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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의 회와 그윽한 와인 봄 맞은 배엔 즐거움 가득
입력 : 2014.03.10 14: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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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각을 세 번에 나눠 먹으라고 했다. 살짝 베물어 씹으니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났다. 씹을수록 더 고소하고 부드러운 향이 입안에 찼다. 비릴 듯도 한데 받쳐낸 무 때문인지 오히려 시원했다. 고명이 되레 강해 마늘쫑을 제쳐놓고 먹으니 어란의 향이 더 깊게 다가왔다.
좋은 안주엔 좋은 술을 곁들여야 예의 아닌가. 이탈리아 최북단 서늘한 곳에서 나온 알로이스 라게더의 ‘테누테 라게더 포러 피노 그리지오’를 땄다. 신선하면서도 부드러운 과일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한 모금 살짝 머금으니 산도가 실린 시원한 첫 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했다. 이어 부드러운 허브향과 열대과일의 풍미가 입안에 가득 찼다. 좋은 안주에 어울리는 기분 좋은 맛이다.
김 셰프가 비교해 보라며 대만산 어란 한 조각을 건넸다. 살짝 은어구이 맛이 났다. 이것도 그런대로 훌륭했지만 숭어 어란에 홀린 입에는 한참 아래로 느껴졌다. 역시 귀하다는 민어 어란과 비교해도 입맛은 숭어 어란 쪽으로 쏠렸다. 숭어 어란은 그만큼 오래 기억되는 삼삼한 맛으로 남았다.
김 셰프는 “숭어 어란은 숭어를 통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비싸다. 손이 많이 갈 뿐 아니라 어란 만드는 노하우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이번엔 역시 그가 직접 정종과 소금에 재어 만들었다는 연어포를 살짝 구워서 냈다. 대구포보다 훨씬 기름지고 육포 같으면서도 전혀 비리지 않고 고소했다. 알 낳으려고 민물로 올라오기 전 바다에서 잡은 국내산 연어만을 쓴다고 했다.
“가을에 민물로 들어오기 전 바다에서 잡은 것만 쓴다. 그래야 알도 맛있고 살도 맛이 있다. 민물로 들어서면 살이 물러져 이 맛이 나지 않는다.”
식자재를 보는 그의 눈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살짝 기분이 달아오를 무렵 회가 나왔다. 단새우와 광어, 도미, 학꽁치, 참치 등이 담겼는데 접시 바닥엔 깻잎처럼 생긴 소엽을 깔았다. 매실과 마찬가지로 혹 있을 수도 있는 균을 방지하는 천연 식재료다. 주인장의 배려가 고마웠다.
먼저 도미회를 한 점 집었다. 팔딱거릴 만큼 싱싱하다. 살짝 씹으니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하고 깊은 맛이 난다. 물기는 없는데 촉촉한 느낌마저 났다.
새 안주가 나온 김에 칠레 산타헬레나의 ‘베루누스 소비뇽 블랑’을 땄다. 옅은 노란색을 띤 와인에선 미미한 꿀향이 묻은 신선한 과일향이 퍼졌다. 한 모금 적시니 입안 전체가 환해졌다. 살짝 고소한 느낌이 나는가 했는데 이어 목 안으로부터 밀감 아로마가 실린 그윽한 꽃향기가 솟아올랐다.
좋은 음식에 대한 사례로 한 잔 권하니 셰프는 대금과 아코디언을 불어 분위기를 돋웠다.
소엽을 곁들여 우엉에 말아낸 학꽁치는 보르도 특급 와인만큼이나 오묘한 맛을 보여줬다. 쫀득쫀득한 식감도 일품이려니와 그냥 맛있다는 말로는 부족할 깊은 감칠맛이 우엉이나 소엽의 향과 조화를 이루며 입안을 즐겁게 했다. 궁금증이 발동해 비결을 물었다.
김 셰프는 비밀이라며 꼭꼭 싼 보자기를 풀었다. 동해에서 잡아 올린 학꽁치를 회를 뜨자마자 다시마로 싸 숙성시켰다는 것. 다시마가 회에 남은 수분을 흡수하면서도 동시에 날아가지 않도록 잡아주고 특유의 감미까지 품어내 살에 탄력이 있고 맛도 훨씬 좋아진다는 것이다. 산도가 살아 있는 베르누스 소비뇽 블랑을 나눴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열대 과일과 꿀 향기가 신선하게 다가와 입안을 즐겁게 했다. 기분이 동한 셰프는 이번엔 가쓰오 회와 고등어 초절임을 덤으로 냈다.
신명이 난 셰프는 성게알초밥을 냈다. 오징어초밥에 성게알젓을 넣은 것이다. 숭어 어란과 성게알젓은 해삼내장젓(고노와다)과 함께 일본 삼대 진미로 꼽힌다. 씹으니 고소하고도 은은한 성게알 특유의 알싸한 향이 입안에 찼다. 봄 바다가 입에 들어온 것 같았다. 셰프는 “성게알은 소금으로는 젓이 안돼 주정을 넣어야 한다. 아는 분이 어렵게 구해줘 겨우 담글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입가심으로 청어 소바가 나왔다. 메밀 소바에 한 달 말린 청어를 살짝 구워 얹었다. 국수에 생선이니 비리지 않겠냐고? 천만에, 이 집 청어 소바는 꼭 맛봐야 할 음식으로 추천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소바의 메밀향 뒤로 다가온 고소하고 달콤한 청어구이의 맛은 몇 달 지나도 침이 고이게 할 것 같았다. 곁들인 단무지에선 매화향이 살짝 느껴졌다. 유자청 넣어 담근 단무지가 그런 그윽한 향으로 다가오다니….
이날 기자의 배는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2호(2014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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