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성큼 다가오는가 싶더니 어느덧 훌쩍 중반을 넘어버렸다. 아침저녁은 제법 쌀쌀해졌으나 그래도 남은 늦가을 정취를 즐기고 싶어 단풍 고운 남산 기슭 신라호텔의 중식당 ‘팔선’을 찾았다. 와인은 변화가 많은 계절처럼 하나는 산뜻하고 또 하나는 따뜻한 느낌의 이탈리아 와인을 들고 갔다. 메디치 가문의 레드 스파클링 ‘콘체르토’와 토스카나 유기농 와이너리 포제리노의 ‘끼안티 클라시코 리제르바 부쟐라’였다.
‘팔선’의 장금승 셰프(부장)는 와인 맛을 감안해 ‘캐비아전복관자 전채’와 ‘발채은탑두부’, ‘오향소스 한우지존갈비’를 준비했다. 그는 앞의 두 요리는 가벼운 레드와인에, 갈비는 묵직한 느낌의 와인에 어울릴 것이라고 했다.
중식당이라면 으레 백주에 맞춘 요리를 떠올렸기에 우아한 와인에 매칭한 요리는 어떨지 설레며 기다리는데 먼저 ‘캐비아전복관자 전채’가 나왔다. 그게 음식이라기보다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입에 넣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얇게 저민 전복과 관자는 입안에서 살살 녹아들 만큼 삼삼했다. 간간이 터지는 캐비아가 새콤한 느낌을 더해줬고 바닥에 깐 상큼한 야채가 잡냄새를 잡아줘 생선을 더 신선하게 했다. 먼저 ‘메디치 에르메테 콘체르토’를 따랐다. 금세 기분 좋은 과일향이 방안을 채우듯 피어올랐다.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풍부한 버블이 터지며 입안 곳곳을 어루만지듯 씻어줬고 곧이어 잘 익은 과일 주스의 느낌이 입안에 가득 찼다.
‘발채은탑두부’는 단순한 모양으로 담아냈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요리였다. 장금승 셰프는 “대게살과 푸아그라 머시룸을 곁들여 두부를 탑처럼 쌓았다”고 소개했다. 먼저 겉을 장식한 신선한 연두부의 고소한 맛에 이어 두부 사이에 층으로 넣은 버섯과 게살 등이 역시 부드러우면서도 은은한 맛들을 순서대로 풍겼다. 얼핏 심심할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웠지만 덕분에 연두부며 버섯 하나하나의 맛까지 고스란히 살려내 오히려 오묘한 느낌을 갖게 했다.
거기에 곁들인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콘체르토는 이번에도 부드럽게 어우러지며 심심한 두부와도 멋지게 조화를 이뤘다. 기분이 달아오르기 시작할 무렵 이날의 메인인 ‘한우지존갈비’를 접했다. 장금승 셰프는 “회양지방 대표 요리를 연출했는데 입에서 살살 녹을 만큼 부드럽다. 1등급 한우갈비 중 기름기가 가장 적절한 부위만을 사용해 조리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접시에 담긴 고기는 갈빗살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연했다. 젓가락으로 가볍게 찢어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묵직한 와인과 잘 어울리게 사천식 오향소스를 썼다고 했는데 먼저 다가온 것은 아주 부드럽고 구수하며 달착지근한 쇠고기 맛이었다. 그 뒤로 살짝 매콤하면서도 상큼한 소스가 느껴져 요리의 재미를 더했다. 소갈비로 어떻게 이런 맛을 낼 수 있는지, 또 소스보다 고기 맛이 먼저 다가오는 비결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갈비는 굳이 이로 씹지 않아도 될 만큼 육질이 부드러웠다. 갈빗살이 아니라 오랫동안 곤 송아지 고기(veal)처럼 입안에서 살살 녹아들었다. 이날의 메인 와인 포제리노를 따르자 농익은 과일향이 살짝 담긴 짙은 향신료 아로마가 코를 찔러왔다. 쇠고기 요리의 뒤끝에서 풍기는 매콤함과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다.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강인한 느낌의 아로마와는 전혀 다른 매끄러운 와인이 감싸듯 다가왔다. 아주 부드럽게, 또 아주 우아하게 …. 그 뒤로 살짝 묵직한 느낌의 잘 녹아든 탄닌과 농익은 과일의 짙은 향이 긴 여운을 남겼다. 이번엔 고기에 얹어낸 묘삼을 함께 씹어봤다. 달콤하고 쌉쌀한 인삼 맛이 고기의 느끼함을 잠재워 입안이 한결 산뜻했다. 그 상태에서 다시 포제리노를 한 모금 마셨다. 생인삼의 향이 꽤 강했지만 끼안띠 클라시코 와인의 묵직한 풍미는 그것마저도 가볍게 지워내며 입안 가득히 그윽한 와인의 향을 피워냈다.
순서를 거슬러 남은 두부 요리를 먹은 뒤 포제리노 와인을 마셔봤다. 아주 부드러운 두부요리 뒤에 마신 와인은 역시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같은 와인이 부드러운 음식엔 부드럽게, 진한 음식엔 강인하게 다가온다는 게 신선했다. 그렇게 가을 저녁은 달아올랐다.
팔선 신라호텔 팔선은 중국 본토의 맛을 그대로 전하는 것을 내세우는 국내 최고의 중식당이다. 북경과 광동 출신 조리사가 최고의 식재료로 요리를 한다. 서세옥 화백과 박영숙 도예가 등 국내외 유명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해 갤러리 레스토랑으로도 이름이 높다. (02)2230-3366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