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정선의 중국문명기행] (10) ‘白酒 원조’ 분주의 고향, 행화촌을 찾아서

    입력 : 2014.09.22 17:27:44

  • 사진설명
    내가 행화촌(杏花村)을 찾아 나선 것은 7월 말이었다. 오랫동안 벼르고 벼르던 여행이었다. 중국 백주(白酒)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분주(汾酒)의 고향에 가보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난징(南京)의 견딜 수 없는 더위가 나를 북쪽으로 떠밀어 보냈다. 난징의 칠월 말 더위는 ‘삼대화로(三大火爐)’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폭염이었다. 체온을 웃도는 기온과 빨래가 마르지 않을 정도의 습도 앞에서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산시(山西)를 향해 출발했다. 타이위안(太原)에서 분주의 고향인 행화촌을 향해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우리나라의 여행객들은 삭막하다고 거의 찾지 않는 곳이지만 나에게는 아름다웠다. 길가의 표시판에 산시의 유구한 역사를 말해주는 ‘진사(晉祠)’와 옛 도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핑요아오(平遙)’ 고성과 진상(晉商)의 영화를 말해주는 ‘왕지아따위엔(王家大院)’과 CCTV 드라마로 유명해진 ‘치아오지아따위엔(喬家大院)’ 등을 가리키는 이름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 절제와 낭비, 성공과 실패, 청빈과 탐욕의 이야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우리 인간은 기억 때문에 아름답게 행동하는 동물이다. 기억을 가진 사람은 경험을 바탕으로 품위 있고 현명하게 행동하는 법이다. 내가 빼어난 자연풍경보다 퇴락한 옛마을을 더 아름답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분주 숙성 창고, (아래)분주 누룩 발효실
    (위)분주 숙성 창고, (아래)분주 누룩 발효실
    산업화된 행화촌 분주의 고향 행화촌은 펀양시(汾陽市) 구역으로 들어서서 307번 국도에 접어들자 이내 나타났다. 산시의 일반적인 시골처럼, 요동(窯洞)이라 부르는 동굴집으로 이루어진, 흙먼지 날리는 가난하고 고즈넉한 마을을 상상했던 나는 갑자기 나타난 분주 공장의 웅장한 현대식 건물군 앞에서 놀라고 실망했다. 행화촌이란 이름, 살구꽃 피는 마을이란 이름에 걸맞게 나는 시골마을의 일부를 이루는 초라하고 아담한 술공장을 연상했었다. 그런데 사정은 정반대였다. 230만 ㎡를 자랑하는 우람한 분주 공장 둘레에 행화촌은 마치 더부살이 식물처럼 붙어 있었다. 지금의 행화촌 풍경은 내가 그처럼 보고 싶어 했던 시적 풍경이 아니었다.

    나로 하여금 머나먼 중국의 행화촌까지 찾아가게 만든 사람은 조지훈과 박목월이었다. 아니 조지훈과 박목월이 아니라 그들이 주고받은 「완화삼(玩花衫)」과 「나그네」라는 시였다. 이 두 편의 시에 대한 나의 생각이 그 시발점이었다. 조지훈은 ‘박목월에게’라는 부제를 붙인 「완화삼(玩花衫)」에서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라고 썼다. 그리고 박목월은 이 시에 화답하여 쓴 「나그네」 속에 조지훈의 발상을 이어받아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이란 구절을 담아 놓았다.

    우리 한국인의 멋과 풍류를 한껏 보여주는 이 두 편의 시를 내가 온전하게 정서적으로 이해하며 당당하게 좋아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시대 탓이었다. 나는 내면에서 이 시들을 뛰어난 시로 받아들였지만 외면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았다. 민중문학과 노동문학이 위세를 떨치던 시대에 「완화삼(玩花衫)」이나 「나그네」 같은 시를 좋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역적이었다. 당시의 젊은 문인들은 높은 목소리로 현실과 동떨어진 시, 시대에 대해 무책임한 시의 대표적 모습으로 「나그네」를 거론했으며 나는 그런 말 앞에서 늘 부끄러웠었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나는 현실의 각박함을 강조하는 태도보다는 현실의 넉넉함을 읽어내는 태도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마치 생활이 어려울수록 딱딱하고 무서운 아버지보다 밝고 환한 아버지가 가족에게 희망을 주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가 야만적이고 폭력적일수록 한사코 따뜻하고 품위 있는 세계를 이야기해야 사람들이 꿈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폭력을 근원적으로 치유하는 방법이 사랑인 것처럼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완전하게 제거하는 방법은 따뜻함과 자비로움이란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던 것이다.

