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동진의 명화극장] 영화 <바이스> ‘악의 축’ 용어 만든 美 부통령 딕 체니의 부활

    입력 : 2019.04.30 14:54:10

  • 할리우드 영화가 종종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역사 속에 실재하는 인물들을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다. 할리우드 배우들은 대개 해당 인물과 똑같은 체형, 똑같은 헤어스타일, 똑같은 턱 살, 똑같은 배 둘레 등등을 창조해 낸다. 그런 외형은 기본이다. 말투와 악센트, 손 버릇에 입버릇까지 그대로 모사(模寫)해 낸다. 그것도 모자라 할리우드 기술진은 완벽한 특수 분장의 마술을 구사한다.

    영화 <바이스>가 지난 2월 말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그 클립이 공개됐을 때 그랬다. 할리우드의 그 같은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사람들은 두 가지 점에서 혼란에 빠졌다. 남우주연상 후보작인데 그럼에도 혹시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아니면 실제 인물이 영화 속에서도 주인공을 맡은 것인가, 이건 리얼인가 환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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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바이스>는 조지 워커(W) 부시 시절, 부통령을 맡았던 딕 체니의 얘기를 담는다. 이 영화에는 딕 체니 역할을 딕 체니 스스로가 맡은 것이 아니냐는 웅성거림이 나올 만큼 그와 완벽하게 똑 닮은 배우가 나오는데 바로 크리스찬 베일이다. 단 1초만 생각해 봐도 크리스찬 베일과 딕 체니는 전혀 다른 외모를 지녔다. 하지만 베일은 그를 연기하기 위해 살을 찌우고(아무리 그래도 체형을 똑같이 할 만큼 비슷하게 살을 찌우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머리를 삭발한 후에 그와 같은 모양으로 길러냈다. 걸음걸이를(갓난아이가 그러는 것처럼) 새로 배우고 수개월의 독학 끝에 딕 체니가 말할 때 입술 모양을 일그러뜨리는 특유의 표정까지 완벽하게 구사하게 됐다. 그는 자신을 딕 체니라고 생각했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스스로 진짜라고 확신해야만 사람들을 속일 수가 있다. 일종의 정신병인 셈인데, 어찌 보면 배우들의 메소드 연기라는 것도 같은 이치다. 연기가 진짜처럼 보이려면 그 역할의 인물 그 자체가 돼야 한다고 배우들은 믿는다. 메소드 연기를 창시한 콘스탄틴 세르게이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이론이 그것이다.(크리스찬 베일만큼 현존하는 배우 중 메소드 연기에 강한 배우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인데 그는 스티븐 스필버그 연출의 <링컨>에서 링컨 역할을 맡기 위해 오른 손잡이에서 왼손잡이로 바꾸고 링컨처럼 수염을 기르고 체중을 맞췄으며, 무려 2년을 링컨처럼 생각하고 산 후에야 촬영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스>는 딕 체니를 재현해내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를 깨닫게 만든다. 사람들은 딕 체니의 영화적 환생으로 압도당한다. 사실 이 영화는 제목이 갖는 중의성(重義性), 양가성(兩價性)만으로도 그 내용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바이스(Vice)’는 부통령의 부(副)를 얘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악행, 부도덕, 결함, 나쁜 버릇을 얘기할 때 쓰는 단어이기도 하다. 2001~2008년까지 부시의 1, 2기 내각을 통틀어 부통령을 지낸 딕 체니야말로 미국 역사에서 ‘악의 축’을 횡보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 이 영화가 하려는 궁극의 얘기인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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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 ‘악의 축(Axis of Evil)’은 체니 스스로가 부시의 입을 빌어 북한을 겨냥해 만들어 낸 어휘였다. 능력도 없고 자격도 모자랐던 조지 W 부시는 이 말을 재임기간 내내 앵무새처럼 되새김질하며 국제정세를 경화(硬化)시키고 북핵 위기를 고조시켰는데, 사실은 이를 자신의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는 의도였다. 악의 축은 조지 부시와 딕 체니, 그리고 이 둘과 함께 역사적 음모를 획책해낸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국무장관이 함께 형성해낸 것으로 그 중심인물은 대통령인 부시가 아니라 명백히 딕 체니였다. 영화 <바이스>는 ‘3인의 악의 축’의 형성 과정과 그 전개, 그리고 그것이 미국사회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얘기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만든 아담 멕케이(<빅 쇼트> 연출, <오 루시> 기획 등)는 왜 지금 이런 내용의 작품을 내놓은 것일까. 그건 아마도 버락 오바마의 8년 재임 기간 너머에 있었던 공화당 대통령 부시의 시절이 지금 트럼프 시대에 또 한 번 반복되고 있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한 수렁으로 미국 사회가 끌려 들어가고 있음을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시 시절은 지금에 비하면 코미디에 불과한 것이다, 약과였다, 웃고 넘어갈 문제였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그때 일은 지금 보면서 낄낄댈 수 있을지언정 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얘기인 셈이다. 실제로 영화는 시종 일관 유머를 잃지 않는다. 냉소와 풍자가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다. 영화 속 조지 W 부시(샘 록웰)의 모습이 그 같은 독소(毒笑)의 정점을 보여 준다. 부시는 영화 속에서 늘 술에 취해 있거나(아버지인 조지 H.W. 부시가 레이건 대통령 재임 시절 부통령이었을 때), 어떤 결정도 스스로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거나(9·11 테러가 일어나고 이라크를 치네 마네 하고 있을 때), 그것도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거나(딕 체니를 부통령으로 임명하기 위해 그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또 그것도 아니면 버릇처럼 책상 밑에서 방정맞게 다리를 떨고 앉아 있는 모습(대통령의 담화를 발표하는 생중계 과정에서)이다. 딕 체니는 미국 역사상 그렇게 가장 ‘바보 같았던’ 대통령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최대화한다. 딕 체니의 부인 린(에이미 아담스)은 그가 부통령직을 수락하려 하자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그랬잖아. 미국의 부통령이란 누가 죽어야만 권력을 가질 수 있다고. 근데 굳이 왜 하려고 그래?”

