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영 비나제이 대표 | 비욘세 제의 걷어찬 ‘란제리 여신’의 제언…신사의 속옷 스타일링? ‘블랙·그레이 드로즈’ 아닐까요

    입력 : 2015.04.10 17:54:09

  • 사진설명
    사방에 걸린 란제리를 걸친 모델의 액자들, 스트랩 장식과 시스루 스타일의 속옷을 걸친 마네킹들이 가득한 홍대 인근의 한 작업실. 야릇한 란제리가 가득 찬 이곳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란제리 여신’ 비나 정(Vina Jung, 정지영 비나제이 대표)이 매일같이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새로운 란제리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지금 입고 있는 란제리는 물론이고 코트, 티셔츠, 스커트 다 제가 디자인했어요. 예쁘죠?(웃음)”

    시스루 화이트 블라우스에 블랙 란제리, 가죽재질의 미니스커트, 블루톤의 경쾌한 롱코트까지 비나제이의 섹시한 감성이 그대로 묻어나는 패셔너블한 스타일링이었다. 여성복 디자인으로 범위를 넓힌 것인지를 묻자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열린 패션위크를 위해 두 달 정도 공을 들여 제작했는데 물거품이 됐어요. 아직까지 란제리 디자인을 특수목적 의상으로 구분해 패션위크에 세우기를 거부한 것이죠. 저도 국내 정서를 고려해 비나제이 란제리와 잘 어울릴 만한 아이템을 만들어서 란제리가 돋보이는 스타일링이 가능하도록 했죠. 결과적으로 포트폴리오의 일부만 보고 참가 불허 통보를 받았어요.”

    인터뷰 시작과 동시에 허탈한 심경을 전한 비나 정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팝 가수 케이티 페리는 2009년 ‘MTV Music Award’의 진행자로 서기 3일 전 프랑스에 있던 비나 정에게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해 란제리 디자인이 가미된 의상제작을 요청해 쇼에 섰고 할리우드 배우 앰버 허드 역시 비나 정이 디자인한 의상을 입었다. 이후 비욘세, 릴킴 등 많은 톱스타들이 의상제작을 부탁했지만 모두 ‘퇴짜’를 놨다.

    “한국은 언제까지 빅토리아 시크릿에 열광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요. 해외 나가면 애국자 된다고들 하잖아요?(웃음) 한국으로 돌아가 란제리 분야의 선도적 역할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세계적으로 란제리는 이제 옷 속에 감춰진 존재가 아닌 일상적인 패션의 범주에 들어와 있거든요. 한국은 그런 측면에서 유난히 보수적이고 뒤처진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익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비나 정은 고등학교 졸업을 하며 병원사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고등학교 때까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소위 ‘엄친딸’이던 그녀는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가고자 의대 진학을 꿈꿨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이게 진짜 내 길이 맞나?”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여자의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라는 책을 접한 이후에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면서 살자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했다. 여러 진로를 고민하던 와중 평소 관심이 많던 패션공부를 위해 바리바리 짐을 싸 프랑스로 향했다.
    (위쪽부터) 비나정이 디자인한 케이티 페리의 란제리 의상, 비나제이의 퍼블릭 란제리 라인
    (위쪽부터) 비나정이 디자인한 케이티 페리의 란제리 의상, 비나제이의 퍼블릭 란제리 라인
    한국여성들도 당당히 과감한 란제리 즐길 때 전 세계에서 2곳밖에 없는 란제리 전문 디자인학과이자 세계적인 디자이너인 샹탈 토마스 등이 거쳐 간 에스모드파리에서 란제리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스스로 ‘1등병이 도졌다’고 밝혔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란제리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녀는 콘셉트 파리 란제리 콘테스트 1등, 트라이엄프 인스퍼레이션 어워드 프랑스 우승 등 화려한 타이틀을 거머줬다. 덕분에 유수의 할리우드 배우와 팝가수의 협업 제의도 많았지만 비나 정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2012년 한국으로 들어와 비나제이를 론칭하고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은 뜻밖에 쓰디쓴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해외 트렌드에 맞게 디자인한 티(T)팬티가 문제였다.

