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EO 걷기 프로젝트] 역사 한 모금, 문화 한 걸음… 서울 성북동 고택·한양 도성길

    입력 : 2015.05.29 17:43:40

  • 사진설명
    “그냥 말로만 40대, 40대 하는 줄 알았는데 왠지 모르게 힘이 없는 거예요. 기분 탓이려니 했다가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갔더니 간수치가 이렇게 높은 데 왜 지금 왔냐며 어찌나 타박을 하던지. 평생 처음 입원하고 눈물 찔끔 흘렸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김 부장 입에서 오랫동안 푸념이 이어졌다. 한번 터진 신세 한탄이 줄줄이 이어지더니 구불구불 능선 타고 지나 오뚝한 봉우리를 탁 치고 내려왔다.

    “간 때문에 입원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3일 간 혼자 지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는데, 마흔 고비 넘기면 스스로 건강 챙겨야 한다는 선배들 말이 진리더군요. 대학 입학하고 지금까지 두주불사였으니 얘(간)도 기력이 쇠할 때가 됐나 싶고. 헬스클럽이라도 다녀야 하는데 퇴근시간이 따로 없으니…. 그래서 요즘 회사 주변 한 바퀴씩 돌고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위로가 돼요.”

    40대 초반, 중견기업 근속연수 14년 차, 동기보다 빠르게 부장 직함을 단 지 2년 남짓, 누구보다 먼저 새벽별 보고 출근해 휘영청 달 밝은 밤에 퇴근하는 김 부장에게 직장생활의 위로는 고작 동네 한 바퀴였다. 주절주절 이어지는 푸념을 좀 더 나열하면 “살기 위해 일하는 지 일하기 위해 사는지 모를 만큼 바쁜 와중에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한다. 그런데 잠깐, 한참 동안 주거니 받거니 말꼬리가 이어졌지만 뭔가 빠진 것처럼 허전했다. 스스로도 답답했는지 뜸들이다 툭 털어 낸 속내에 말한 이나 듣는 이 모두 한동안 하늘만 쳐다봤다.

    “처음 입사했을 땐 내가 가장 중요했고, 결혼하고 아이가 생겼을 땐 이 세상에 가족보다 중요한 건 없었어요. 그랬던 내가 병실에서 이렇게 쉬면 실적은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더라구. 하나 물어봅시다. 이거 잘살고 있는 거 맞는 겁니까.”

    길상사
    길상사
    나와 가족이 함께 걷는 길 꼭 김 부장 때문은 아니지만 꽃 피는 봄에 서울 도심 걷기를 택한 건 5월이 가족의 달이라는 다소 상투적인 이유가 한몫했다. 입버릇처럼 되뇌지만 “정작 5월에 어떤 기념일이 있는지 제대로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라는 의문도 뒤따랐다. 근로자의 날(1일)은 차치하더라도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스승의 날(15일), 성년의 날(18일), 부부의 날(21일) 까지 함께해서 마땅한 이유가 즐비한 시기에 나 홀로 걷는 것보다 쓸쓸한 일이 또 있을까. 그래서 동네 주변 혹은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트레킹 코스는 일부러 멀리 돌아나가는 길로 꾸렸다. 서울 성북동 고택과 한양 도성을 함께 걷는 코스인데,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져 절로 대화가 이어지는 길이다.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나선 트레킹은 역시 대중교통이 효자다. 이동하는 순간에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트레킹의 시작점은 한성대입구역. 개찰구를 빠져나와 역사 내부에 전시된 주변 지도 앞에 서면 길상사로 나서는 방향이 눈에 들어온다. 자, 이제부터 성북동 고택을 둘러보는 문화의 길이다.

    한양 도성의 북쪽 마을, 그래서 성북동(城北洞)이라 이름 붙은 이 동네는 예로부터 작가들의 고향이라 불렸다. 그만큼 북악산과 어우러진 경관이 수려하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한 번쯤 살고픈 지역으로 손꼽히는 동네다. 우선 길상사 방향으로 나선 길에 자리한 첫 방문지는 ‘최순우 옛집’이다. 혜곡 최순우 선생이 1976년 말부터 말년을 보내며 대표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다. 1930년대 경기 지방 한옥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소담한 안뜰과 뒤뜰에 그의 손길이 그대로 느껴진다. 한때 헐릴 뻔했으나 2002년 시민 성금으로 지켜내 ‘시민문화유산 1호’로 운영되고 있다. 대로로 나오면 조선 성종 때, 뽕나무가 잘 커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해달라고 기원하던 제단인 ‘선잠단지’가 우뚝 서 있다. 이곳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면 보기에도 호젓한 ‘선잠길’이 눈에 들어온다. 북악산 자락에 자리한 탓에 오르막이 많은 성북동에서 가장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큰 집들이 많은데, 그 집 너른 마당에 녹음이 짙어 사색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아파트가 즐비한 서울 풍경과 정반대인 이곳은 오히려 그래서 정겹다. 큰 집들 사이의 골목길을 오르면 작은 집으로 향하는 길이 핏줄처럼 수없이 이어져 있고, 대형마트에 비해 한없이 보잘것없는 가게엔 이곳이 관광 명소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외국어 안내 문구가 선명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길상사가 있다.

