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⑦ 열대의 섬 타히티 풍경 속 폴 고갱의 열정을 만나다

    입력 : 2019.07.31 15:30:43

  • 수 세기 동안 유럽인들에게 ‘신비의 섬’이자 ‘지상의 낙원’으로 추앙받은 타히티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남태평양의 파라다이스이다. 무엇보다 폴 고갱은 붓을 통해 자연의 태곳적 신비와 소박한 꿈을 지닌 원주민의 모습을 예술로 승화시켰고, 자기 삶의 종착역으로 삼았다. 고갱은 1891년 4월 프랑스 마르세유 항구를 떠나 60여 일만에 타히티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을 자신의 수필집 <노아 노아>를 통해 다음같이 설명했다. “63일간 우리는 견디기 어려운 기다림과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설렘을 가지고 변화 있는 향해 끝에, 모레아 섬을 돌아 최종 목적지인 타히티에 무사히 닻을 내렸다. 처음 보기에 이 작은 섬은 별로 색다른 것이 없었다. 다만 태고의 대홍수로 잠긴 산봉우리만 겨우 수면 위로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파리 미술계에서 혼혈아라는 이유로 늘 이방인으로 머물러야 했던 고갱은, 타히티에서도 주류에 들지 못했고 문명사회에서 몇 발짝 거리를 두며 가끔 무의식적인 충동과 절제할 수 없는 강한 에너지로 인해 이 섬 저 섬으로 옮겨 다녔다. 거대한 도시, 파리를 탈출해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 안식처를 마련했지만, 그는 이곳에서도 여러 섬을 떠돌며 보헤미안처럼 살았다. 프랑스에서 지상의 낙원을 찾아 타히티로 왔지만, 반 고흐 형제에 대한 그리움과 파리 미술계에서 교류하던 친구들, 그리고 다섯 명의 자식들과 아내… 이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자 고갱은 타히티에서 사무치는 고독감과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 고갱은 마음의 안정과 그림의 모델이 될 여인을 찾았다. 신은 고갱에게 14세의 아리따운 테마하나라는 원주민 소녀와 인연을 맺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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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세의 고갱, 14세의 테마하나는 대나무와 종려나무를 이용해 ‘파레’라고 하는 타히티의 전통 가옥을 직접 만든 후, 원시문명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테마하나가 아이를 낳자 잠깐이었지만, 고갱은 기쁨과 행복감에 사로잡혔고 그녀를 모델로 한 ‘망고를 든 여인(1892년)’과 원주민들을 모델로 한 ‘타히티의 연인들(1891년)’, 타히티말로 ‘진실의 순간’이라는 뜻의 ‘마하나 마아(1892년)’ 등을 그렸다. 하지만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매독으로 인해 몸은 더 아팠다. 테마하나와의 관계도 점점 소원해져 마침내 고갱은, 큰 결단을 내렸다. 그는 지독한 향수병과 가난 등으로 인해 1893년 6월, 2년 동안의 타히티 생활을 마치고 60여 점의 그림을 갖고 파리로 돌아왔다.

    2년 만에 파리 미술계로 돌아온 고갱은 타히티에서 가져온 그림을 전시하면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평가는 냉혹했다. 그래서 그는 1895년 2월 자신의 안식처이자 예술의 유토피아인 타히티로 다시 돌아왔다. 쓰라린 패배감과 미술에 대한 절망감에도 불구하고 고갱은 다시 붓을 들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계속 이어갔다. 1901년 고갱은 파리에서 타히티를 소재로 두 번째 전시회를 열었는데, 다행히도 파리 미술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렸다. 시련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화풍을 만든 고갱에게 파리 미술계는 찬사와 박수로 화답했다. 그때부터 그는 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고 유럽에서도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고갱은 도시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다시 타히티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어느 정도 보여줬지만, 다시 시작된 타히티에서의 생활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늘 가난했고 말년에는 먹을 것이 없어 자신의 그림과 먹을 것을 맞바꿔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을의 중국 상인은 고갱으로부터 얻은 데생을 물건 싸는 포장지로 이용했고, 타히티 백인들은 고갱이 그려 준 초상화를 창고에 처박아놓았고, 그림 선물을 아예 받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고갱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상의 낙원에서 마지막 생애를 사는 동안 자신의 예술적 영혼을 캔버스에 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이 시기에 고갱은 자신의 대표작인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완성했다. 고갱은 이 위대한 작품을 완성한 이후 몸 상태가 많이 나빠졌다. 모차르트가 죽기 전 4년 동안 위대한 작품을 많이 작곡했듯 고갱 또한 1901년부터 ‘아담과 이브’ ‘오두막 안의 타히티 여인들’ ‘부름’ ‘해병의 말 탄 사람들’ ‘원시의 이야기’ ‘부채를 든 아가씨’ 등 수준 높은 작품을 그렸다.

    마침내 위대한 후기 인상파 고갱은 1903년 5월 8일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심장이 멈추기 전까지 그의 이젤에는 미완성의 ‘눈 덮인 브르타뉴 마을’이 걸려 있었다. 프랑스의 브르타뉴는 마흔이 다 된 고갱이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예술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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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타히티에는 그의 흔적이 별로 없다. 그가 파페에테에서 머물 때 잠시 쓰던 아틀리에를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모조품이지만 유작들을 전시하고 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박물관에는 그의 영원한 친구인 빈센트 반 고흐를 위한 작은 전시관이 따로 마련돼 있는 것이 이채롭다. 물론 반 고흐의 작품들도 모두 모조품이지만, 고갱과 반 고흐의 불안한 60일간의 동거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고갱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반 고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고갱은 홀어머니 밑에서 궁핍한 가정생활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또한 프랑스 주류 사회에서 자신이 페루인의 피가 흐르는 ‘혼혈아’라는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 과장된 행동으로 자신의 속내를 감췄다. 하지만 반 고흐는 학식 있는 성직자와 부유한 화상을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나 불어와 라틴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정도로 어린 시절에 질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성장 배경이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프랑스 아를에서 만났을 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다소 가식적으로 자신의 열등감을 위장한 고갱과 광기와 발작 그리고 성직자로서 실패한 경험이 있는 반 고흐와의 공동체 작업은 이미 이별을 준비한 동거였다. 너무나 다른 성격이 이들을 더는 공동체 작업이라는 틀 속에 가둬 둘 수 없었다. 오만함과 도도함으로 무장한 고갱은 “예술은 지적인 귀족들만이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였다. 반면 반 고흐는 성직자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에게 있어 예술은 종교만큼이나 신성한 것이었다.

    예술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는 고갱과 반 고흐 사이의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었다. 또한 고갱은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이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비평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지만, 반 고흐는 고갱의 작업에 간섭하고 예술에 대해 논쟁하고 싶어 했다. 이런저런 이유가 복잡하게 얽혀 둘의 공동체 작업은 더는 지속되지 못했지만, 아를에서 짧은 동거는 두 거장이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암스테르담의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에서 고갱을 만나고, 타히티의 고갱 박물관에서 반 고흐를 만나는 것처럼 둘은 죽어서 공동체 작업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고갱이 미치도록 사랑한 타히티는 그의 그림 속에 남아 시공간을 넘어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작품 앞에 서면 잠깐이나마 그의 굴곡진 삶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7호 (2019년 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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