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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그림이라도 비싸게 팔리는 시장은 따로 있다
입력 : 2014.06.25 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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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옥션이 홍콩에서 경매할 때 프리뷰전시장 모습. <사진제공= 서울옥션>
마찬가지로 미국의 1960년대 소비사회를 비꼰 앤디 워홀의 팝아트를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미국 사람들이고, 1·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피폐한 정서를 표현한 유럽의 현대미술작품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는 것은 유럽 사람들이다.
그래서 작가마다 작품마다, 제값을 받고 더 비싸게 팔리는 장소가 따로 있다. 그 작품이 ‘어디에서 팔리느냐’에 따라 그림값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세계 양대 경매회사인 크리스티와 소더비는 세계 주요 도시마다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뉴욕, 런던, 파리, 홍콩 등 큰 도시들에서 연중 경매를 한다. 이들은 위탁자에게서 작품을 받으면 ‘이 작품을 어디로 보내야 잘 팔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서 어떤 컬렉터가 작품을 내놓더라도, 그 작품이 팔리기 가장 적합한 곳을 배정해서 경매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컬렉터가 앤디 워홀의 아주 뛰어난 기록을 깰 만한 작품을 가지고 있다가 소더비나 크리스티에 경매 위탁을 한다면, 아마 그 경매회사는 그 작품을 뉴욕으로 가지고 가서 팔 것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현대 미술작가인 프랜시스 베이컨의 수작을 내놓는다면 아마 런던으로 가지고 가서 경매를 할 것이다. 아시아 컬렉터들에게 인기 있는 중국 현대미술작가 작품을 내놓는다면 아마 홍콩으로 보내질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미국인이 박수근 그림을 팔고 싶으면 우리나라에 와서 파는 게 제일 좋다. 실제로 우리나라 경매에서 초고가 기록을 깨며 팔리는 박수근의 작품은 위탁자가 미국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 미국인이 현지 딜러에게 박수근 작품을 팔아달라고 위탁한 경우인데, 박수근이 가장 비싸게 팔릴 수 있는 곳은 한국이기 때문에 미국에 있는 딜러들이 작품을 한국으로 보내서 파는 것이다.
올해 2월 런던 크리스티에서 7000만달러에 낙찰된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하고 있는 조지다이어의 초상’
올해 2월 런던 크리스티에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자신의 애인을 그린 ‘말하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Portrait of George Dyer Talking)’이 7000만달러라는 고가에 팔려 외신에 화제가 되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경매시장에서 자주 뉴스가 되는 작가다. 그의 ‘말하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은 베이컨의 주관적 표현이 강하게 담겨 그로테스크하게 표현된, 아주 전형적인 베이컨 스타일 초상화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황폐한 정서, 현대인들의 고통과 고독을 담는 영국의 대표적인 화가다.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이고 영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작가기에 그의 그림은 런던 경매에 특히 자주 나온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작년 12월에는 뉴욕 크리스티에서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가 1934년에 그린 ‘위호켄의 동풍(East Wind over Weehawken)’이라는 그림이 4040만달러에 팔려 호퍼의 그림 중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에드워드 호퍼는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유명하지만 우리나라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미국 사람들은 경제대공황 이후인 1930년대 미국의 휑한 분위기를 뻥 뚫리고 쓸쓸한 미국 풍경에 빗대서 그린 호퍼의 그림을 가장 사랑한다. 물론 그의 그림은 현대인이 누구나 가지는 보편적인 쓸쓸함과 공허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1930년대 미국의 분위기를 기억하거나 간접적으로 듣고 자란 사람들, 휑한 미국의 풍경에 익숙한 사람들이 호퍼의 그림에 훨씬 잘 공감할 수 있다. 호퍼의 작품을 소장한 사람들도 대부분 미국사람들이다. 그래서 에드워드 호퍼는 뉴욕 경매에서 매우 자주 나오지만, 다른 나라 경매에서는 흔히 보기 어렵다.
아트바젤홍콩 아트페어에서 관람객들이 야요이 쿠사마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 홍콩 이규현>
최근 몇 년 사이 홍콩이 세계미술시장의 중심으로 부상한 게 대표적이다.
