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승경의 1막1장] 오페라 <나비부인> 가냘픈 나비의 날개 누가 꺾었나

    입력 : 2019.05.30 15:17:08

  • ▶오페라 <나비부인>의 도시 나가사키 나가사키 카스텔라, 나가사키 짬뽕… 나가사키는 개성 있는 식도락가들의 입맛을 자극시키는 음식 메뉴의 본산지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전통음식이 아닌 카스텔라, 짬뽕은 나가사키의 독특한 역사적 산물이다.

    16세기 초반, 일본 서쪽 규슈지방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인에게서 포탄의 위력을 실감한 일본의 영주들은 앞다투어 선진무기를 확보하려 혈안이 되었다. 작은 어촌마을에 불과했던 나가사키는 정박이 안전한 만(灣)이라는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1571년부터 포르투갈을 위시하여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중국에 연이어 개항되는 신세가 되었다.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기독교 포교를 이유로 에도시대(1603~1867) 때는 일본 내 모든 도시의 외국인입항을 금지시켰음에도, 유독 나가사키만은 네덜란드 상인에게 개방했다. 300여 년간 나가사키는 서구문물을 맛볼 수 있는 일본 내 유일한 이국적 도시였다. 그래서 원조 격인 포르투갈의 가토 디 카스디유(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과자)보다 더 알려진 나가사키 카스텔라가 탄생하게 되었고 이주한 중국인 요리사에 의해 두 나라의 식문화를 혼합한 나가사키 짬뽕이 개발되었다. 외국인의 왕래가 잦았던 개항도시 나가사키는 이러한 이유로 오페라 <나비부인>의 배경이 되었고, 많은 오페라 애호가들은 나가사키의 가슴 저린 추억을 공유한다.
    사진설명
    ▶나비부인은 왜 나가사키에 살았을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에 공식적으로 유곽(遊郭)을 만들었고 이후 그는 임진왜란 출병병사들을 위해 이를 나가사키 현(縣)의 시마바라로 이전했다. 시마바라에는 늘어진 버드나무가지에 꽃잎이 많이 날린다. 여기에서 유곽에서 일하는 게이샤들을 지칭하는 ‘화류계(花柳界, 꽃 화·버들 류)’라는 용어가 나왔다. 도요토미가 실각한 후, 시마바라의 게이샤들은 인근 개항지 나가사키로 편입되었다. 17세기에는 나가사키 총인구가 12만 명이었는데, 외국인만을 상대로 하는 게이샤들은 7000명이나 되었다. 1858년, 일본은 미국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강제적으로 맺고 나가사키 외 4개항을 더 개항하였지만 200년 동안 이어온, 나가사키의 유곽은 끄떡없이 견고한 조직을 체계적으로 유지했다.

    게이샤들은 범람하는 서양 상품과 미국에 대한 동경과 공포가 뒤섞인 국민감정 속에서 입장을 확실히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미군에 배신당한 수많은 나비부인이 나가사키에 등장했다. 초창기 일본인들에게 역사적 치부를 건드리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상연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나가사키에서 자살한 어느 게이샤의 애달픈 이야기를 들은 선교사 부인은 본국으로 돌아가 이를 작가인 동생 존 루더 롱에게 들려주었다, 마침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프랑스 해군장교였던 피에르 로키의 소설 <오키쿠(국화부인)>가 일본에 대한 대중의 흥미를 자극시켜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었다. 루더 롱은 <국화부인>을 토대로 핑커톤이라는 미 해군과 게이샤 나비부인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를 잡지에 실었다. 우연히 이를 읽은 천부적인 극작가 데이비드 벨라스코는 바로 연극으로 <나비부인>을 제작해 무대에 올렸다. 관객은 끊이지 않았고 대성공이었다.
    사진설명
    ▶자포니즘(Japonism)의 신비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오페라 <나비부인> 19세기 문호를 개방한 일본인들은 앞선 서구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많은 일본인들을 유럽과 미국에 보냈다. 또한 자국의 예술품도 적극적으로 유럽에 소개하려 했다. 유럽에 수출된 도자기와 공예품을 포장했던 일본의 풍속목판화 <우키요에>가 유럽미술계를 강타한다. 모네, 고흐, 고갱을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우키요에>의 대담한 색채와 이국적인 표현방식에 매료되었고 이른바 자포니즘(Japonism)이라는 일본풍 사조는 서양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유럽인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시키는 중이었다. 일본의 가냘프고 순박한 게이샤에 대한 이야기는 유럽인들의 눈물샘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벨라스코의 연극 <나비부인>의 성공은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신작소재를 찾고 있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귀에 들어갔고 그는 곧 런던행 기차에 오른다. 극적 재미와 드라마틱한 스토리 그리고 주인공 나비부인에 대한 연민으로 푸치니는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했다. 판권을 계약하고 곧바로 작곡에 착수하고는 이탈리아의 일본인들을 수소문해 나가사키의 분위기와 일본의 전통 5음계를 공부하였고 대본작가를 선임해 작곡에 박차를 가했다. 교통사고를 당해 8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지는 우여곡절 끝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1904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그 대망의 오페라 첫 막을 올렸다. 그러나 푸치니의 거침없는 행보에 불만을 품은 반대파의 조직적인 방해공작으로 당일 극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 푸치니는 작품을 좀 더 보완하여 반대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브레시아극장에서 재공연을 올렸고 대대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오페라 <나비부인>은 푸치니의 대표작이자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공연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되었다. ▶이별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택해야 했던 여인

