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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어떤 생각] (2) 로제르트 문학, 축제
입력 : 2014.10.31 10: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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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한 젊은이가 자기 집을 구경시켜 주었는데, 원래는 수도원 건물이었다고 한다. 12세기에 지어진 고풍스런 수도원을 프랑스 혁명 이후 그의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이 샀다는 것이다. 건물 내부가 수도원 시절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포도주를 담는 데 사용되었을 오크통이 나뒹구는 지하실과 좁은 복도를 따라 수도사들이 묵었던 여러 개의 방들을 돌아보는 기분이 참 묘했다.
로제르트는 산티아고로 가는 프랑스의 네 개의 순례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르퓌 순롓길 위에 위치해 있기도 하다.
실제로 그곳에 머무는 동안 배낭을 멘 순례자들을 여러 명 보았다. 우리가 묵은 숙소도 소박하고 깔끔하고 평화로웠다. 기분 탓인지 수도원의 한 방을 얻어 쓰고 있는 듯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로제르트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들 소박하고 친절하고 밝고 사심이 없어 보였는데,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자부심만은 대단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사로잡은 로제르트에 대한 인상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인구가 2000명도 안 되는, 외지고 작은 마을에서 벌이고 있는 문학 축제의 형식과 내용이 참신하고 알찼다.
올해로 9회째인 이 문학 페스티벌에서도 물론 다른 문학 행사와 마찬가지로 낭독회와, 작가와의 만남 그리고 토론과 저자 사인회가 열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여기 참여한 작가가 서른 명이 넘었다. 대부분 프랑스 작가들이지만 유럽 인근 도시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 오정희 선생과 나는 초청 작가 신분이었다. 각지에서 온 서른 명이 넘는 작가들은 2박 3일 동안 광장 한복판에 설치된 부스에 자기가 쓴 책을 펼쳐놓고 독자를 만났는데, 저서들이 한두 권이 아니었고, 유명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도 많았다. 그들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거나 이름만 내세우는 얼치기들이 아니었다. 이 조그만 마을로 서른 명이 넘는 괜찮은 작가들이 찾아와서 이런 판을 벌이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한 서적상의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이 만들어낸 업적이었다.
축제의 마지막 날 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했는데, 이 문학상의 운영 방법이 흥미로웠다. 문학상이 발표되는 순간까지 아무도 누가 수상자인지 모른다. 심사위원도 따로 없었다. 수상자를 결정하는 것은 그곳에 참석한 작가들과 후보 작품 모두를 완독한 독자들이다. 후보작들은 전년도 수상자에 의해 미리 공표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작년 수상자는 올해 문학상의 후보작 7편 정도를 선정할 권리를 갖는다. 그러면 그 7편의 소설을 모두 꼼꼼히 읽은 독자들과 축제에 참가한 작가들이 가장 마음에 드는 한 편을 투표하고,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작품을 쓴 작가가 수상자로 결정된다. 수상자는 다시 내년 수상 후보자 7편가량을 선정할 권리를 갖는다.
이런 문학상 선정 방법은 참신하고 공정하고 무엇보다 축제적 성격에 걸맞은 것 같다. 문학이 기술도 아니고 스포츠도 아니라면, 문학상 역시 기술을 겨루거나 승부를 겨루어 따내는 우승 트로피와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공감이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수상자에게는 소액의 상금과 함께 푸아그라를 비롯한 로제르트 지방의 특산품이 선물로 주어지는데, 그 역시 즐겁고 기발하게 느껴졌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우리나라에도 여러 종류의 축제들이 참 많이 생겼다. 그 가운데는 문학이나 출신 작가를 앞세운 축제나 행사도 적지 않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시행하는 문학상도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문학행사나 문학상이란 것이 하나같이 비슷비슷한 것이 현실이다. 다른 축제와 차이가 없고 다른 문학상과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 300개가 넘는 문학상이 있다고 하는데, 다른 문학상과 구별되는 고유한 운영 방법이나 선정 기준을 가진 문학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시행하는 문학 축제나 문학상의 경우 중앙에 비해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보니 수준이 떨어지게 되고, 수준이 떨어지다 보니 경쟁력을 갖기가 더 어려워진다.
로제르트에 머무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우리나라에도 로제르트처럼 참신하고 사심 없는 운영을 통해 행사를 위한 행사, 연례적이고 관습적인 축제가 아니라 정말로 문학인들이 즐겁고 흔쾌히 참여하며 독자들이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둘러볼 수 있는 문학 페스티벌을 여는 마을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오갔다.
예컨대 전라남도 장흥이나 고흥, 강원도 정선이나 태백 같은 데서 작가들을 불러 모아 독자들과 즐겁고 진지하게 어울리게 하고, 그 자리에서 참가자들의 투표를 통해 문학상 수상자를 뽑고, 버섯이나 키조개나 산나물 같은 특산물을 상품으로 주어 격려하고 축하하며 같이 즐기게 하면 좀 좋겠는가. 그런 축제가 만들어진다면, 물론 주최하는 마을에서 불러 준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나는 기꺼이 서른 몇 명의 작가들 가운데 한 명으로 참석할 의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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