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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선 교수의 중국문명 기행] (11) 선양에서 떠올리는 아! 대한민국
입력 : 2014.10.17 17:3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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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가 자초한 병자호란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은 짧았던 전쟁기간에도 임진왜란 이상으로 조선을 초토화시켰다. 그런데 이 침략전쟁은 피할 수 없었던 전쟁이 아니라 인조 정권이 자초한 전쟁이며 그 원인은 ‘인조반정’이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은 그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 성리학적 명분과 의리를 내세운 쿠데타로 인조 측에서는 옳지 못한 임금을 폐위하고 새 임금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았다고 말하는 사건이다. 당시 권력에서 소외된 서인들은 광해군이 명(明)나라와 후금(後金)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친 일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 일을 패륜으로 규정하면서 사림의 붕당세력을 모으고 인조를 옹립하여 쿠데타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인조와 서인들은 그들이 내세웠던 명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주변의 국제 정세와 너무나 동떨어진 정치와 외교를 일삼아 청나라의 침략을 자초했다. 적어도 현실 정치에서는 안으로는 임진왜란으로 황폐화된 국가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고, 밖으로는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며 명(明)·청(淸) 교체기에 균형 있는 중립외교를 펼친 광해군보다 더 나쁘게 국정을 운영했던 것이다.
내가 선양을 찾은 개인적 이유는 선조 할아버지의 행적과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 조부님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선조 할아버지의 장엄한 순절에 대해 어른이 되면서 그것이 과연 가장 올바른 길이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 선양을 찾게 만든 개인적 이유였던 셈이다. 삼학사(三學士)로 불리는 나의 선조 홍익한(洪翼漢)은 1636년 인조에게 청 태종이 보낸 사신의 머리를 베어서 명나라에 보내든지 그것이 싫으면 당신의 머리를 베라는 강경한 상소로 인조를 압박함으로써 병자호란을 자초하게 되는 척화파(斥和派) 지식인 그룹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평양 서윤으로 있었던 홍익한은 전쟁의 패배로 맺은 굴욕적 조약에 따라 1637년 2월 선양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했다.
어린 시절 조부는 이 선조 할아버지의 의로운 순절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도록 나를 교육했다. 명나라는 ‘선’이었고 청나라는 ‘악’이었으며, 명나라를 섬기는 것은 ‘의로운 일’이었고 청나라를 섬기는 것은 ‘의롭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왜 그 선조 할아버지의 행적이 칭송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어떤 의문도 가질 수 없었다. 나의 조부는 선악의 문제는 이미 선험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듯 어떤 설명도 허용하지 않은 채 오직 오랑캐 앞에서 당당하게 죽음에 임하는 태도만 자랑스럽게 들려주었다.
선양 고궁
1636년 4월 11일은 청 태종은 선양의 천단에서 유목민족의 칸 자리를 벗어나 중국식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한족을 포용하고 몽골을 정복하여 제국건설의 기틀을 다진 후 황제임을 선포함으로써 만몽한(滿蒙漢) 세 민족을 주축으로 삼은 다음 제국이 출범했음을 알린 것이다. 그때 청나라는 조선에 사절단을 보내 청 태종의 황제 즉위식에 축하 사절이 와줄 것을 요청했었다. 그랬지만 머뭇거리던 명나라가 인조를 조선왕으로 책봉해준 사실에 고무된 탓이었는지 한껏 숭명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인조는 사신의 접견을 거부했고, 신료들은 서신의 접수 자체를 거부했다. 명나라와 군신관계에 있으니 또 다른 황제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고는 9년 전에 있었던 정묘호란(丁卯胡亂)의 참담한 패배는 까맣게 망각한 채 청나라 사절단을 박대하고 감시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본국으로 도망간 청나라 사절단에게 조정에서 평안도 관찰사에 내린, “참월(僭越)한 오랑캐와는 단교할 것이며 따라서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는 내용이 담긴 유문(諭文)까지 빼앗겨 인조 정권의 본심이 확실하게 들통 나는 한심한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조선은 이런 방식으로 병자호란을 자초하고 있었다.
청 태종 무덤의 정식 명칭은 소릉(昭陵)이지만 선양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보통 북릉이라고 부른다. 선양의 북릉공원은 찾아갈 때마다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소나무 숲의 이곳저곳에는 다양한 자세로 기체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앉아 쉴 곳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현재의 선양 사람들에게 북릉이라는 장소는 청 태종이 묻혀 있는, 황제의 무덤이라는 의미보다 산책하고 휴식할 수 있는 ‘북릉공원’이란 의미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선양을 찾았을 때 청 태종의 무덤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많은 선양 사람들이 제대로 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북릉공원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는 사람들이 쉽게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북릉은 1643년 청 태종이 죽은 해에 만들어진 무덤이지만 베이징에 있는 다른 중국 황제의 무덤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입구에 늘어서 있는 말, 낙타, 코끼리 등의 석수(石獸)들로부터 봉분에 이르는 길과 도중에 마주치는 여러 건축물에 이르 기까지 명대 황제의 능과 무척 유사했다. 차이가 나는 것은 봉분의 크기였다. 이를테면 명 태조 주원장의 무덤에서 보듯 종종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봉분을 자연의 산처럼 거대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북릉의 봉분은 여느 보통 사람의 것처럼 아담했다.
청 태종 홍타이지
그런데 왜 당시의 정치인들, 지식인들은 그처럼 무모하게 명분론에 사로잡혀 청나라와 대립의 각을 세운 것일까? 우리 동포가 많이 모여 사는 서탑의 밤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을 계속 생각했다. 떨쳐버리고 싶어도 온 나라를 마비시키고 있는 세월호 문제가 머리를 자꾸만 복잡하게 만들었다. 정치란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는 악마와도 타협하는 것이라 했는데, 자명한 현실 앞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주장만을 밀어붙이는 우리 정치인들의 의식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당시의 사대부 정치인들은 공맹을 논하는 데는 밝았지만 국민 경제를 발전시키고, 군대를 훈련하고, 전투를 지휘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식하기 짝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를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말로를 보라면서 큰소리치고 있었다. 정치인이란 가장 현실적인 인간이며 자제해야 될 일과 나서야 할 일, 타협해야 할 일과 거부해야 할 일에 대한 구분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벌떼처럼 나서고 벌떼처럼 거부한다. 병자호란 때 가장 이성적으로 행동한 인물은 최명길(崔鳴吉)이었다.
그는 현실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나라를 벼랑 끝에서 간신히 구해냈지만 이후의 우리 역사는 김상헌(金尙憲)이나 홍익한처럼 비현실적인 명분론을 강하게 내세운 인물을 더 받들고 추앙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최명길은 지조 없는 인물로 격하시킨 반면 김상헌이나 삼학사는 진정한 우국충정 지사로 치켜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우리 정치의 전통이 지금의 세월호 사태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아! 대한민국”이라는 탄식을 터뜨리고 있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9호(2014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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