    조지훈과 박목월의 시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반만년 우리 역사 중 넉넉하고 편안했던 시기가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그럴수록 길가의 꽃 한 송이에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읽고 막걸리 한 잔에서 호사스러움을 느끼는 자족적 태도가 값져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점에서 조지훈의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라는 시구나, 박목월의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시구는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내면의 근심과 걱정은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달 가듯 강물 흐르듯 자신의 인생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풍류객의 참된 의미, 대중가요의 가사를 빌린다면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의 의미를 나는 재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4대 명주의 하나로 꼽히는 분주를 특별히 좋아하게 된 것은 이 술이 가진 청향(淸香)이라는 맑고 산뜻한 향기도 향기이지만 특별한 역사성과 문학성 때문이다. 행화촌의 분주공장 안에 조성된 거대한 비석에는 분주를 ‘중국주혼(中國酒魂:중국 술의 혼)’이라고 자랑하는 말과 함께 분주는 ‘국주지원(國酒之源:국주의 원천’이고, ‘청향지조(淸香之祖:청향의 조상)’이며, ‘문화지근(文化之根:문화의 뿌리)이라고 자부하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두목 시에 나오는 목동상
    두목 시에 나오는 목동상
    청명절에 비는 분분히 내리고(淸明時節雨紛紛)

    길 가는 나그네의 마음은 착잡하다(路上行人欲斷魂)

    주막이 어디메냐고 물으니(借問酒家何處有)

    목동은 손 들어 멀리 ‘행화촌’을 가리킨다(牧童遙指杏花村)

    -'청명'에서-

    중국 술문화의 시원 분주 1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분주에는 확실히 모든 중국 술과 술에 얽힌 문화의 조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예컨대 민국시절 꾸이저우(貴州)에서 간행된 책에서는 자기 지방의 술인 모태주(茅台酒)가 청나라 함풍제(咸豊帝) 이전에 산시의 소금상인인 모씨가 마우타이 지방에 와서 분주를 모방해 만든 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또 이백, 두보, 왕유, 두목, 이하, 이상은, 도연명, 소동파 등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들은 술과 더불어 시를 읊조리는 풍속을 만들어 냈는데 이들이 중원 지방에서 마신 술은 옛날의 분주였음에 틀림없다.

    분주 공장의 안내인이 중국의 어떤 술도 흉내 낼 수 없는 분주의 비법으로 강조한 것은 누룩이었다. 땅에 파놓은, 마치 김장독을 묻는 구덩이처럼 생긴 수백 개의 구멍에서 발효시킨 누룩이 분주의 맛을 결정한다고 안내인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누룩을 만들 때 섞는 여러 가지 곡식의 비율과 첨가료는 비밀이며 현대식 시설을 갖춘 현재에도 그 공정은 반드시 숙련된 전문가가 수작업으로 진행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안내인의 이러한 이야기보다는 공장의 노간부 초대소 옆에 서 있는 목동상에 더 관심이 많았다. 행화촌을 찾아오게 만든 이유가 목동상과 관련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분주의 고향인 행화촌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청명(淸明)」이란 한 편의 시였다.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이 쓴 짧은 시 한 편으로, 행화촌의 분주는 길이 그 이름을 후대에 남길 수 있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시는 두목이 청명절 시기의 어느 봄날 당 현종 때의 공신인 곽자의(郭子儀)의 집에 가기 위해 행화촌을 지나다가 지은 시라고 한다. 당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국으로 말미암아 조상의 무덤도 돌보지 못한 채 객지를 떠도는 나그네의 괴로운 심정과 비 맞아 나른해진 몸이 따스한 술 한 잔을 부르는 상태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이 시는 ‘행화촌’이란 지명으로 말미암아 이후 사람들 입에 회자되었으며 행화촌은 이 시로 중국 미주의 대명사가 누리게 되었다. 물론 지금의 행화촌의 주민들은 두목의 시 때문에 행화촌이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행화촌 때문에 두목의 시가 유명해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

    분주 공장에 있는, ‘소를 타고 있는 목동상’은 두목의 시를 근거로 하여 최근에 만들어 놓은 조각상이다. 그러나 그 조각상 아래에 한참 동안 앉아서 나는 살구꽃 잎이 분분히 날리는 봄날 저녁때 하루를 쉬어갈 주막집을 찾는 나그네의 모습을 상상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명문가에서 태어나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자신의 시에 한시의 영향을 각인시키고 있는 조지훈은 틀림없이 두목의 「청명」을 읽었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그런 나의 생각은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라는 시구와 ‘복사꽃이 피고 진눈깨비가 뿌리는 희한한 날이었다. 불국사 나무 그늘에서 나눈 찬술에 취하여 떨리는 봄옷을 외투로 덮어 주던 목월의 체온도 새로이 생각난다’라는 그의 시작배경 설명으로 더욱 강해졌으며 결국은 나를 행화촌까지 오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나라 말기의 혼란스런 시대에 「청명」을 쓴 두목과 일제 말기라는 참담한 시기에 「완화삼」을 쓴 조지훈은 현실의 날카로운 각박함을 오히려 여유로운 넉넉함으로 받아넘기는 모습을 보여준 시인들이며, 그 매개물이 바로 술이었다. 이들에게 술은 사치품이 아니었다. 어떤 참담한 현실도 인간의 영혼까지 참담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항의의 매개물이었던 것이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6호(2014년 07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