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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슬링과 태국음식의 마리아주, 느끼셨습니까
입력 : 2015.05.29 17: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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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와인은 리슬링입니다. 레스토랑은 태국음식전문점이에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길진 와인의 홍지원 대리가 전한 와인과 음식의 마리아주(Mariage)는 리슬링(Riesling)과 태국이다. 언뜻 조합이 야릇하다. 리슬링의 상큼한 향이 혹여 자극적인 태국음식에 묻히진 않을까 살짝 갸우뚱하다. 약속한 날 홍 대리가 준비한 와인은 ‘샤또 생 미셸 콜롬비아 밸리 리슬링’과 ‘에로이카 리슬링’. 둘 다 미국 워싱턴 주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샤또 생 미셸’이 생산한 화이트 와인이다. 사실 리슬링은 독일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화이트 와인의 대표적인 품종이다. 추운 지방에서 잘 자라는데 포도알이 작고 둥글고 또 부드럽다. 이 리슬링으로 생산한 연한 금빛의 화이트 와인은 일반적으로 사과향과 복숭아향이 상쾌해 여름에 사랑받는 와인이다.
두 보배를 들고 도착한 곳은 이태원 맛집의 터줏대감으로 통하는 ‘왕타이’. 건물 뒤편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레스토랑 뒷문으로 들어서니 홀이 널찍하다. 여타 태국음식전문점의 오밀조밀하고 과한 인테리어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문 앞에 ‘타이셀렉트’ 로고가 선명한데, 태국 정부가 인증한 레스토랑이란 뜻이다. 매니저의 말을 빌면 “이곳은 태국대사관 직원들의 회식자리이자 방한한 태국 공주의 만찬장소”였다.
“신대륙 와인이지만 유럽에 뒤지지 않아요. 미국의 워싱턴 주는 사람보다 포도가 살기 좋은 땅이라고 하거든요. 합리적인 가격으로 온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와인입니다.”
합리적인 가격이란 말에 본능적으로 귀가 쫑긋, 한 모금 머금고 혀에 감기도록 입안을 놀리니 라임향이 그윽하다. 마지막에 탁 치고 나서는 달콤한 맛은 비교적 가벼웠다. 식전주로 이보다 좋은 게 있을까 싶을 만큼 입안에 침이 고였다.
물로 입을 헹군 후 또 다른 리슬링 ‘에로이카’를 열어 잔을 채웠다. 같은 품종이지만 어떻게 맛이 다른지 비교해보고 싶었다. 향이 퍼지자 홍 대리가 말한다.
“에로이카는 독일 리슬링의 대표 와이너리로 통하는 닥터 루젠과 생 미셸이 파트너십을 맺고 생산한 와인이에요. 콜롬비아 밸리와는 다른 풍미가 확연합니다.”
쉽게 말하면 미국의 테루아에 독일 품종과 기술이 결합된 합작품이다. 확실히 콜롬비아 밸리에 비해 묵직하다. 머금은 입에 과일 향이 퍼진 후 마지막에 살짝 도는 계피향이 매력적이다. 앞선 리슬링보다 살짝 당도는 낮지만 적당한 산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럼 음식과의 조화는 어떨까. 마침 얌운센이 테이블에 전달됐다. 해산물과 다진 돼지고기에 라임을 곁들인 태국식 당면 샐러드다. 라임 덕분인지 보는 것만으로도 눈과 코가 상큼하다. 맛은 두말하면 잔소리. 한입 크기의 통통한 새우를 당면에 돌돌 말아 먹은 후 콜롬비아 밸리를 한 모금 하니, 잔잔하던 기포가 해산물과 어우러져 혀에 착 감긴다.
뒤이어 등장한 사테가이는 허브를 곁들인 태국식 닭 꼬치다. 땅콩소스를 얹어 먹는데, 식감은 조금 퍽퍽하지만 곁들인 소스의 고소함이 일품이다. 이번엔 에로이카를 한 모금했다. 혹여 땅콩소스가 너무 강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강한 맛을 품은 마지막 여운이 깊고 길었다.
부드러운 카레와 샐러리로 게를 볶아낸 푸팟퐁커리와의 궁합은 어떨까. 과연 와인의 과실향이 카레의 강한 향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이 태국식 카레요리는 에로이카와 어울렸다. 왕타이의 푸팟퐁커리가 강하지 않고 부드러운 면도 있지만 신기하게도 강한 줄만 알았던 카레 향이 에로이카의 산뜻한 계피향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와인과 음식을 즐기는 모습이 정겨웠는지 테이블로 다가온 매니저가 한마디 거든다.
“흔히 태국음식과 와인은 궁합이 안 맞을 거라고 짐작하시는데 외국손님들이 오시면 늘 와인을 찾으세요. 그래서 저희도 와인리스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리슬링이지만 레드와인과의 궁합도 기대할 만합니다. 다음엔 레드와인을 시도해보시죠.”
내친 김에 얼큰한 똠양꿍까지 주문했다. 다분히 한국적인 메뉴 선택이지만 이미 적응을 끝낸 입안은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오랜만에 경험한 생기발랄한 원기보충, 여기에 리슬링만한 게 또 있을까.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6호(2015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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