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정선 교수의 중국문명 기행](16) 중국의 풀지 못한 숙제…청 제국의 ‘화이일가(華夷一家)’

    입력 : 2015.03.20 14:55:26

  • 사진설명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 안쪽에는 관광객들은 잘 찾지 않는 문연각(文淵閣)이란 흥미로운 건물이 있다. 청나라 황제들이 뛰어난 학자들로부터 경전에 대한 강의를 듣던 문화전(文華殿)과 이웃하고 있는 이 건물은 건륭제(乾隆帝)가 1774년에 착공해 1776년에 완공한 장서각이다. 이곳은 세계 최대의 총서(叢書)라 할 수 있는 문연각본(文淵閣本) <사고전서(四庫全書> 초본을 보관했던 곳이라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지식을 관리하고 생산하던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장소다. 동북지방의 선양에서 청 제국을 선포한 만주족은 1644년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베이징에 입성함으로써 100배 넘는 인구와 산술적으로 따지기 어려운 문화적 유산을 지닌 한족을 다스리게 되었다. 더구나 당시의 청 제국은 한족 항장(降將)의 도움으로 중국을 통일했고 그로 말미암아 오삼계가 주도하는 ‘삼번의 난’을 겪었던 후여서 한족 지식인과 하녹 기인들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삼번의 난’을 진압한 강희제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옹정제(雍正帝)가 만들어낸 ‘화이일가’의 논리와 옹정제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건륭제가 건립한 ‘문연각’은 그러한 만주족의 근심 속에서 탄생한 것들이었다.

    이 같은 점에서 청 제국의 옹정제가 화이일가의 논리를 내세우며 전국에 배포한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은 무척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에서 옹정제가 나름의 설득력을 지닌 화이일가를 주장하며 한족 지식인들을 야단치는 모습과 아들인 건륭제가 이 책을 금서로 만들어 회수하고 폐기하는 과정 속에는 수천 년의 중국역사가 내포하고 있는, 한족과 이민족의 온갖 문제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자금성의 문연각을 찾는 사람은 먼저 <대의각미록>의 탄생배경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릴 줄 알아야 한다. 경박한 지식인이 보낸 위험한 편지 1728년 10월 말경 시안에 있던 촨산(川陝) 총독 웨중치(岳鐘琪)는 후난성(湖南省)의 산골에 살고 있는 쩡찡(曾靜)이란 평범하고 약간 경박한 지식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는 놀랍게도 역모를 부추기는 편지였다. 편지는 “웨중치 당신은 여진족의 금나라로부터 한족의 송나라를 지킨 무목왕(武穆王) 웨페이(岳飛)의 후손이 아니냐”면서 “그럼에도 당신은 도적의 두목을 섬기며 머리를 조아리고 충절을 더럽히고 있다”고 꾸짖고 있었다. 오랑캐들은 아버지가 죽으면 그 어미를 아내로 취하고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취하는 데에서 보듯 한족과 종(種)이 다르고 짐승과 다름없는 사람들인데 어찌 당신은 동북의 오랑캐를 섬겨 스스로를 더럽히고 있느냐. 당신이 청나라에 반대해서 일어선다면 ‘삼번의 난’ 때 일어섰던 남쪽지역의 한족들이 모두 함께할 것이다. 그러니 빨리 반란을 시작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위험한 편지였다.

    (왼쪽)옹정제, (오른쪽)여유량
    (왼쪽)옹정제, (오른쪽)여유량
    그렇지 않아도 웨페이의 후손이란 상징성 때문에 자신에게 쏠리는 한족의 눈길과 또 그 때문에 자신을 향한 황제의 감시를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던 웨중치는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신속하게 조치를 취했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편지를 전달한 장(張)이란 사내를 신중하게 취조한 후 그가 알아낸 사건의 전말을 지체 없이 옹정제에게 3차에 걸쳐 ‘주접’이란 특별 비밀양식으로 보고한 것이다. 웨중치의 보고를 받는 옹정제는 지나친 꼼꼼함과 부지런함, 명석함 때문에 그리고 황위 승계과정에서 발생한 세간의 나쁜 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가볍게 넘겨버릴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 사건 자체보다 쩡찡이란 단순한 인물의 편지에 담겨 있는 생각과 지식, 다시 말해 앞으로 제2, 제3의 쩡찡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는 이데올로기가 더 위험하고 심각한 문제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옹정제는 이 사건에 관련된 모든 한족들을 남김없이 검거하여 치밀하게 취조해 보고하도록 지시하면서 내막을 밝히고 관련자 처리 과정을 일일이 감독하기 시작했다. 후난성의 구벽한 산골에 살고 있는 쩡찡이란 하찮은 지식인이 만들어낸 이 역모사건은 무척 단순한 것이었다. 특별한 공모자가 있는 것도, 광범위한 지지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민족의 중국지배에 불만이 있었던 쩡찡이 저지른 우발적 편지 사건이었다. 청나라 초기의 주자학자였던 여유량(呂留良)을 따라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화이사상을 가졌던 그는 옹정제가 황위를 승계하면서 발생한 세간의 풍문을 믿었다. 형제를 죽이고 관련자들을 유배 보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형이 데리고 살던 여자를 옹정제가 데리고 산다는 등의 나쁜 소문을 오랑캐의 행동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한족 사이에 떠도는 웨페이 후손 웨중치에 대한 헛소문을 믿고 그에게 배만거병(排滿擧兵)의 선두에 서라는 편지를 보낸 간단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옹정제는 이 사건의 주범과 종범의 관계를 바꾸었다. 여유량으로 대표되는, 영향력 있는 한족 지식인들을 주범으로 생각하고 쩡찡처럼 부화뇌동한 인물을 종범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 죽은 여유량을 부관참시하여 엄한 처벌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편 쩡찡은 직접 심문하고 교화시켜 집으로 돌려보냄으로써 황제의 아량을 보여주었다. <대의각미록>은 여기에서 탄생했다. 쩡찡과 같은 어리석은 지식인이 옹정제와 같은 뛰어난 군주의 교화를 받아 대의(大義)를 깨닫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책인 것이다. 이 책에서 옹정제는 여유량과 같은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화이사상을 한족이 만들어낸 유교사상을 동원하여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역적 여유량 등은 이적(夷狄)을 금수와 같이 보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알고자 하지 않는다. 하늘은 중국 땅에 덕이 있는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것이 싫어서 방기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외이(外夷:만주족)를 중국 땅의 군주로 삼은 것이다. 역적 여유량 등의 논리에 따르면 이는 중국을 모두 금수로 보는 것과 같지 않은가?’

