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지현의 브라보 클래식] (39) 짧은 생애에 불후의 오페라 남긴 작곡가 벨리니

    입력 : 2014.12.19 1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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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음보다 노래가 더 절절하다.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1923~1977년)가 부르는 오페라 <노르마>의 아리아 <정결한 여신>에는 한이 서려 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처절한 절규에 가슴이 저민다. 이탈리아 작곡가 벨리니(1801~1835년)의 대표작 <노르마>는 사랑의 배신을 그린 오페라다. 종교 지도자이자 정치 권력을 쥔 여사제 노르마는 조국을 점령한 로마 장군 폴리오네에게 빠져 아이 둘을 낳는다. 그러나 폴리오네의 마음은 젊은 여사제 아달지자에게 옮겨간다. 연인의 배신을 알게 된 노르마는 복수를 다짐한다. 사제와 병사를 소환해 로마와 전쟁을 선포하고 폴리오네를 잡아들인다. 하지만 차마 사랑하는 사람을 처형하지 못한다. 오히려 노르마 자신이 여사제의 규율을 어긴 것을 고백하고 화형을 자처한다. 뒤늦게 노르마의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폴리오네도 함께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칼라스 덕분에 더 유명해진 아리아 <정결한 여신>은 달에 바치는 기도다. 여사제 노르마는 사랑과 조국, 종교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노래한다. 경건하면서도 위엄 있고 서정적이며 심오한 이 노래를 소화하려면 소프라노의 기교를 총동원해야 한다. 서정적인 리릭 소프라노, 화려한 기교를 자랑하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강렬한 드라마틱 소프라노 테크닉이 모두 필요하다. “아, 사랑하는 이여, 나에게 돌아와요. 처음 무렵의 진심 어린 사랑이 있다면, 온 세상이 원수가 된다 해도, 나는 당신의 방패가 되었으련만. 아! 사랑하는 이여, 나에게 돌아와요. 사랑의 고요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다면, 내 가슴은 삶의 여명(黎明)을 찾을 테고 조국과 하늘은 모두 당신 안에, 당신 안에 있겠죠.” (<정결한 여신> 가사) 이 노래의 대명사로 불리는 칼라스는 불행하게도 오페라 주인공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열애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결국 배신당했다. 여자를 ‘전리품’처럼 여겼던 오나시스는 칼라스를 버리고 재클린 케네디를 선택했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취득할 정도로 오나시스와 결혼을 갈망했던 칼라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실연의 상처로 노래를 잃고 삶도 무너진다. 파리 아파트에서 홀로 칩거하다가 55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그리스에서 화장됐으며, 유골분은 폭풍우가 치는 에게해에 뿌려졌다. 오나시스는 훗날 허영심 있는 재클린과의 결혼을 후회하고 칼라스를 그리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1975년 사망할 당시 칼라스가 선물한 붉은색 캐시미어 담요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고 한다.

    2009년 국립오페라단의 노르마 공연
    2009년 국립오페라단의 노르마 공연
    34세에 요절한 천재 오페라 작곡가 작곡가 벨리니의 인생도 불운했다. 불과 34세에 요절했다. 파리 사교계를 사로잡으며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의 후계자’로 전성기를 누릴 때 급성 장염으로 숨을 거뒀다. 그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 있던 새로운 오페라는 결국 빛을 보지 못했다. 불가피하게 프랑스에 안치됐던 유해는 1876년 그의 고향인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카타니아 대성당으로 돌아갔다. 벨리니는 교회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폴리음악원 출신 할아버지는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였고, 아버지는 작곡가이자 음악교사, 악장으로 활동했다. 그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벨리니는 여섯 살에 작곡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교회음악 작품을 발표했다. 총명한 데다 귀여운 외모 덕에 귀족들의 초대를 자주 받았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벨리니가 18세가 되자 나폴리음악원에 입학시켰다. 니콜라 칭가렐리 나폴리음악원장은 하이든과 모차르트, 페르골레시 음악을 가르쳤다. 모차르트 오페라에 매료됐던 벨리니는 1824년 로시니의 <세미라미데> 공연에 감동해 오페라 작곡가의 길을 결심한다. 졸업 작품으로 공연한 오페라 <아델손과 살비니>가 극찬을 받았다. 뛰어난 작곡 실력에 귀공자 외모까지 더해져 금세 나폴리 음악계 유명 인사가 됐다. 입소문이 난 덕분에 1826년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 오페라 <비앙카와 페르난도>를 공연하며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불과 25세에 ‘로시니 후계자’로 인정받은 그는 1827년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의뢰를 받았다.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이탈리아 대본 작가 펠리체 로마니와 함께 오페라 <해적>을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어지러울 정도로 빠른 성공 가도를 달렸다. 1829년 오페라 <이국의 여인>과 <차이라>, 1830년 세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한 오페라 <케플렛가와 몬테규가>를 발표하며 입지를 굳혔다. 1831년 4월 공연한 오페라 <몽유병 여인>은 영국에서 공연될 정도로 화제가 됐다. 대본가 로마니의 시적인 대사와 감미로운 선율이 압권이다. 오페라는 결혼을 앞둔 연인이 오해로 이별할 뻔했다가 행복을 되찾는 내용을 담았다. 극은 스위스 작은 마을 지주 엘비노와 물방앗간집 양녀 아미나의 혼인 서약식으로 시작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곧 난관에 부딪힌다. 여관 주인 리사가 엘비노를 짝사랑하고, 로돌포 백작은 아미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다. 몽유병에 걸린 아미나가 백작의 여관방에 들어가 잔 사실을 알게 된 엘비노는 파혼을 선언한다. 비록 아미나와 백작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엘비노는 홧김에 리사에게 청혼하고 아미나는 더욱 절망에 빠진다. 하지만 잠옷 차림의 아미나가 몽유병 상태에서 외나무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넌 후 엘비노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본 후 오해가 풀린다. 진실을 알게 된 엘비노는 다시 아미나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식을 올린다.