    “국내 들어와서 엉덩이를 다 가리는 햄(HAM) 소재의 팬티를 처음 봤어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거의 티(T)팬티를 입거든요. 심지어 남자들도 운동할 때 편의를 위해 즐겨 입을 정도니까요. 반면 한국은 란제리 마케팅이 그동안 야하고 은밀하게만 진행된 경향이 있어요. 끈으로 만들어진 속옷을 입으면 정숙하지 못하다는 편견도 있는 것 같고요.”

    억대 자본을 투입해 제작한 초기 제품은 해외 판매량에 비해 국내반응은 참담했다. 그러나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비나제이의 인지도는 패션업계에서 급성장했다. 과감하고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파격적인 디자인이 입소문을 타면서 패션 매거진과 연예인들이 시상식이나 화보를 찍기 위해 제작 의뢰를 해왔기 때문이다. 현재 활동하는 아이돌 가수나 배우들의 화보 속에 심심치 않게 비나제이의 란제리를 볼 수 있다. 지난해부터는 보다 한국적인(?) 디자인도 선보였다.

    “아직까지 대중적으로 편견을 뚫기는 힘든 것 같아요. 그래서 전략을 바꿨습니다. 엉덩이를 가리는 햄 팬티도 일부 라인에 넣었고 란제리 스트랩이 도드라지는 티셔츠도 제작해 속옷만 보여주기보다 스타일링을 통해 일상적인 란제리 패션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인지 조금씩 인식이 바뀌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입어보신 분들은 ‘화려해 보여 불편할 거라고 오해를 많이 했는데 입어보니 훨씬 편하다’고 하시거든요.”



    센스 있는 남성 속옷 스타일링 자체 온라인 몰을 통해 판매하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해외 바이어를 만나는 비나제이는 현재 철저하게 온라인 채널에 의존하고 있다. 한계가 있을 것이란 업계의 시선도 바뀌기 시작했다. 지난해부터 퍼블릭 모델이 점차 인지도를 쌓으며 연간 매출액도 두 배 가까이 늘었다. 국내에서 아직까지 미개척 분야였던 란제리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비나 정이 생각하는 신사의 속옷 스타일링에 대한 생각은 어떠할까?

    “남성들이 속옷에 신경을 쓸 때는 보통 보여줘야 하는 날인 경우가 많잖아요? 패션에 대한 자신감은 안에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해요. TPO에 맞게 겉옷과 매칭하는 것이 좋죠. 유행처럼 번진 밴드 노출도 하나의 패션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슈트나 캐주얼 비즈니스룩에 드로즈, 운동복이나 캐주얼에는 삼각팬티나 티팬티를 매치하는 게 정석이라고 밝힌 그녀는 트렁크 팬티는 ‘올드’한 느낌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여자들이 브래지어를 하는 이유는 보호 목적도 있지만 처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있잖아요. 남성 속옷도 마찬가지예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처질 수 있기 때문에 약간은 타이트하게 잡아주는 스타일의 속옷을 입는 것이 좋습니다.”

    패션 스타일별로 속옷 스타일링을 제안한 그녀였지만 색상에 관해서는 취향이 확고했다.

    “컬러는 개인의 취향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채색이 남성적인 섹시한 느낌을 주는 것만은 사실이에요. 홈쇼핑이나 온라인 마켓에서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상으로 판매하는 속옷을 보면 디자이너로서 심히 부끄럽거든요. 블랙 혹은 그레이 색상을 일주일 내내 입는 사람이 뭔가를 아는 남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확고한 그녀의 취향 때문인지 비나제이가 선보인 남성 속옷은 블랙 색상 한 종류뿐이었다. 향후 남성라인도 다양하게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힌 비나 정에게 마지막으로 비나제이의 아이덴티티를 물었다.

    “란제리도 패션 의류처럼 브랜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비나제이의 중심은 앞으로도 란제리와 비치웨어에 있을 겁니다. 그러나 카테고리를 조금은 넓혀서 선글라스나 란제리와 매칭할 수 있는 데일리웨어 아이템들도 디자인할 생각입니다. 장기적으로 한국시장을 토대로 해외시장까지 안착하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박지훈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5호(2015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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