지난 5월 15~18일 홍콩에서는 ‘아트바젤홍콩 2014’가 열렸다. ‘아트바젤(Art Basel)’은 1973년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한 세계 최고 수준의 아트페어다. 이 ‘아트바젤’이 2013년부터 기존의 홍콩아트페어 지분을 60%인수하면서 아트페어의 이름을 ‘아트바젤홍콩’으로 바꿔 새롭게 열고 있다. ‘바젤’의 이름표를 새로 단 홍콩아트페어에는 페이스, 제임스 코헌, 페로탱 등 세계 각국 유명 갤러리들이 300개 가까이 참여했다. 또 참여 작가와 찾아오는 손님들 수준도 세계 어느 아트페어 부럽지 않다.
아트페어는 세계 각국 갤러리들이 모여 5일 동안 부스를 차려놓고 단기간에 작품을 파는 엑스포 같은 곳이다. 당연히 아트페어를 여는 도시의 성격이 중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아트바젤이 애당초 성공한 비결도 ‘바젤’이라는 도시 덕이라는 점이다. 스위스의 바젤은 세계 각국의 부자들이 휴가나 비즈니스 목적으로 자주 찾아가고 돈을 쓰는 지역이다. 또한 스위스는 세계 부자들의 돈이 저금되어 있는 곳이다. 특히 바젤은 유럽의 중심국가인 프랑스와 독일 양쪽에서 다 가까우면서 뉴욕, 런던, 파리처럼 모든 것이 다 들어찬 복잡한 도시가 아니라 ‘미술’과 ‘경제’에만 포커스가 맞춰진 곳이다. 그래서 미술 컬렉터들에게는 더 매력적인 도시다. 이런 이점을 발판으로 아트바젤은 세계1위 아트페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아트바젤’이 2000년대 이후 세계미술시장의 중심이 중국으로 가는 흐름을 읽고 새롭게 시작한 게 바로 ‘아트바젤홍콩’이다. 홍콩에 엄청난 ‘시장’이 있기에 홍콩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현재 홍콩은 미술 경매시장 규모에서 베이징, 뉴욕, 런던에 이어 세계 4위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 톱갤러리들도 2010년을 전후해 이미 홍콩으로 진출해 있다. 홍콩의 상업 중심가인 ‘센트럴’ 지역에는 이미 2009~2010년 사이에 가고시안, 화이트 큐브, 벤 브라운, 펄램, 레만 머핀, 페로탱 등 뉴욕, 런던, 파리에서 1~2위를 다투는 세계적인 갤러리들이 들어와 있다.
‘아트바젤홍콩2014’ 아트페어의 권오상 조각작품 ‘Gilded Hair’.
또, 홍콩은 일단 비즈니스를 하기 쉬운 곳이다. 미술시장 강국으로 우뚝 선 중국의 이점을 갖고 있으면서 중국 본토와 달리 미술품 거래에 면세 혜택을 가지며 세계 주요 금융기관이 들어와 있고 영어가 통하기 때문에, 외국기업이 비즈니스를 하기에 훨씬 쉽다. 중국 본토 미술시장에서는 고미술 위주로 거래가 되지만, 홍콩은 국제도시답게 현대미술 거래가 월등히 많은 것도 서양 갤러리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지역의 경매회사나 갤러리들이 해외 고객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에도 홍콩이라는 지역은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소더비와 크리스티뿐 아니라 서울옥션과 K옥션 등 아시아 국가들의 경매회사들도 홍콩에서 경매를 한다. 서울옥션은 2008년부터 아예 홍콩에 지사를 두었다.
이제는 세계 톱 수준의 미술컬렉터들의 국적이 미국과 유럽을 넘어서서 아시아, 중동, 남미, 러시아 등 세계 곳곳으로 확대됐다. 그래서 ‘어디에 컬렉터들이 모여 있나’를 찾아내는 것이 미술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해졌다. 작품마다 제값을 받는 곳이 따로 있고, 컬렉터들이 모여 있는 곳이 따로 있으니, 그림을 거래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디에서 파느냐’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규현 이앤아트(enart.kr) 대표]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5호(2014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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