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식평론가 윤덕노의 음食經제] 원래 약이던 술… 중세까지 고부가가치 의약품 소주·위스키 등 증류주는 모두 생명수

    입력 : 2019.05.08 17:06:48

  • 음식이 우리 입속으로 들어오게 되기까지의 과정, 음식의 역사를 알아보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가 많다. 술도 음식인 만큼 예외가 아닌데 별별 역사적 사실이 다 녹아 있다. 먼저 술이란 무엇일까? 관점에 따라 다양한 정의가 내려질 수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술의 기원, 그리고 술의 정의를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이렇다.

    ‘술은 생명수다.’

    술 좋아하는 애주가의 흰소리 섞인 술 예찬 같지만 실제로 술은 생명수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옛날부터 술을 약주라고 불렀다. 물론 모든 술이 약주는 아니고 소주를 포함해 독한 증류주가 여기에 해당된다. 막걸리나 맥주, 포도주라면 그래도 이해를 하겠는데 왜 하필 독한 술이 약주고 생명수인지를 따지려면 먼저 세계 여러 나라의 증류주, 그 이름을 보면 된다. 옛 사람들이 독한 술을 왜 생명수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사진설명
    ▶진로는 순수 증류주라는 뜻

    우리나라와 일본의 대표적인 증류주는 소주다. 도수가 20도 안팎인 술인데 소주가 무슨 독한 술이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 소주는 희석식이기 때문이고 옛날 오리지널 소주는 70도를 훌쩍 넘었다. 소주는 한자로 태울 소(燒)와 술 주(酒)를 쓰니 태워 만든 술이라는 뜻이다. 발효주를 다시 끓여 만들었기에 생긴 이름이다. 중국술은 배갈(白乾兒), 즉 백주(白酒)인데 여기서 ‘백’은 희다는 뜻이 아니라 맑고 투명하다는 의미다. 고량을 발효시켜 얻은 술을 끓이고 이때 나오는 수증기를 맑은 이슬로 맺히게 해 얻는 술이다. 소주나 백주 모두 맑은 술이기에 고문헌에서는 이슬 같은 술이라고 하여 이슬 로(露)자를 써서 노주(露酒)라고 했다. 진로는 진짜 맑은 이슬인 참 이슬, 즉 순수 증류주라는 뜻이다.

    서양 술도 비슷하다. 포도주를 증류해 만드는 브랜디(Brandy)도 태운 술이라는 뜻이니 우리말로 직역하면 소주가 된다. 영어 브랜디의 어원은 네덜란드어 브란데웨인으로, 끓인 포도주(Burnt Wine)에서 비롯됐다. 태워 만든 술, 증류주는 알코올의 에센스만 모아 순도가 높으니 생명수가 되는데,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영어인 브랜디 대신 오드비(Eaux-de-Vie)라고 한다. ‘생명의 물’이라는 뜻이다. 맥주를 증류한 위스키 역시 생명의 물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위스키(Whisky)의 어원은 고대 게르만 언어인 켈트어 우스게바아(Usquebaugh)로 생명수라는 뜻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막걸리, 맥주, 포도주와 달리 소주와 백주, 위스키, 브랜디 등의 증류주가 생명수로 대접받았던 이유는 옛날에는 이들이 모두 술 이전에 약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술을 약주라고 부르는 것도 실제 소주가 약이었기 때문인데, 옛 문헌 곳곳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단종이 즉위하던 해인 1452년, 부친상을 당해 심신이 허약해진 단종에게 중신들이 “주상께서 나이가 어리시고 혈기가 부족한 데다 날씨가 덥고 무더우니 소주를 드시라”고 권하는 대목이 보인다. 단종은 12살 때 왕이 됐으니 어린 아이한테 술을 권한 셈인데 이때 소주는 술이 아니라 약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과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에서 위스키, 브랜디는 술이 아닌 각종 질병의 치료 목적으로 쓰였다. 러시아의 술 보드카도 예외가 아니어서 1405년에 의약품으로 문헌에 처음 등장했다. 이 무렵 증류주는 동서양 모두 아픈 사람이 마시면 병이 쉽게 낫는다고 해서 기적의 약으로 불렸으니 당시에는 만병통치약이었던 셈이다. 16세기 말 명나라 때 의학서인 <본초강목>에서는 소주(백주)를 적당량 마시면 추위를 물리치고 습한 기운을 가라앉히며 울적한 기분을 달래준다고 처방했다. 이 무렵 소주는 알코올 도수가 70~80도에 육박했으니 한 잔만 마셔도 심장이 쿵쿵 뛰고 불편한 기분이 사라지며 사람에 따라서는 회춘한 기분까지 들었을 것이니 효과가 뛰어난 약이었다. 비장의 만병통치약으로 값도 엄청 비싼 고부가가치 제품이었다. 때문에 중세 이전까지는 주로 의사와 연금술사가 만들었다. ▶금과 옥, 비단에 버금가는 사치스런 술, 증류주

    발효주와 달리 증류주는 옛날 기준으로 보면 고도의 과학적 지식이 필요한 첨단 약품이었는데 최초의 증류기술은 기원전 2000년 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술이 아닌 향수와 향료 제조에 필요한 기술이었다.

