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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의 보르도 와인 이야기] 타국까지 생산지 확장한 보르도 와인의 전략
입력 : 2019.02.13 16:4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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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의 영향 때문일까? 많은 사람들은 예술가나 장인, 인간문화재, 농부 같은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욕망과 관계없이 순수한 직업 활동을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 중에 예술가를 둔 사람들은 그들도 돈을 벌고 세금을 내며, 어떤 경우에는 우리보다 더 세속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고객들 앞에서는 포도즙으로 얼룩진 작업복에 경운기(트랙터)를 운전하며 세상 돌아가는 것과 다르게 너그럽고 소박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와인 농부들 중에서도 큰돈을 벌어 주말에는 스포츠카를 몰거나 부동산과 주식투자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보르도의 5대 샤토를 비롯한 세계적인 명품 와인 회사의 와인 메이커들은 장인 취급을 받고,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아이돌만큼 인기가 있다. 하지만 와이너리들도 회사인 만큼 와인 생산자들 역시 ‘매출 목표’나 ‘비용 절감’과 같이 보통의 회사들에서 요구되는 의무들을 피할 수 없다. 나는 보르도에 거주할 때 사업에서 진 빚을 갚기 위해 포도밭에서 일하며 재기를 꿈꾸는 사업가를 본 적도 있고, 할아버지·아버지로 이어져온 저가 포도원액 납품업체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한 젊은 와인 농부들과도 어울린 적이 있다. 그들이 삶을 마주하는 방식은 미래를 고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르도의 고급 포도원들도 품질을 개선하는 노력만큼이나 심각하게 비즈니스에 대한 고민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매출을 늘리는가 하는 것이다. 매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생산량을 늘려야 하는데 유럽의 포도원들은 물리적인 한계와 규제 때문에 포도밭을 넓히기가 쉽지 않다.
보르도 와인의 선구자들은 마치 그들의 선조들이 와인을 팔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했던 것처럼 제2의 보르도 와인을 무한히 만들 수 있는 꿈의 생산지를 찾기 위해 일찌감치 시야를 외부로 돌렸다. 이미 1980년대에 ‘샤토 라피트 로칠드’는 칠레에 진출, ‘로스 바스코스(Los Vascos)’를 설립하였고, 뒤이어 포르투갈에도 ‘킨타도 카르모(Quinta do Carmo)’의 포도밭을 일구었다. 이에 뒤질 세라 사촌인 ‘무통 로칠드’ 역시 칠레에는 ‘알마비바(Almaviva)’, 캘리포니아에서는 로버트 몬다비와의 합작으로 ‘오퍼스 원(Opus One)’을 만들었다. 같은 캘리포니아에 ‘페트뤼스’를 소유한 무엑스 가문이 ‘도미누스(Dominus)’를, 아르헨티나에서는 세계적인 컨설턴트 미셸 롤랑을 위시한 와인 메이커들이 ‘클로 데 로스 시에테(Clos de Los Siete)’ 프로젝트를, 남아공에서는 ‘샤토 클라크’를 소유한 ‘에드몽 로칠드’가 ‘루퍼트 앤 로칠드(Rupert and Rothschild)’를 만들었다. 보르도 와이너리들이 해외에서 만든 와인들은 대체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알마비바나 오퍼스 원은 칠레와 캘리포니아의 대표 명품 와인으로 인정받고 있고, 로스 바스코스는 지난 2012년 이마트 히트 상품에 선정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지역의 농가와 와인 회사들에게 기술과 노하우를 전달하며 지역의 와인 비즈니스가 성장하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1997년 무통 로칠드와 함께 알마비바를 만들었던 ‘콘차이토로’라는 칠레 와인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5개의 와인회사 중에 하나로 성장했는데, 흥미로운 건 세계 5대 와인 회사 중 프랑스 와인 회사가 없다는 것이다.