    딕 체니는 조지 부시를 정치적으로 무용하게 만들 수 있다고, 그러니까 그를 ‘살아있는 시체’로 만들 수 있다고 내다봤다. 딕 체니는 권력을 추구하는 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머리가 좋고 영리했으며, 그는 부시 시대에 부통령이 되는 것이 결코 부통령으로만 끝나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해 냈다. 그리고 그 계기가 바로 9·11테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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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바이스>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는 결코 한 명의 인물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지만 짧은 기간 내에는 때론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 인물이 슈퍼 히어로였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반대일 경우가 많고 그래서 역사는 일보 전진 이보 후퇴를 반복하게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의 현대사는 딕 체니로 인해 수십 년을 후퇴했다가(그가 만든 국토안보부는 테러 혐의가 인정되는 외국인은 해외에서라면 어디서든 영장 없이 체포 구금, 납치할 수 있었고 그걸 위해 쿠바에 있는 미국령 콴타나모의 군 수용시설을 이용했으며 또 그곳에서는 물고문을 비롯한 각종 인권 유린 행위가 벌어졌다.) 오바마 때 반 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가 지금 트럼프 시대에 이르러 다시 수십 년을 뒤로 옮겨 갔는데, 이 영화를 만든 제작진은 그게 다 부시 시절의 딕 체니의 악습을 올바로 분석하거나 비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같은 역사적 무지가 반복되는 한 미국 사회는 희망이 없음을 얘기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에서는 이라크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됐는지, 그게 정말 알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이후 이라크가 보유했다고 알려진 대량살상무기에 의해 또 다시 미국이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내다 봤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모든 게 딕 체니 일파가 만든 ‘가짜 뉴스’ 때문이었는지, 국민 안보를 볼모로 벌인 장난질에 불과했던 것인지를 갈파한다. 딕 체니는 부시의 아버지 시절 국방장관을 지내다가 빌 클린턴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 내 민간 군사기업인 핼리버튼의 CEO로 옮겨갔고 그 지분을 계속 유지했는데 그가 벌인 이라크 전쟁으로 이 방위산업체는 주가가 치솟으며 수백 배의 시세 차익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이라크 전쟁이 과연 누구의,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전쟁이었는지를 영화는 뒤늦게나마, 비교적 쉽게 설명해 낸다.

    영화는 알카에다 이후 최고, 최악의 테러 집단으로 명명됐던 ISIS와 이 조직의 수장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가 딕 체니의 정보 조직에 의해 어떻게 국제적 인물로 급부상하게 되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진실로 어이가 없다. 이 영화가 결국 코미디로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한 인물의 잘못된 세계관과 편협한 이데올로기로 인해 미국과 세계 전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벌여 왔고 또 그의 농단에 춤춰 왔는가를 영화 내내 허무한 웃음을 통해 뼛속 깊이 깨닫게 된다.

    역설적으로는 여전히 생존해 있는 정치인들에 대해 이처럼 독설 가득한 내용의 영화를 만들고 발표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미국 사회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이 영화를 보는 실제 부시와 딕 체니의 심경은 과연 어떨까. 우리 사회라면 진작 명예훼손 소송이 벌어지고 상영 중지 가처분 신청 같은 것이 잇따르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과거 정치인, 특히 독재자들에 대해 제대로 된 풍자 드라마가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영화 <바이스>는 그런 점에서 전형적인 미국의 정치 드라마인 척 사실은 온 세상의 모든 정치사회적, 역사적 우행(愚行)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매경의 지식인들이라면 필견(必見)해야 할 작품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4호 (2019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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