    안으로 한걸음 들어서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도심에 이렇게 조용하고 청정한 공간이 있다니…. 이곳은 원래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요정으로 꼽혔던 대원각이 있던 자리다. 그 주인이 법정스님의 무소유 철학에 감명 받아 조계종 송광사에 시주하며 사찰로 거듭났다. 1997년부터 길상사로 불렸으니 역사는 짧지만 찾는 이들이 많아 서울의 명소로 손색없는 곳이다. 경내 가장 위쪽에 자리한 진영각(眞影閣)에는 지금도 법정스님의 자취가 그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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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동네의 여유로움, 고즈넉한 도성 길상사로 오르던 길을 다시 내려오다 동네가게를 끼고 돌면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한참 이어진다. 아래는 서울 최고의 부촌이요 바로 그 위는 자동차가 오르지 못하는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하다. 큰 집 마당에 핀 갖가지 꽃들은 작은 집 마당에서도 화사하다. 그렇게 이어진 골목길을 오르고 내려오면 다시 대로에 닿는다. 길 건너 고개를 들면 독립운동가이자 승려, 시인이었던 만해 한용운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으로 가는 계단이 잘 정비돼 있다.

    심우장(尋牛莊)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다.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삼일운동 후 옥고를 치르고 셋방살이를 하던 한용운이 지인들의 도움으로 지은 집인데, 그가 유일하게 소유했던 집이기도 하다.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선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인데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 돼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한참을 걷다 심우장 툇마루에 앉아 숨을 고르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확히 북향이다. 다시 신발을 고쳐 신고 문을 나서면 1미터 남짓한 앞집 벽에 “좀 더 오르면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를 볼 수 있습니다”란 문구가 마음을 동하게 한다. 그래서 찾게 된 곳이 ‘북정마을’이다.

    최순우 옛집의 뒤뜰 전경
    최순우 옛집의 뒤뜰 전경
    오르는 길 양쪽에 작게 난 대문이 여럿이다. 달동네란 표현이 실감날 즈음 버스 종점에 자리한 작은 가게에 도착했다. 참으로 불편하겠다 싶었지만 주민들의 표정은 전혀 달랐다. 가는 길이 어두워 잠시 지도를 살피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민 중 한 분의 길 안내가 이어졌다. 그 손끝을 따라 도착한 곳이 한양 도성 비탈에 조성된 와룡공원이다. 이곳부터 한양 도성길이 시작된다. 한양 도성은 조선 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에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년), 백악(북악산)·낙타(낙산)·목멱(남산)·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된 이후 여러 차례 개축이 진행됐다. 평균 높이는 약 5~8m, 전체 길이는 약 18.6㎞에 이른다. 현존하는 전 세계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 도성의 기능을 수행(1396~1910년)했다. 한양 도성은 4대문과 4소문이 있는데, 4대문은 북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숙정문·흥인지문·숭례문·돈의문이며, 4소문은 서북에서 시계 방향으로 창의문·혜화문·광희문·소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됐다.

    와룡공원에서 출발해 선택한 길은 말바위 안내소와 숙정문으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다. 한양 도성길은 청와대와 근간인 탓에 군인들의 검문 검색이 비일비재한 곳이다. 신분증을 지참하고 안내소에서 출입신청서를 작성해야 나설 수 있다. 길은 돌계단과 나무 데크로 잘 정돈됐는 데, 한 가지 유의할 점은 “길이 아니면 걸음을 옮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 길에서 벗어나 잠시 울타리를 넘어선 순간, 한 무리의 군인들이 실제상황을 외치며 달려든다. 울타리 밖에는 움직임을 감시하는 센서가 작동하고 있다. 그만큼 군인들에게 철통 보안이 생명과도 같은 곳이다.

    굽이굽이 한양 도성 길에서 내려서면 삼청동으로 가는 길이 눈에 들어온다. 마지막 코스는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만찬이 어떨는지. 딱히 식사시간에 관계없이 붐비는 곳이지만 군데군데 자리한 맛집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걷기 코스 한성대입구역 → 최순우 옛집 → 선잠단지 → 길상사 → 수연산방 → 심우장 → 북정마을 → 와룡공원 → 한양 도성 길 → 숙정문 → 삼청공원 → 청와대 → 경복궁역(약 12㎞) [안재형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6호(2015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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