    막이 오르면 나비부인과 혼인을 올리기 위한 해군 장교 핑커톤은 미국영사 샤플레스와 함께 999년 동안 임대한 언덕 위의 집으로 향한다. 계약기간을 맘대로 바꿀 수 있다는 핑커톤의 거만한 말투에서 당시 일본 내 미군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계약기간으로 나비부인은 핑커톤의 진정성을 찰떡같이 믿는다. 나비부인의 집 앞 언덕으로 예상되는 나가사키의 외국인 거주지역 미나미야마테 언덕엔 현재 구라바엔 공원이 조성되었다.

    이 공원에는 1863년 스코틀랜드인 무기상 글로버의 저택을 비롯한 몇몇 저택이 현존하는데 오페라에서 묘사된 나가사키 항구가 한눈에 펼쳐지는 언덕 위 목조건물은 나비부인의 슬픔이 깃든 것만 같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다.

    사무라이 집안인 나비부인의 집안에서는 공공의 적 미군과 혼인을 하는 15세 나비부인을 파문시킨다. 아픔을 겪으면서도 나비부인은 핑커톤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결혼식을 강행하고 두 사람은 달빛이 비치는 가운데 사랑의 이중창을 부른다.

    2막은 그로부터 3년 뒤이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반드시 돌아온다는 약속을 하고 떠난 핑커톤은 소식 한 장 없다. 극심한 생활고로 나비부인은 아들과 함께 힘들게 살고 있다. 주변의 손가락질이나 구애요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핑커톤만을 기다린다. 고단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저 멀리 보이는 남편의 군함을 보고 기쁨에 겨워 그녀는 집안을 꽃으로 단장하며 밤을 지새우지만 핑커톤은 미국부인 케이트를 대동하고 나타난다. 이후 아이를 남편에게 보내기로 결심한 나비부인은 아버지가 자결한 단도로 죽음을 택한다.

    지고지순한 뮤즈를 찾아 헤매던 작곡가 푸치니는 나비부인 캐릭터를 매우 사랑했다. 그녀가 부르는 가사 하나하나, 멜로디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이국적 신비함과 유려한 연극적 음악을 선사해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그로부터 115년 후, 공연되는 노블아트오페라단의 <나비부인>은 원작의 가치와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재현함과 동시에 2019년의 관객 정서와 현대화된 무대에 맞게 풀어나갈 것이다.
    사진설명
    노블아트오페라단의 오페라 <나비부인> · 공연일시 : 2019년 5월 31일(금)~6월 2일(일) 금, 토 19:30 / 일 16:00

    · 공연장소 :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 출연 : 예술총감독┃신선섭

    지휘┃장윤성

    연출┃김숙영, 한지혜, 이다미, 신상근, 김동원, 박정민 등

    [황승경 국제오페라단장]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5호 (2019년 6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