    옹정제는 유교적 논리에 따라 사람과 금수의 구별은 덕이 있고 없음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명나라가 망한 것은 황제를 비롯한 지배층이 덕이 없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덕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 만주족과 덕을 잃어버린 한족 중 어느 쪽이 금수에 해당하느냐고 묻는다. 또 중화와 이적의 구분이라는 것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냐는 질문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면서 던진다.

    사고전서 서고
    사고전서 서고
    오정제의 화이일가는 모순적인 사상인가 예로부터 이어져온 중국의 영역은 지금처럼 넓지 않았다. 그럼에도 중국의 영역 안에 들어온 사람 중에서 중국화 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이적이라고 하여 배척해 왔다. 예컨대 삼대 이상에 걸쳐 중국 내지에 있었던 묘족(苗族)은 어떠한가? 또 형초(荊楚), 험윤(玁狁) 등 그들이 살던 곳은 현재의 후난성, 후베이성, 산시성 지역이다. 그럼에도 현재 이들을 이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옹정제의 주장은 중국이라는 나라와 그 구성원인 ‘한족’의 본질을 정확하고 날카롭게 꿰뚫고 있다. 중국이란 나라는 중원지역의 조그만 나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그 영역을 확대하여 오늘의 중국을 만들었다. 그런 과정에서 넓어진 영역 안에 살고 있는 이민족들과의 혼혈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학자들이 지금의 한족은 80개 이상의 민족이 융합하면서 만들어진 민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옹정제는 이 같은 사실을 들어서 원래부터의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이 가능한 것이냐고 따짐으로써, 중국이란 나라의 역사는 바로 ‘화이일가(華夷一家)’의 역사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화이사상에 입각하여 청 제국이 중국을 지배하는 정통성을 부정하는 여유량 등의 논리를 격파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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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정제는 <대의각미록>을 전국 방방곡곡에 배포하여 지식인들이 널리 읽고 백성을 가르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선발한 학자들을 파견하여 그 뜻이 올바르게 전달되도록 조치했다. 그럼에도 황제가 열심히 독서를 권했을 때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 책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널리 읽히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옹정제의 아들인 건륭제가 1776년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여 회수하도록 했을 때였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젊은 시절 정력적으로 정복사업에 나서서 중국의 최대 판도를 이룩한 건륭제는 환갑의 나이에 이르면서 외치로부터 내치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중국문화의 전통을 보존하고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시작한 것이 바로 문연각을 지어서 <사고전서>를 편찬하는 작업이었다. 중국의 최고 지식인들을 한곳에 모아서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함으로써 불만을 잠재우고 위험한 지식을 한 눈에 파악하고 통제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고전서>의 편찬은 가치 있는 지식을 체계적으로 보존하는 작업의 시작이면서 위험한 지식을 말살하는 작업의 시작이었다. 1774년부터 건륭제가 완전히 불태워 없애야 할 전훼서, 일부분을 가려내서 불태워야 할 추훼서, 청조에 불경한 구절이나 단어를 수정해야 할 보완서 등으로 구분하여 약 3000종의 책을 금서로 규정한 것이 이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옹정제의 <대의각미록>은 1776년에 금서로 지정되었다. 아버지가 살려준 쩡찡도 역적으로 처형했다. 그것은 아마도 옹정제가 “중국화하지 않는 사람을 이적으로 배척한 것”이라고 했던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옹정제는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에서 ‘중국화’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런데 건륭제는 만주족의 중국화는 청 제국의 유지에 위험하며 독자성을 유지할 때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만주족의 변발을 한족에게 강요한 것도 <대의각미록>에 따르면 논리적 모순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오정제가 내세운 화이일가의 논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은 현재의 중국인들의 심리 속에서도 명쾌한 해답을 마련하지 못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안고 있는 숙제이기도 하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4호(2015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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