해외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카베르네 소비뇽의 제국은 프랑스 내부에서는 보르도 밖으로 그리 멀리 뻗어나가지 못했다. 어쩌면 부르고뉴 지역에서는 피노누아, 리옹(Lyon)과 아비뇽(Avignon) 사이에서는 시라와 그러나슈와 같이 다른 지역에는 보르도 스타일이 침투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지역에 맞는 토착 품종과 노하우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보르도 와인업자들은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 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일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보르도의 DNA가 가장 잘 접목될 만한 프랑스 지역은 지중해에 인접한 랑그독(Lan guedoc) 지역이다. 날씨도 따뜻하고, 무엇보다 덜 개발된 넓은 포도밭을 갖고 있다. 보르도의 와인 회사들은 이 지역의 포도밭을 직접 소유하거나 혹은 지역 와인회사들의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이곳을 고급 와인의 생산지로 삼기보다는 그들의 고객이 요구하는 저가 와인들을 위한 포트폴리오 전략 정도로만 활용해왔다. 프랑스의 남부도시 몽펠리에(Montpellier)에는 1289년에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다. 이 몽펠리에를 중심으로 한 랑그독 지역은 지중해에 인접한 지리적 특성 덕분에 일찌감치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보르도나 부르고뉴 혹은 어느 프랑스의 지역보다 오래전부터 와인을 생산해 왔다. 필록세라라는 해충이 번진 19세기 말에는 보르도와 부르고뉴를 능가하는 고급 와인 생산지가 될 기회도 있었지만,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포도밭과 양조장의 복구도 다른 지역보다 늦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지역의 와인 경기도 후퇴하고 말았다. 와인 생산자들도 최근까지 부가가치가 높은 와인보다는 ‘싸고 많은 양’에 초점을 두어 와인을 만들어왔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스페인과 남미의 와인들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지역 와인농가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정부의 농업 정책에 저항하는 데모도 많고 인근 스페인에서 수입되는 더 저렴한 와인 운반 차량에 대한 공격도 종종 일어날 정도다. 그러다보니 랑그독 지방정부의 고민은 부가가치가 높은 와인을 생산하여 농가의 수익을 개선하는 데에 있다. 최근에는 지방정부의 꾸준한 노력 덕분에 뛰어난 품질의 좋은 와인들이 하나둘씩 성공을 거두고 있다. 가령 ‘도맨 고비(Domaine Gauby)’나 ‘페레로즈(Peyre Rose)’같은 와인들은 공급보다 수요가 더 많아서, 와인 수입업자들이 와이너리까지 찾아와 사정을 해야 겨우 할당량을 줄 정도다. 하지만 이런 작은 와이너리들이 지역 경제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정도는 미미하며 고급와인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보르도의 노하우가 필요했다.
랑그독 지역에 보르도의 지식을 옮겨오고자 했던 두 사람이 있었다. 둘의 배경은 서로 다르지만,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에 대한 열정과 와이너리를 넘어 지역 전체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지녔다는 점은 같았다. 두 명 중 한 사람은 애메 기베르(Aime Guibert)로 남프랑스의 샤토 라투르란 별명을 가진 ‘도마스 가삭(Daumas Gassac)’을 1978년에 설립하였다. 사실 애메 기베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비즈니스와 첫 번째 부인을 버리고 새로운 여자와 여생을 보내고자 1970년 따뜻한 남쪽에 땅을 구입하였으나, 친한 친구인 보르도 대학의 엉잘베르(Enjalbert) 교수를 통해 자신이 구입한 영지의 토양이 보르도 최고급 포도원의 토양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전설적인 와인 컨설턴트 에밀 페이노(Emile Peynaud)의 도움을 얻어, 남프랑스에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최고급 와인을 생산하게 된다. 또 하나의 인물은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소유주인 에릭 드 로칠드(Eric de Rothschild) 남작으로 가족의 사냥터였던 랑그독 마을의 숲속에서 우연히 보르도와 비슷한 기후를 발견하게 된다. 이미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포도원을 설립해본 경험이 있는 에릭 남작은 라피트 로칠드의 양조팀에서 가장 촉망받던 에릭 콜러(Eric Kohler)를 파견하여 2000년 ‘샤토 도시에르(Chateau d’Aussieres)’를 설립하였다. 샤토 도시에르는 예상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며, 이에 대한 공로로 에릭 콜러는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수석 와인 메이커로 승진하게 된다. 도마스 가삭과 샤토 도시에르 같이 보르도의 DNA를 가지고 있는 포도원들의 장점은 최고급 와인 외에 뛰어난 품질의 와인을 비교적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점에 있는데, 도마스 가삭에서는 ‘길렘(Guilhem)’이라는 와인을, 샤토 도시에르에서는 ‘오시에르(Aussieres)’나 ‘발드루스(Val de l’Ours)’와 같은 와인들을 생산하여 우리나라의 마트와 식당에서도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1호 (2019년 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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