    증류주는 보통 금주의 나라인 아랍에서 발달해 세계에 퍼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유는 8세기 이후 아랍 문헌에 알코올의 어원이 된 아랍어 알 코올(Al Kohl)이 자주 보이는 데다 이 무렵 아랍에서 연금술이 크게 발달했기 때문이다. 연금술은 흔히 주술적 수단을 이용해 비금속을 황금과 같은 귀금속으로 바꾸는 황당한 기술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의 물질을 어떤 작용을 통해 다른 물질로 바꾸는 화학반응에 대한 연구다. 8~9세기 아랍에서는 이런 연금술 연구가 활발했고 이를 통해 염산, 황산이나 소다와 같은 물질이 만들어졌다. 증류주인 알코올 역시 이런 연금술을 통해 개발됐는데 알코올 발전과 관련해 거론되는 이름이 8세기에 활동했던 유명한 학자로, 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연금술사인 자비르 이븐 하이얀이 있다. 자비르는 증류 실험을 통해 순수한 물질을 얻을 수 있음을 증명한 최초의 학자로 꼽힌다. 그리고 10세기 아랍의 의사 알 라지는 직접 알코올을 만들어낸 의사이자 연금술사로 알려져 있다.

    아랍에서 발달한 증류기술은 원나라 때인 12세기 말에 아시아에 전해져 13세기 중반에는 중국 전역은 물론 고려에까지 전해졌을 정도로 만 천하에 퍼졌다. 기록상으로는 원나라 때인 14세기 초, <거가필용>이라는 요리책에 증류주인 소주, 현대 중국 명칭으로는 백주가 보이고 또 원나라 황실 어의가 1320년 무렵에 집필한 요리책 <음선정요>에 다시 증류주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원나라 황실 요리책인 음선정요에 만드는 법이 수록된 점에 비춰 당시 소주가 아주 귀한 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는 <고려사>에 우왕 원년인 1375년에 처음으로 소주라는 술이 보인다. “요즘은 사람들이 검소함을 알지 못하고 사치스럽게 낭비하며 재물을 함부로 쓰고 있으니 지금부터는 소주와 화려한 수를 놓은 비단, 금이나 옥으로 만든 그릇 등의 물건을 모두 사용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소주가 금과 옥, 비단에 버금가는 사치스런 술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증류주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중세 무렵으로 기록은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보인다. 독일의 의사인 알베르투스 마구누스가 13세기 말에 최초로 증류 과정을 명확하게 적은 기록이 있고, 14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의사이자 연금술사인 아르날두스가 수많은 아랍의 의학서적을 번역하면서 증류주를 아쿠아 비테(Aqua Vitae), 즉 생명수라고 불렀다. 하지만 퍼지기 시작한 것은 동양보다 늦은 15세기 무렵인데 처음에는 주로 수도원의 수도승과 연금술사, 의사들 사이에서 의료용으로 증류주를 만들었다. 그러다 16~17세기에 이르러서야 증류주를 의료 목적이 아닌 상업용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증류주가 상업화되는 데는 증류 기술의 발달과 함께 우연과 역사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브랜디의 개발과 상업화에는 네덜란드의 공이 컸다. 네덜란드어가 브랜디의 어원이 된 배경인데, 16세기 프랑스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위그노 전쟁이 벌어지면서 코냑 지방 포도밭이 황폐화됐다. 전쟁이 끝난 후 와인을 만들었는데 포도 질 때문에 좋은 와인이 나오지 않자 당시 와인 무역을 담당했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와인을 증류할 것을 권해서 브랜디가 탄생했다고 한다. 와인을 끓여 브랜디로 만들면 장점이 많았다. 보존성이 좋아 운송이 편하며 도수가 세져 부가가치가 높아졌다. 게다가 당시 전쟁이 잦았던 유럽에서 브랜디는 여러 면으로 유용했다. 용기를 북돋아주고, 마취에도 쓰였다. 전쟁이 잦아지면서 수요도 크게 늘었다. 브랜디와 위스키 나아가 진과 럼, 보드카 등 유럽에서 증류주가 널리 퍼지게 된 배경 중 하나다. 기분 좋으라고 마시는 소주 한 잔, 무심코 약주 한 잔 드시라고 권하는 말이지만, 술 이름이 엉뚱하게 태운 술(소주, 백주, 브랜디), 혹은 생명수(위스키, 오드 비)라고 불리게 된 배경에는 이렇게 과학기술과 경제, 전쟁과 정치, 문화 등의 역사가 복합적으로 녹아 있다.

    [윤덕노 음식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4호 (2019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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