    시카고 리릭오페라단의 노르마 공연
    시카고 리릭오페라단의 노르마 공연
    초연에 실패한 오페라 <노르마>의 반전 <몽유병의 여인>으로 웃었던 벨리니는 8개월 후 <노르마>로 울게 된다. 1831년 12월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에서 야심차게 <노르마>를 초연했지만 실패했다. 노르마 역을 맡은 소프라노 주디타 파스타와 아달지자 역의 소프라노 줄리아 그리시가 지독한 연습 때문에 컨디션 난조를 보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벨리니의 라이벌이었던 작곡가 파치니의 팬들이 공연을 방해했다. 기대가 컸던 벨리니는 혹평을 받자 크게 낙담했다. 하지만 두 번째 공연에서 반전이 이뤄진다. 성악가들이 진가를 발휘하면서 아름다운 선율을 뚜렷이 부각시켰다. 전 세계 극장에서 공연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벨리니는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노르마만은 살리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공을 들였다. 어떤 오페라보다 품격 있고 선율이 아름다웠다. 1833년 그의 오페라는 영국을 사로잡았다. 런던에서 오페라 <해적> <노르마> <케플렛가와 몬테규가>를 공연해 큰 성공을 거뒀다. 거리에서 팬들이 따라올 정도였다.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 정점 찍은 <청교도> 이듬해에는 파리에서 여유로운 삶을 즐겼다. 그곳에 살고 있던 작곡가 로시니와 쇼팽, 카라파, 파에르 등과 교유하며 영감을 얻었다. 그 영향 탓일까. 1935년 작곡한 오페라 <청교도>는 역작이었다. 이탈리아 벨칸토(아름다운 노래) 오페라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 배경은 1645년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공화파 청교도군이 왕당파에게 승리를 거둔 역사적 사건이다. 크롬웰은 스튜어트 왕조의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오페라는 왕당파 남자와 청교도 여인의 사랑을 담았다. 발톤 경의 딸 엘비라와 왕당파인 아르투로의 결혼식 날 불길한 일이 벌어진다. 찰스 1세의 왕비 엔리케타를 탈출시키려 떠난 아르투로가 식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다른 여자와 떠난 것을 알게 된 엘비라는 실성한다. 게다가 아르투로는 의회의 사형을 선고받는다. 엘비라가 미쳐서 부르는 아리아 ‘그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부르네’는 명곡으로 사랑받고 있다. “여기 있었지.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나를 불렀지. 그리고는 사라져버렸어. 여기서 그는 맹세했지 성실할 것을. 그는 맹세했어. 그리고는 잔인하게도, 내게서 도망쳤어. 아, 더 이상 이제는 함께하지 못하네. 기쁨의 탄식 안에서. 아, 돌아오라 내게 희망이여.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게 해다오. 돌아오라, 내 사랑, 하늘에 달이 떴어요.” 사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크롬웰의 전령이 달려와 사면 소식을 알린다. 다시 정신이 돌아온 엘비라와 아르투로는 행복을 되찾는다. 이 작품은 성악가의 한계를 시험하는 오페라다. 아르투로 역은 ‘하이 F’ 고음까지 올라가야 하며, 엘비라는 정신 착란 상태를 실감나게 연기하면서 아찔한 고난도 기교를 소화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20세기 전까지 이 오페라는 거의 잊혀졌다. 그러나 소프라노 칼라스가 이 엘비라 역을 드라마틱하게 소화하면서 다시 부활했다. 칼라스는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 매력도 다시 일깨웠다. 완벽한 기교와 연기로 순수하고 열정적인 주인공 아미나를 표현했다. 칼라스는 벨리니 오페라의 명맥을 이은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감각적이고 독창적인 선율을 창조한 벨리니는 작곡가 도니제티와 함께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분수령을 이뤘다. 기품 있고 우수에 찬 아름다운 멜로디는 작곡가 바그너와 쇼팽, 리스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쇼팽은 임종할 때 벨리니의 오페라 아리아를 들려달라고 했을 정도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벨리니를 베토벤과 함께 ‘2대 B’ 반열에 올려놓았다. 오페라 아리아뿐만 아니라 벨리니의 오보에 협주곡도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있다. 34세에 삶을 마감했기에 작품 수는 적지만 선율의 아름다움만큼은 음악의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받는다. [전지현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1호(2014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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