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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걷기 프로젝트] 호수에 비친 당신은 누구… 경기도 포천시 산정호수 둘레길
입력 : 2015.03.20 14:2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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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기록된 궁예의 행실이자 병폐 중 하나다. 그는 918년 왕위를 빼앗기고 왕건에게 쫓겨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끝자락에 자리한 명성산에 은거지를 만들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왕에서 산속에 숨어 지내는 처지로 전락한 궁예는 한동안 크게 소리 내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을 울음산이라 불렀는데, 후에 울음산을 한자로 표기해 명성산(鳴聲山, 923m)이 됐다. 주변의 망무봉(446m)과 망봉산(384m)은 궁예가 망을 보던 곳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호국로 3791번길 50-11. 이곳엔 명성산과 망봉산, 망무봉을 끼고 있는 그림 같은 호수가 오롯하다. 한 폭의 수묵화를 옮겨 놓은 듯한 장중함에 가던 길 멈추고 한동안 먼 산 바라보게 하는 신묘한 기운이 그득한 곳이다. 이 경치 좋은 곳이 6·25전쟁 이전엔 북한 땅이었다. 그 당시 이곳에 김일성의 별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풍광 좋은 곳에서 적화통일의 야망을 구체화했다. 호수가 앉은 모양새가 한반도를 좌우로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의 별장이 지도상의 한반도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어 일부러 더 자주 찾았다고 한다.
5000년 역사 찬란한 한반도에 선조들의 발자취 선명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만 이곳은 유독 야망 넘치던 남자들의 부질없는 야욕이 묻어난 곳이다. 산중에 묻혀 있는 우물 같다 해서 산정(山井)이라 이름 붙은 호수는 1977년 국민 관광지가 된 후 38년간 수많은 한국인의 희로애락을 품고 또 품었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 시커먼 더께 널린 자그마한 놀이공원은 친근하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게와 식당도 왠지 정겹다. 2011년 조성된 호수의 둘레길은 포천시의 대표 관광자원. 느릿한 걸음으로 시선을 멀리 두면 가슴속 야망처럼 작지만 단단한 바위산의 위용에 숨이 벅차오르고, 호수 위에 걸쳐진 수변 데크로 내려서면 버려야 할 야욕인 듯 살짝 비쳐진 얼굴이 몽글몽글 떠오른다.
망부봉 오솔길
상동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호수로 들어서면 조각공원이 펼쳐지는데, 그 양쪽으로 둘레길의 이정표가 보인다. 한 바퀴 도는 코스라 어느 쪽으로 가도 조각공원이 종착점이다. 등산이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이 둘레길은 쉼터이자 산책로다. 그만큼 걷기 편하고 벤치에 앉아 원하는 만큼 사색할 수 있다.
둘레길로 나서기 전 호수를 살피니 0.24㎢의 면적이 모두 꽁꽁 얼어 있다. 주변 상인들의 말을 빌면 “웬만한 겨울 날씨면 3월 중순까지 언 호수가 풀리지 않는다.” 덕분에 호수를 가로지르던 수상보트는 개점휴업이다. 대신 그 자리를 스케이트(1시간 5000원)와 얼음 썰매(1시간 5000원), 세발자전거(30분 5000원)와 얼음 바이크(20분 1만5000원) 등이 차지했다.
다른 건 이용하는 구역이 정해졌다지만 얼음 바이크라 이름 붙은 ATV(4륜 오토바이·All-Terrain Vehicle)는 호수 전역을 휘젓고 다닌다. 이용하는 이들은 새로운 경험이지만 주변을 산책하는 이들에겐 소음이 문제다. 그래서 공공의 적이다. 어쨌거나 겨울을 기다린 이들에게 얼음 위에서 즐길 수 있는 놀이는 관광지의 매력이자 필수코스다.
궁예 코스와 수변 코스의 조화
한화리조트 앞에 펼쳐진 낙천지 폭포와 구름다리를 건너 조각공원 건너편에 들어서면 둘레길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부력식 수변 데크가 나타난다. 지금이야 호수 물이 얼어 자리를 지키고 앉았지만 원래는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길이다. 데크 위에서 발을 구르면 호수의 파동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수량이 넉넉할 땐 길이 높고 부족할 땐 낮은, 살아 있는 길이다. 수변 데크 위로는 숲길이 오롯한데, 나란히 이어지다 중간에 만나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4호(2015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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