쪽에 전시된 게시판에는 여타 전망대의 전경 설명 대신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겸재가 그린 한강의 모습과 현재의 사진이 나란하다. 비록 그림이나마 300여 년 전 한양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장소다. 평생 동안 전국 각지의 뛰어난 경치를 찾아 떠나고 돌아오길 반복했던 겸재는 65세였던 1740년 초가을부터 70세까지 만 5년간 양천(강서구 가양동 일대)의 현령(縣令)을 지냈다. 당시 강서지역을 중심으로 한강의 풍광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글쎄, 그가 바라본 한강의 그것과 지금은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는 한강, 아니 조선의 천지개벽을 상상이나 했을까.

    사진설명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에 가을이 성큼

    전망대를 지나 숲이 빽빽한 산길에 들어서면 동산쯤으로 생각했던 개화산의 산길이 생각보다 가파르다. 두어 시간 힐링을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기운이다. 그렇다고 해발 수백m의 산과 비교할 건 아니지만 오밀조밀한 길이 구불구불 이어지다보니 걷는 속도와 거리를 가늠하기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던 길을 멈출 순 없는 법. 돌아 나가는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 보니 우뚝 솟은 호국충혼비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며칠 뒤인 1950년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비행장을 사수하기 위해 장렬히 산화한 전진부대 소속 11, 12, 15연대 1100여 명의 전우들을 추모하기 위한 ‘김포 개화산지구 전투 위령비’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는 고작 37명에 불과했다. 생존자를 제외한 무명의 용사 전원이 사망했다. 1994년 3월에 위령비가 세워졌는데, 개화공원 미타사(彌陀寺)에서 해마다 6월이면 호국위령제를 올린다고 한다.

    잠시 그늘에서 쉬다 길을 나서니 이번엔 길이 솟아올랐다 가라앉는다. 높이의 변화가 지루하지 않고 반갑다. 둘레길 곳곳에 교차로가 있는데, 길이 편해보인다고 무턱대고 나무 데크 길로 빠지면 개화산을 가로지르게 된다. 얕은 산의 특징 중 하나는 가로지르는 길이 생각보다 빠르고 평평하다는 것. 급한 일이 생겼다면 모를까, 제대로 둘러보겠다면 산길이 제격이다. 가을 산행 중 빼놓을 수 없는 주인공은 도토리다. 산길을 걷다보면 길이 아닌 숲에서 뭔가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따라 들어가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작고 윤기 자르르한 도토리를 확인할 수 있다. 예쁘다고 주머니에 넣고 나오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다. 가을 도토리는 숲의 주인들에겐 목숨과도 같은 겨울 양식이다.

    한 바퀴 휘휘 돌고 나니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쉬운 마음에 3코스에 자리한 강서습지생태공원에서 둘레길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차로 이동한다면 약사사에서 5분 여 거리인데, 한강공원주차장에서 길만 건너면 만날 수 있는 신세계다. 2002년 7월 1일 개원했는데, 34만㎡의 공간에 담수지와 저습지, 갈대밭과 버드나무숲이 어우러진 탐방로와 철새조망대가 멋드러진 곳이다. 올림픽대로에서 이곳을 찾는다면 방화대교 남쪽 끝에서 행주대교 남쪽 끝 사이에 자리한 한강 둔치쯤이다. 늦가을부터 청둥오리를 비롯한 한강의 철새들을 관찰할 수 있는데, 걸어서 한 바퀴 돌기만 해도 뱉고 마시는 공기가 전혀 다름을 느낄 수 있다.

    약사사 전경
    약사사 전경
    강서둘레길 방화 근린공원에서 출발해 개화산, 치현산, 서남 환경공원, 강서 한강공원을 잇는 11.44㎞의 코스가 강화둘레길이다. 서울 강서구의 고유한 생태와 역사, 문화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약사사 3층 석탑, 풍산심씨 묘역, 각종 전망대, 메타세쿼이아 숲, 습지생태공원 등 볼거리가 여럿이다. 각 시설의 명칭은 주민 여론을 수렴해 향토사학자의 자문을 거쳐 결정했다.

    1코스 약사사→개화산전망대→봉화정→아라뱃길전망대→숲속쉼터→신선바위→호국충혼비→미타사→하늘길전망대→풍산심씨사당→심정쉼터→방화근린공원→개화산생태습지→약사사 2코스 방화근린공원→꿩고개체력단련장→치현산→치현물레소공원→서남환경공원→옹기골근린공원→메타세콰이어숲길 3코스 개화산전망대→은행나무보호수→상사마을→행주나들목(토끼굴)→김포대로→행주대교→강서한강공원→강서습지생태공원→정곡나들목(육갑문) [글·사진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9호 (2019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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