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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② 폴란드서 만난 피아노의 시인 쇼팽, 바르샤바는 청년 음악가의 흔적 가득
입력 : 2019.03.12 15: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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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토의 왕국’ 폴란드. 그곳엔 쇼팽이 있어 언제나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손끝의 움직임에 따라 울려 퍼지는 다양한 높낮이의 화음이 달콤하다. 가끔 쇼팽의 선율은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담벼락에 매달려 있는 담쟁이 잎처럼 가련하면서도 애달프다.
‘피아노의 시인’, ‘피아노의 신’, ‘피아노의 신사’ 등 피아노에 관해서 최고의 찬사와 존경을 받는 쇼팽. 마흔 살에 요절한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 그 자체였다.
1810년 2월 22일, 쇼팽은 바르샤바에서 50㎞ 정도 떨어진 ‘젤라조바 볼라’라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볼라는 우리에게 낯선 도시이지만, 그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의미 있는 예술의 성지이다. 쇼팽은 작고 아담한 이 마을에서 열 살까지 살았고, 그 후엔 바르샤바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녹턴의 아름다운 선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화려하게 치장되거나 고급스러운 가구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소박하고 서민적인 식탁과 의자 그리고 몇 개의 가구들이 쇼팽 가족의 검소함을 보여준다. 1층에는 쇼팽과 그의 부모님 초상화가 걸려있고, 기념 연주회 때마다 사용하는 검은 피아노가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2층에는 쇼팽의 자화상, 가족사진, 악보, 악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연필로 직접 그린 그림으로 그의 음악만큼이나 섬세하고 여성적인 감수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스피커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쇼팽의 음악을 들으며 생가 내부를 이리저리 걷다 보면, 낮게 드리워진 창문을 등지고 소년 쇼팽이 낡은 오르간에 앉아 지프니 선생님으로부터 열심히 건반 위에 손가락 놓는 법을 배우고 있는 모습이 주마등처럼 그려진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에서 만들어 내는 선율은 쇼팽에 대한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해, 좀 더 그의 세계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어린 쇼팽에게 처음으로 피아노 치는 법과 예술의 혼을 불어넣어 준 사람은 환갑의 나이를 훌쩍 넘긴 지프니 선생이다. 술을 좋아하고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지프니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모차르트의 음악적 지식을 쇼팽에게 가르치며, 자신이 이루지 못한 소망을 어린 천재를 통해 이루고 싶어 했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그에게서 점점 천재성이 배어나고, 더 나아가 자신 앞에서 즉흥 연주를 선보였을 때 지프니는 자신의 수준을 넘어 새로운 악상을 창조해 내는 쇼팽의 능력에 깊이 감동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준 쇼팽은 폴란드 상류 사회에 금방 소문이 퍼져 명망 있는 귀족이나 정치가 집에 초대되는 영광을 얻었다. 특히 15세가 되던 해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1세 앞에서 바르샤바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멋진 연주를 선보여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 후 쇼팽은 가까운 이웃 나라 귀족들에게 초빙되어 연주 여행을 떠났고, 상류층 사람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자연스럽게 우아한 귀공자의 모습과 인품을 지닌 청년으로 성장한다. 사춘기를 벗어날 무렵 쇼팽은 자신의 음악적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한 예술가의 연주를 듣게 된다. 1829년 바르샤바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명 바이올린 연주자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쇼팽은 깊은 감명과 예술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바르샤바는 청년 시절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쇼팽이 한 여인을 사랑했던 바르샤바 음악대학교와 그의 심장이 묻힌 성 십자교회는 아주 의미 있는 곳이다.
폴란드를 비롯해 동유럽 전역에 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인 1826년, 만 16세 나이에 바르샤바 음악대학교에 입학한 쇼팽. 학업과 연주에 전념할수록 음악은 성숙해지고, 감수성도 더욱 예민해졌다. 이때 쇼팽에게 동갑내기이자 오페라 가수를 꿈꾸는 ‘콘스탄치아 글라드코프스카’가 나타났다. 하지만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쇼팽에게 콘스탄치아는 저 멀리 있는 이상적인 비너스에 불과했다. 콘스탄치아에게 말 한마디도 제대로 붙여 보지 못하고, 그는 다락방에 처박혀 가슴을 애태우며 열심히 음악에만 매달려야 했다.
1829년 10월 3일 절친인 티투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콘스탄치아에 대한 쇼팽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내가 진심으로 숭배할 수 있는 이상형을 찾았다네. 매일 밤 그녀의 꿈을 꿀 정도야. 그러나 그녀를 처음 본 지 6개월이 지나도록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있네. 협주곡 F 단조의 느린 악장(Larghetto)을 작곡하면서 그녀를 떠올리곤 하지….”
몇 개월 동안 가슴앓이를 하면서 이루지 못한 그의 사랑은 음악 속에 녹아들었다. 마침내 쇼팽은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만들었고, 이듬해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애절한 사랑의 슬픔을 담은 피아노 협주곡은 콘스탄치아에게 헌정되지 못하고, 1833년 파리에서 만난 포토츠카 백작 부인에게 헌정되었다.
학교를 등지고 맞은편에 있는 성 십자교회로 가면 또 다른 쇼팽의 영혼을 만날 수 있다. 쇼팽은 20세에 조국 폴란드를 등지고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로 갔으며, 죽어서야 고향 하늘 아래에 묻혔다. 그가 프랑스에서 삶을 마감하자 폴란드인들은 그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 오려 했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장례식도 계속 연기되었다. 쇼팽이 공식적으로 사망한 날짜는 1849년 10월 17일이지만 쇼팽의 장례식은 2주가 지난 10월 30일 성 마들렌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장례식이 늦게 치러진 이유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장례식 곡으로 연주해달라는 유언 때문이었다. 당시 성 마들렌 교회는 합창단에 여자 성악가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연기됐다. 결국 교회 측에서 쇼팽의 유언을 고려해 여자 성악가의 노래를 부르게 함으로써 장례식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파리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묻히고, 심장은 그의 누이가 바르샤바 성 십자교회에 묻었다. 죽어서도 두 개의 조국 폴란드와 프랑스에 각각 묻히게 된 것이다.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여덟 살 때 공연했던 천재 음악가 쇼팽. 그는 일생 200여 곡에 이르는 피아노곡을 작곡하는 데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즉흥곡, 녹턴, 마주르카, 왈츠 등 다양한 형식에 도전했던 쇼팽은 ‘피아노의 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글을 읽고 쓰기도 전에 어머니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쇼팽 음악의 원천이 아닐까? 어릴 적부터 자신만의 특유한 감성을 피아노를 통해 예술로 승화시킨 쇼팽. 그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으며 성 십자교회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했지만, 그의 음악은 바람과 구름이 되어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예술로 남았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2호 (2019년 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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