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동진의 명화극장] 어디선가 본 듯 하지만, 그래서 더 흥미진진한 영화 <악인전>

    입력 : 2019.05.30 15:08:53

  • 오래 사귄 여자에 대해서는 늘 두 가지의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때로 지긋지긋하거나 그 반대거나. 영화도 마찬가지다. 익숙한 영화는 이야기의 뻔한 전개와 결말 때문에 종종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근데 한편으로는 그 익숙함 때문에 편안함을 느낀다. 주인공이 죽을지, 이야기가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튀게 될지 걱정하지 않게 된다. 중간에 화장실을 갔다 온들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갑자기 튀어 나와 비교적 장기 흥행에 성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넷플릭스를 통해 해외 판권도 많이 팔렸다는, 여기에 무엇보다 할리우드에 리메이크 판권이 나갔다는 얘기가 돌 만큼 인기 절정인 <악인전>이 바로 그런 경우다. 내용은 한 마디로 클리셰 덩어리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얘기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아니 그걸 아니까 오히려 재미가 있고 흥미가 진진하다. 그것 참 이상한 역설이다. 상업영화만이 갖는 특권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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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쇄살인마를 놓고 싸우는 형사vs조폭

    <악인전>은 콘셉트 하나만큼은 ‘섹시하다’. 샌드백 안에 상대 조폭 부하를 집어넣고 그걸 매달아 복싱 연습을 해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 만큼 잔인하고 폭력적인 갱스터 두목 장동수(마동석)는 이제 거칠 것이 없는 상황이다. 지역 전체를 거의 장악한 데다 불법 도박기를 설치해 돈을 다발로 벌어들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지역 내 경찰들도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상태다. 조폭 전담반 반장은 그를 커버치기에 바쁘다. 당연히 검은 돈의 거래가 오고 가는 중이다. 그런데 단 한 명 또라이 경찰이 문제다. 정태석(김무열)이라는 인물인데, 강력반 팀장인 이 형사는 조폭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절대로 못한 인물이 아니다. 그도 꽤 폭력적이다. 일단 때려잡고 보는 스타일이다. 이 둘에게 공통의 문제가 생긴다. 심야에 지역 일대를 돌아다니며 칼로 사람을 난자해 죽이는 연쇄 살인범 강경호(김성규) 때문이다. 장동수는 조폭 두목답지 않게 얼마 전 이 범인에게 칼을 맞고 기사회생하게 된다. 그는 정태석에게 공조 수사를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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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놈 둘이 더 나쁜 놈 한 명을 잡는 거지?”

    누가 먼저 잡게 되면 어떻게 나눌 것이냐는 정태석의 질문에 장동수는 또 이런 명언 아닌 명언을 남긴다.

    “먼저 잡는 놈이 임자지.”

    정태석은 그를 먼저 잡아 법대로의 처분을 생각한다. 하지만 장동수의 생각은 판이하게 다르다. ‘갈갈이 찢어서 죽일 것’이라며 이를 간다.

    영화의 향배는 바로 이 순간부터 재미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범인은 이유 없이 선량한 사람을 수십 번의 칼질로 죽이는, 사람이 죽어가는 순간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다.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들은 장동수 마냥 저런 ‘짐승’은 똑같이 잔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응징하고 보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장동수의 마음에 이입(移入)하게 된다는 말이다. 영화 속 싸움은 두 명의 형사-조폭 두목vs연쇄살인마의 추격전이 아니라 서로 잡으려고 기싸움을 벌이는 형사vs조폭의 싸움으로 전개된다. 관객들의 관심은 단 하나다. 살인마가 결국엔 잡힌다는 걸 안다. 다만 그가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인가에 주목한다. 적당한 사법 절차와 처리를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피에는 피의 복수. 영화 <악인전>에는 진정한 정의를 위해서라면 우리의 사회적, 공적 기제(機制)들이 조폭 두목만큼 잔인해지기를 원하는 심리가 담겨있다. 저 정도는 갚아줘야 한다는 사회적 보상 심리가 담겨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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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악인전>의 결말은 영화가 그 같은 사회 심리를 반영하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폭발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의 폭발은 좋은 일이 아니다. 영화가 그걸 여과시켜 줌으로써 사회적으로는 오히려 겉으로나마 평온을 되찾게 되는 셈인데, 일종의 카타르시스다. 장자연 사건이 다시 한 번 덮어지고, 김학의 사건이 오리무중, 유야무야의 길을 나서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환멸을 느낀다. 갱스터 무비의 얘기는 뻔한데, 그런 영화처럼 현실은 뻔한 결말의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는 척한다. 차라리 헤매면 낫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못 찾는 척한다. 영화 속 대사처럼 ‘카바를 치려 한다.’

    이럴 때 대중들은 ‘마블리’ 마동석의 대사처럼 누군가 “갈기갈기 찢어서 밖에 내다 걸어 줄 거야”라고 말하는 걸 듣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가 폭력적으로 보이는 척, 사실상 그다지 폭력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건 현실의 폭력이 영화의 폭력을 뛰어 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악인전>을 그렇고 그런 액션영화라고 간주하고 치부하기에는 현실의 폭력이 심상치 않다. 자못 엄중한 상황이다. 한국영화가 액션의 난이도를 가볍게 뛰어 넘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악인전>의 경우 캐릭터 개개인의 액션 합이 사실감이 넘친다는 측면에서 세계시장에서 이 영화가 잘 팔릴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입증해 낸다. 한 마디로 시원시원하다. 액션의 합, 그 디자인의 수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이 영화의 액션은 통쾌함에 그 콘셉트가 담겨있다. 속 시원한 응징이 범인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공 둘의 액션이 저돌적이고 몸을 도사리지 않는 수준이어야 하며 <악인전>은 바로 그 점에서 만족도를 준다. 진짜 나쁜 놈 한 명을 때려잡기 위해서라면 마동석이나 김무열처럼 나쁜 놈 둘, 혹은 셋, 아니면 열 명이라도 나섰으면 좋겠다. 아마도 영화 <악인전>이 사람들에게 주는 소망 같은 것은 그 점이 아닐까 싶다. 나쁜 놈이 자신이 나쁜 놈이라는 것을 자각하거나 자인하게 되는 것은 자기보다 더 나쁜 놈을 만날 때다. 악을 평정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악밖에 없다. 이 시대에는 악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악인전>의 뜻은 바로 그 점을 얘기하고 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5호 (2019년 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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